복합 문화 공간에서 근무하는 나는 2020년의 절반을 문 닫은 공간에서 온라인 프로그램을 만들며 지냈다. 2019년까지만 해도 토요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일요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자조하며 전쟁통에 밀려드는 것 같은 인파에 정신을 못 차렸는데, 2020년 봄·여름에는 '빼앗긴 OOO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적막한 일터 안에서 자조했다.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사람들과 온라인으로 접촉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내 업무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직장 내 정치적 역학과 업무의 중요도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코로나19가 한 명의 노동자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건 노동 내용과 방식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근심 강화였달까.

코로나19는 신앙의 내용과 방식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주말 출근 전 빠듯하게 예배당에 도착해 신자들와 함께 예배를 드리거나 업무 시간 변경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코로나19가 열어 준 온라인 예배는 신세계였다. 일찍 출근해 휴대폰을 보며 유튜브로 예배를 드렸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대개 11시 '대'예배를 드리는 다른 교회들과 다르게 10시 예배가 메인이었고, 주말 11시 출근자였던 나도 여유롭게 예배에 집중하며 '매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큰 변화를 겪었다.(엄지척 이모티콘 넣고 싶을 정도로 기쁨)

이처럼 코로나19는 많은 영역을 온라인화하며 사유와 운신의 폭을 좁힌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새롭게 열린 세계도 있다. 모두가 당연히 여기던 세계 바깥에 있던 이들에게 코로나19가 열어 준 세계다. 나도 때로 그 바깥에 있던 이들 중 하나로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셈이고.

<어둠 속의 촛불들 - 코로나 시대의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김병준 옮김 / 비아 펴냄 / 204쪽 / 1만 4000원
<어둠 속의 촛불들 - 코로나 시대의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김병준 옮김 / 비아 펴냄 / 204쪽 / 1만 4000원

한 개인이 기준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주류·비주류 정체성을 두루 전유한다고 할 때, 나는 중산층 집안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주류'지만 여성이자 개신교인이라는 점에서는(!) '비주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또 다른 지점에서 내 비주류 정체성을 또렷하게 느끼는 특정 시간이 있다면 바로 일요일과 월요일이다.

예수님께 진심이어도 업무 특성상 주말 근무를 해야 하는 탓에, 빠듯하게 주일예배를 드리며 죄책감을 느낄 때. 꿀 같은 휴일의 시작인 월요일 아침 라디오를 켜면 세상 모두가 월요일 아침을 저주하는 듯 말하는 DJ의 멘트에서 이질감을 느낄 때. 그때마다 모두가 당연히 여기는 세계 바깥에 서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두 '주중', '낮'에만 일하는 건 아니라고….

그런데 이토록 무심한 세계에 코로나19를 타고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라인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는 예배와 성찬은 지금껏 우리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 그동안 우리가 드렸던 예배를 어떤 이들은 얼마나 멀게 느꼈는지, 함께할 수 없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온라인 예배는 말씀과 기도를 나눔으로써 의미 있는 공동체성을 경험하게 해 주는 사건입니다. 한 친구는 제게 너무나 오랜 기간 교회는 병을 앓고 있든, 장애가 있든 어떤 이유든 수많은 이들이 교회에 직접 나올 수 없는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가끔 성직자가 그들을 방문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고, 코로나 위기를 맞이하고 나서야 교회가 이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새롭고 창의적인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을 그저 잠깐 하는 일로 여기거나 여건상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시적인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기회, 새로운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83~84쪽)

때로 "교회에 직접 나올 수 없는 현실"을 가진 나 같은 상황이,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가 진지하게 여겨야 하는 문제라는 걸 '코로나19'가 발견하게 해 주었다니. 감개무량했다.

내가 처한 신앙의 자리를 저 먼 곳의 한 사제는 어떻게 알았을까? 다만 '저 먼 곳의 한 사제'라고 부르기엔 책날개 한 귀퉁이에 그의 탁월함, 탁월함이 적혀 있긴 하지만. 책날개의 빛나는 스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안목 때문에 난 그의 탁월함, 탁월함을 깨닫고야 말았다.

<어둠 속의 촛불들>(비아) 중간쯤 자리한 '온라인 예배'라는 챕터에 난 오래 머물러 있었다. 학자·목사들이 '온라인 예배의 적절성'에 대해 토론할 때, 여러 이유로 그동안 예배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이들을 먼저 떠올린 사람. 교회가 코로나19 상황을 새로운 기회이자 출발로 삼아야 한다며 앞서간 논의를 꺼낸 노사제 로완 윌리엄스. 그의 지적이면서도 자애로운 시야가 이 책을 구성한 스물여섯 개의 짧지만 긴급하면서도 다정한 메시지를 이끌어 냈을 터. 그 덕에 이 책은 온기로 가득하다. 

그동안 시적이고 난해한 윌리엄스의 책들을 보고 '영국식 지성'의 불친절함과 나 자신의 '시적 감수성' 부족을 탓하며 거리감을 느낀 '일반 신앙인 독자1'이었던 나는, 이 책에서 그를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옭아매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훨씬 편협하고 삭막한 세상으로 보게 만드는 그 우상을 폭로하기 위하여"(78쪽) 세례의 폭포수 아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할 때는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검은 사제 윌리엄스를, 마리아의 몸속에 깃든 "작디작은 변화에서 온 세상을 뒤집어엎을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하느님"(14쪽) 이야기를 건넬 때는 절망에 빠지기 일쑤인 현대인을 감싸 안는 흰 사제 윌리엄스를 만났다. 매 챕터 인트로를 맡고 있는 흑백으로만 이뤄진 그림이 흑백을 모두 지닌 그의 글과 찰떡이라는 건 안 비밀.

흑백의 사제(?) 로완 윌리엄스(Rowan Duglas Williams 1950~). 사진 출처 플리커
흑백의 사제(?) 로완 윌리엄스(Rowan Duglas Williams 1950~). 사진 출처 플리커

그래도 우리는 코로나19로 교회와 인류가 어떤 "변화의 시작"에 서게 됐는지 포착해 건넨 그의 정확한 메시지 안에서, "삶에 '허비'란 없다"(34쪽)고 말하며 손잡아 주는 백색 사제 로완 윌리엄스를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리라. 어두울수록 광채를 발하는 그리스도교의 빛은 이전엔 경쟁자였던 이웃, 그저 욕망의 대상이었던 동물·자연이 나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 비로소 눈뜨게 할 거라는 게 백색 사제의 전언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 이 어두운 때 더욱 빛나고 있다는 것을 조곤조곤 확신 있게 전하는 그의 하얀 목소리는 코로나19를 넘어 삶의 고비 고비마다 생각날 테다.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하느님께 계속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돕는, 지극한 현실과 지극한 천상을 연결하는 역할에 충실한 로완 윌리엄스의 문장들. 목회적 돌봄으로 충만한 문장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이 문장들을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 마시는 내 머그잔과 밤마다 아이스 미숫가루를 타 먹는 내 맥주잔에 새겨 놓고 계속 읽고 싶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의 어둡고 무덥고 습한 여름을 지날 생각에 벌써부터 버거운 분이 계실지? 책은 읽고 싶은데 날은 덥고 마음은 지쳐 책 펼칠 엄두가 안 나는 분은? 그렇다면 짧고 다정한 스물여섯 개의 메시지로 채워진 이 얇은 책은 당신의 여름을 위한 '원픽'으로 손색이 없을 것.

박혜은 / 한양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숭실대에서 '권정생의 세 장편동화에 나타난 성서적 주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죠이선교회에서 오랫동안 간사로 일했고, 남들보다 좀 늦게 사회에 나와 책과 관련한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현재는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에서 운영팀 매니저로 일하며 책과 사람을 잇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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