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글쎄다. 각박한 현대인에게 사랑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 하면 곧바로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의 사용'을 떠올리고 '사랑할 때의 이익'을 따져 보는 버릇이 있다. 자기 계발 하기도 바빠 '사랑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나 살기조차 버거운데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예쁜 사랑을 상상한다는 건, 아직 철이 덜 들었거나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나 가능한 일일 테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이건 더 어렵다. 누군가를 향해 날이 잔뜩 서려 있는 나의 마음이 치유될 날은 아득하다. 나 또한 타인의 마음에 깊게 팬 상처를 잔뜩 남겨 놓았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 거짓과 배신으로 얼룩진 마음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상처 입은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졸렬한 나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없다.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할 수 있을까? 이제는 말이 안 되는 지경이다. 내 옆의 동료조차 사랑할 수 없는 내가 무슨 재주로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분은 자신의 사랑에 경계 따위를 설정해 놓지 않는 분이다. 그분은 사랑에 이유도, 조건도 달지 않는 분이다. 나는 그런 사랑을 할 자신이 없다. 아니, 평생을 노력해도 그렇게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연인 간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이든, 친구와의 사랑이든, 이웃을 향한 사랑이든…. 다시 사랑할 자신도, 순수한 사랑을 바칠 용기도, 주님의 사랑을 닮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여기까지 인정하는 게 참 어려웠다. 그렇다. 나는 사랑의 실패자다. 적어도 사랑이라는 '감정'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 초기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 / 로버타 본디 지음 / 황윤하 옮김 / 비아 펴냄 / 276쪽 / 1만 4000원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 초기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 / 로버타 본디 지음 / 황윤하 옮김 / 비아 펴냄 / 276쪽 / 1만 4000원

로버타 본디의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 초기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비아)는 사랑의 실패자인 나와 (아마도) 당신에게 건네는 사랑의 위로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아니,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세밀한 사랑의 목소리다. '당신은 사랑의 실패자가 아니라 이미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랑의 구도자입니다'라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따뜻한 (그러면서도 단호한) 사랑의 길로 우리를 부르는 초대장이다. 이 초대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이 사랑에 실패했어도 괜찮습니다. 이미 사랑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당신이 그저 이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내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사랑을 단념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본디의 초대로 만나게 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막의 교모와 교부들이다. 본디는 사막 그리스도교 전통을 일반적인 교회와 다른 수도원 전통의 곁가지로 이해하기보다는 전체 교회의 전통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 유산으로 받아들인다. 그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의 커다란 두 줄기는 '성서'와 '사막 그리스도인들의 금언집'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공통 유산을 통해 '그리스도인 되기'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의 지혜를 맛볼 수 있다.

성서가 그리스도인의 헌법과 같다면, 사막 그리스도인들의 금언집은 이 헌법에 대한 판례집이다. 성서가 '그리스도인 되기와 살기'의 대원칙을 말하고 있다면, 사막 그리스도인들의 금언집은 대원칙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실천한 사례를 말하고 있다. 본디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되어 가는 삶'을 위한 지혜를 이 공통 유산에서 대화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현대인에게 대접하고 있다.

'대화'가 핵심어다. 우리의 대화 상대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주지하자. "4세기와 6세기 사이 근동 지역,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에서"(16쪽) 살았던 그들은 우리와 다른 문화를 향유하며, 다른 시공간을 살아간 그리스도인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 신비화하거나 맹신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케케묵은 전통이라고 다짜고짜 거부하는 태도도 어리석다.

맨눈으로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듯,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지혜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다. '질문하기와 경청하기'를 토대로 하는 대화, 과거의 지혜와 현대의 삶을 잇기 위한 '해석학적 대화'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한다. 본디는 세심하고 따뜻한 자세로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우리 사이에 풍성한 대화의 장을 주선하고 있다. 연대순에 따른 교과서적 나열이나 교리 주제에 따른 유형적 분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인 삶의 궁극적 목표에 비춰 대화를 주선하는 것이다.

첫 대화부터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본디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완전한 그리스도인 되기'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이 '완전'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과연 완전해질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는다.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겠느냐' 반문한다. 완전을 향한 노력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율법주의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유혹이라며 '완전'이라는 말을 의심한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8)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요구되는 공통 목표는 사랑이다. 주님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이자 "완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지 뭐", "나는 그저 인간에 불과해"라는 자조적인 현대인의 인간 이해는 "완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과 상충한다. 끔찍한 전쟁과 참사,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비인간적인 사건·사고를 마주하며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고 절망한다. "인간만큼 무서운 게 없어"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 관한 이러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압도적인 선물을 받아 개인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활동이 언젠가 온 인류, 온 세계를 사랑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48쪽)

'완전한 그리스도인 되기', 곧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는 삶을 살기'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결코 외면하거나 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불안한 인간의 자화상보다 강하며, 성육신해 이 땅에 임한 그리스도의 삶은 마침내 우리가 온 세계를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자 근거다. 그러나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실패자인 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불완전하고 연약한 내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나를 오롯이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게 정녕 가능한 일일까?

사랑에 실패했다고, 더 이상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고, 상처로 얼룩진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없겠다고 자조하는 나에게, 본디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지혜를 빌려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과 환경에 휘둘리는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지나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궁극적 목표로서의 사랑,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목표가 아닌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모든 행동, 심지어 사소한 행동에 작용하는"(61쪽) '성정으로서의 사랑'이라고. 본디가 사막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서 길어 올린 성정으로서의 사랑은 상대를 향한 우리의 태도, 상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상대를 향한 우리의 헌신을 포괄하는 행동이기에 평생에 걸친 훈련이 필요하다.

사랑을 감정으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면 결국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은 얕은 물과 같아서 작은 돌 하나만 던져도 큰 소리가 나고 물결이 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하라"고 명령하시고 결국에는 스스로 보여 주신 사랑이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한 성정으로서의 사랑은 깊은 물, 심연과 같아서 끝끝내 사랑의 태도와 자세를 견지하며 마침내 "완전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단념하지 않고 따라나서게 우리를 이끈다.

"성정으로서의 사랑은 추상적인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질적인 필요를 늘 살피고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2쪽)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삶, 곧 성정으로서의 사랑이라는 목표를 향하는 삶은 지난한 여정이다. 따스한 햇볕과 생명력 넘치는 푸른 들판을 기대하지만,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없는 건조한 사막이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잘 알았다. 성정으로서의 사랑을 견지하고자 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권력을 향한 다툼과 타인에 대한 지배욕 등 우리 삶에 사랑을 위한 자리가 거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이들은 성정으로서의 사랑에 이르는 '겸손'의 길을 택했고, 분투하며 끝끝내 그 길을 걸었다.

사막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겸손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이라는 확신과 하느님을 향한 신뢰에 기초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사랑할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친절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은총의 선물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은혜로 받드는 것이 겸손이다. 실패한 사랑을 단념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용감하게 사랑하는 것이 겸손이다. 우리가 모두 죄를 짓기 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을 이겨 냈다고 자신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이웃의 연약함을 목격할 때 큰 충격에 빠지거나 비난하지 않을 수 있다. "겸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책임을 지게 하며, 환멸에 빠지지 않게"(120쪽) 한다.

겸손은 '성정으로서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내가 타인을 원망하는 수렁에 빠져 분노로 벽을 쌓을 때, 겸손은 '모든 인간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분노의 벽을 무너뜨린다. 나의 모난 마음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두려워 사랑에 주저할 때, 겸손은 "너는 인간이니 영웅적인 자아상을 버리라"고 말하며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내 손에 들려 준다. '인간인 내가 어떻게 감히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할 수 있겠어'라고 단념하는 내게, 겸손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고, 그는 겸손하셨기에 우리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격려한다.

그래, 나는 사랑에서 실패했지만 주께서는 사랑으로 완전하셨다. 그러므로 내 사랑의 실패는 사랑을 멈추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교만이다. 주님은 내게 사랑으로 완전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고, 그 길을 걸으셨다. 지금도 주님의 따스한 은총으로 나는 사랑의 길을 걷고 있다. 내가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러한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이다.

그러니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겠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심지어 상처 받는다 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 주께서 사랑하시듯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지금도 나의 감정은 갈팡질팡 엎치락뒤치락 종잡을 수 없지만, 사랑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성정으로서의 사랑'을 나는 할 수 있다. 성정으로서의 사랑은 얄팍한 잔물결이 치는 감정의 물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사랑은 감정의 물가에 기꺼이 발을 담그고, 서서히 발목과 다리에 차오르는 깊이를 지나 마침내 몸통과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성정'이라는 심연으로 나를 이끈다. 사랑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나를 사랑의 심연으로 초대하고, 그곳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한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 되기', 곧 그리스도인으로 '완전'해지기의 모습이다.

하루하루 계속되는 현장에서 나는 또 사랑에 실패할 것이다. 탐욕과 탐식이 나의 눈을 가릴 것이다. 때로는 음욕이 또는 우울감과 슬픔이 나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지금 내가 사랑의 길 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 책의 부록에 수록된 본디의 삶이 보여 주듯, 우리는 모두 사랑을 시도하고 또 사랑에 실패한다. 그러나 그가 끝끝내 떠나지 않고 선택한 사랑의 길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시시해하지 않고, 섣부르게 단념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며, 주께서 명령하신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감동적으로 증언한다. 그래, 사랑의 길을 선택하자. 사랑하는 길을 걷자. 정념이 모래 먼지처럼 쌓여 그 길을 가릴 때, 그래서 정념의 사막을 걷게 될 때, 그럴 때 사랑을 체념하지 말자. 묵묵히 사막을 걷자.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타는 듯한 갈증 앞에 나는 무너질 수 있다. 용기 내어 사랑의 길을 택했지만 어느새 정념의 모래에 빨려 들어가는 두 발을 보며 낙담할 수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내가 절망하지 않는 한, 그 모래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그러니, 이를 다시 한번 겸손을 붙드는 기회로 삼자. 사막을 걷고 있지만, 절망하지 않는 한 나는 겸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겸손의 길은 사랑의 길로 이어지는 에움길이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사막에서는 섣부르게 사막 너머의 푸른 들판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묵묵히 건조한 사막을 지날 때 마침내 당신과 나는 사막에 터한 선배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사막을 찾아 떠난 교모와 교부들은 우리에겐 닳디 닳아 버린 그리스도교 사랑의 언어들을 우리 앞에 가져와, 새로운 의미로 낯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할 것이다. 사막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는 사랑의 실패자인 우리에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이유와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 대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떻게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의 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의 말이었던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윤관 / 삶을 사랑하려고 애쓴다. 전주강림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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