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울 퀴어 문화 축제'가 신청한 서울광장 사용이 불허됐다. 서울광장 사용은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시민위원회)'에서 결정하는데, '퀴어 축제를 바라보는 시민의 입장에서 굉장히 불편하다', '참여자들은 소수자들인데 이들을 위해 국민 대다수가 피해를 본다', '저게 왜 문화인지 모르겠다' 식의 발언이 작년 시민위원회에서 오갔다.

올해 시민위원회는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성소수자들을 인정하는 문화인 걸로 받아들이게 된다',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권리도 중요하다'는 의견과 더불어 퀴어 문화 축제를 불허하고, 같은 날짜에 신청한 CTS문화재단의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를 허가했다. 이 시민위원회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 추모 문화제 분향소 설치' 신청을 불허하기도 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사IN> 821호(2023. 6. 13.) 44~46쪽에서 볼 수 있다).

당연히 저 CTS는 기독교 방송사다. 아마도 퀴어 문화 축제를 가로막기 위해 기독교 관련 콘서트를 하겠다며 같은 날짜 행사를 제출했을 것이다. 오세훈 시장이 임명한 시민위원회는 퀴어 문화 축제를 불허하고, 그 자체로 기독교적 색채를 띤 CCM 콘서트 행사를 허가했다. 이런 식이면 이제 서울광장에서는 불교에서 진행하는 법회가, 그리고 여러 다른 종교에서 진행하는 종교 집회가 늘 열리는 것이 당연하게 되는 것인가.

시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서울광장. 그러나 올해 서울 퀴어 문화 축제는 광장 사용을 불허당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서울광장. 그러나 올해 서울 퀴어 문화 축제는 광장 사용을 불허당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서울 퀴어 문화 축제'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다. 우리 사는 세상에는 성소수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1년에 단 한 번, 우리 사회에 다채로운 사람이 존재함을 알리는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축제가 열린다. 누구를 욕하는 것도 아니고, 해치거나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온갖 다채로운 모습으로 부스를 꾸미고, 사람들이 자유로이 왕래하고, 즐거워하고 노래하며 행진하고 누리는 날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일부는 이 행사를 매년 줄기차게 방해했다. 서울광장 곁에 어마어마한 앰프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동성애'를 정죄하고 저주하는 소리를 줄기차게 틀어 댄다. 그 자리에 가 본 사람은 단박에 알 수 있다. 누가 못된 놈들인지. 누가 정말 나쁜 놈들인지. 1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를 기어이 가로막는 것이 이른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기독교 집단이라는 것이 다만 기가 막힐 따름이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이자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으로 긴 세월 참여해 온 한채윤 님은 퀴어 문화 축제를 비롯한 성소수자 운동의 목표를 이렇게 표현한다.

"성소수자 운동의 목표는 '조용히 티 내지 않고 있으면 너희가 뭘 하고 살든 상관하지 않겠다'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드러내는 거다." [<시사IN> 821호(2023. 6. 13.), 49쪽].

언제나 주류 집단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드러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장애인들에게도 거리를 다니지 말고 시설에 있으라고, 이동권 같은 것은 요구하지 말고 시설에 있으라고,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성소수자들을 향해서도 내색하지 말고 드러나지 않게 살라 한다. 차별금지법이든 퀴어 문화 축제이든 거리로 나오거나 드러내지 말고, 이제까지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 있어서는 그 끔찍한 '기독교' 세력도 하나 다르지 않다.

서울 퀴어 문화 축제는 1년에 한 번 열린다. 그 단 한 번을 일부 기독교 세력은 매년 가로막아 왔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서울 퀴어 문화 축제는 1년에 한 번 열린다. 그 단 한 번을 일부 기독교 세력은 매년 가로막아 왔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복음서를 보면 늘 놀라게 되는 점이 있다. 주후 1세기 갈릴리에 그렇게도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 아픈 사람이 많았던가. 어느 시대나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할 텐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자들은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귀신 들린 사람들은 또 어찌 그리 많은지 그야말로 사방에서 등장한다. 어떤 이들의 시각으로는 그 시기가 평화로웠을 수도 있지만, 복음서가 그리는 시각에 따르자면 주후 1세기 초반은 온 유대와 갈릴리 전체가 병자로 가득한 세상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이 시기 유대 사회가 어떤 곳인지 그대로 드러내신다. 주님이 가는 곳마다 온갖 아픈 사람들이, 괴로운 사람들이, 곤고하고 힘겨운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주님은 그렇게 거리로 나아온 이들을 고치시며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 격려하시고 회복을 선언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네 교회는 이들이 거리로 나오는 것을 그리도 반대한다. 이들이 거리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자신들의 존재 그 자체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1년에 한 번 하는 축제에 꼭 재를 뿌린다. 이것은 이른바 '극우적 기독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나름 개혁과 변화를 말한다는 사람들 역시 성소수자 문제, 차별금지법 관련 사항만 나오면 입을 닫고 가장 안전한 길로 간다.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든 차별금지법이나 퀴어 문화 축제가 그런 견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입을 꼭 다문다.

어쩌다 입을 열면 "차별금지법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법 제정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식의, 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오로지 자신의 안전에만 도움이 되는 말을 할 따름이다. 퀴어 문화 축제를 '소수자들의 것'이라고 보는 서울시 시민위원회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기댄 지극히 '안전한 길'을 선택했고, 우리네 교계 인사들 역시 지극히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 그 와중에 번번이 장애인도 소수자도 밀려나고 밀려난다.

1세기 교회 이래 제국과 권력의 박해를 줄기차게 겪으며, 모진 고난 속에서도 삶의 전부를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며 살아왔던 기독교가, 이제는 자신들의 세력과 힘을 휘둘러 다른 집회를 방해하고 다른 집단을 훼방하는 데 앞장선다. 그것이 복음이라며 말이다. 당연히 저들은 그런 행동이야말로 소수자들에 대한 '사랑'이라 말할 것이다. 언제나 우리네 교회가 절망스러운 까닭은, 뭐든 온갖 못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올해도 서울광장은 아니지만 여전히 퀴어 문화 축제는 열린다. 그리고 서울광장에서는 'CCM 콘서트'가 열릴 것이다. 그렇게 올해 열릴 퀴어 문화 축제는 우리네 기독교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배타적 집단인지 드러내며 고발할 것이다. 서울광장에서 울려 퍼질 CCM은, 우리 찬양이 어떻게 우리 사회와,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소수자 이웃의 기쁨·눈물과 거리가 멀어졌는지 여실히 드러낼 것이다.

김근주 / 기독연구원느헤미야.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