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있어 예배는 복음의 전파만큼이나 본질적 요소이다. 예배의 일차적 목적은 경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령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다.1) 하지만 교회는 예배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거나 도덕적·윤리적 교훈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한다.2) 추모 예배와 같은 교회의 역할에 따른 예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예배의 양식을 띠고 있는 만큼 목회자는 그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사 속에서 예배의 변질은 곧 교회의 변질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났다. 1년 전 참사의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언론에 나와 책임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을 약속하고 호언장담豪言壯談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지켜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여전히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9일 서울광장에서 열렸던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 추모 대회에 불참을 통보하였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난 26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불참 방침 배경과 관련해 "유가족들이 마련한 추모 행사로 생각했는데 야당이 개최하는 정치 집회 성격이 짙다"고 설명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정치 집회 성격'을 이유로 사회적 참사를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 불참한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태이다. 만약 윤 대통령이 책임자 처벌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현실에 책임을 통감하며 정치적 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불참을 결정했다면 필자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 29일 영암교회(유상진 목사)에서 진행된 별도의 추모 예배에 참석해 오히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소위 '추모 예배'는 추모사를 읽는 대통령의 행위를 보여 주기 위해 기획되었으며 예배를 도구로 이용한 명백한 '정치 행사(political event)'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다음의 두 가지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첫째, 정치인이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종교적 제례에 참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 정치인이 공적 행사로서 종교적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이번 논란은 두 가지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 대통령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적도 없고 추모 예배는 교회에서 원래 기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대통령실의 요청으로 급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심각성은 예배를 정치적 선전 도구로 사용하려는 권력자의 불의한 요구에 교회가 맞서기보다는 순순히 순응하였다는 데 있다. 유상진 목사는 "목회자는 추모 예배를 요청하면 그가 누구든 상관 없이 추모 예배를 드리는 게 마땅하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주장은 예배의 본질이나 교회의 역할을 무시하는 궤변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번 '정치 행사'는 고인을 기억하며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 예배의 목적과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가족과 그 아픔에 공감하는 교인들도 없이 오직 대통령실 관계자 및 영암교회 일부 목회자와 장로만 참석한 행사를 추모 예배라고 포장한다면 추모 예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차라리 교회 측에서 윤 대통령의 불의한 요구에 맞설 용기가 없었다고 고백했다면 대통령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교회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 측의 논리가 맞는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 앞에서 회개나 참회의 과정도 없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한 추모 예배를 드리겠다고 요청할 때 교회는 무조건 예배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추모 예배의 가치를 훼손한다. 추모 예배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목회자라면 그 가해자에게 자신의 죄악에 대해 회개하고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교회 측의 말도 안 되는 핑계는 권력자의 불의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회개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드러낼 뿐이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기부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예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종교를 무시하는 천박한 특권 의식을 보여 주지만, 한국의 보수 교회는 기꺼이 예배를 정치 선전의 도구로 제공하였다. 근·현대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권위주의적인 정치 지도자는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적 정당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에서 교회의 "파수꾼"3)으로서 역할을 인식하는 건강한 교회는 왜곡된 정치 행위를 비판하며 저항했지만, 타락하고 병든 교회는 자발적으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권위주의적인 정치권력의 불의한 요구에 맞서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위한 교회의 저항을 정치적 예배(Politischer Gottesdienst)라는 용어를 통해 구체화했다.4) 그는 정치적 영역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법치, 평화, 자유 등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는데, 정치적 예배란 바로 교회가 이를 돌보기 위해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5) 바르트에 따르면, 나치 정권(NS-Regime)이라는 권위주의적인 정권의 불의한 요구에 맞설 수 있는 교회의 힘은 교회와 국가의 권력과 권위가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에 있다는 확신이며, 이는 국가 권위의 상대화를 전제로 한다.

교회의 예배를 정치 선전 도구로 사용하려는 국가의 불의한 요구에 따르는 것은, 결국 교회가 스스로 예배를 변질시키는 것이며 이는 교회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신앙적 가치를 왜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보다 정치적 지형의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정치 윤리에 무감각한 한국교회의 이중적 의식이 반복해서 같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신학과 정치 사이의 내적 연결성을 강조하며 정치적 질서와 구원론적 질서의 일치에 집착하였던 전체주의의 비극을 충분히 경험하였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의 이익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수많은 종교인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왜곡된 현실이 정치권력에 대한 교회의 파수꾼으로서 역할, 곧 "교회의 예언자적 파수꾼 직무(der prophetische Wächterdienst der Kirche)"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6)

과거 나치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였던 '독일 그리스도인(Die Deutschen Christen)' 운동은 독일 사회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1970~1980년대 한국교회는 군사 독재 세력과 결탁하는 과정에서 같은 역사적 잘못을 이미 한 차례 저질렀다. 2020년 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 극우 세력의 부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한국교회가 2023년 다시금 정치 선전 도구로서 예배를 변질시킨다면 한국교회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박성철 / 경희대 객원교수,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새물결플러스) 저자.

1) 웨인 그루뎀/노진준 옮김, <조직신학 하> (서울: 은성출판사, 2009), 249-257.

2) 일리온 T. 존스/정장복 옮김, <복음적 예배의 이해>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8), 226-228.

3) Karl Barth, Politische Entscheidung in der Einheit des Glaubens, ThEx NF 34 (München: Chr. Kaiser, 1952), 3.

4) Karl Barth, Gotteserkenntnis und Gottesdienst nach reformatorischer Lehre: 20 Vorlesungen (Gifford-Lectures) über das Schottische Bekenntnis von 1560 gehalten an der Universität Aberdeen (Zollikon: Verlag der Evangelischen Buchhandlung, 1938), 206-207.

5) Andreas Pangritz, <Politischer Gottesdienst. Zur theologischen Begründung des Widerstands bei Karl Barth>, Communio Viatorum 39 (1997): 223.

6)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Zürich: EVZ, 197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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