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을 지나다 보면 교보문고 글판에 적힌 글 한 토막에 마음이 머물고, 글귀도 우리 마음에 머문다. 정현종 시인의 글은 그 이름처럼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다녀갔다. 굳이 보태자면,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이들의 문을 두드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방문객' 중)

우리 곁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저마다 헤아릴 수 없는 삶의 질곡을 크고 작은 용기로 헤치고 나와 우리에게 다다른 손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손님 속에 깃든 소우주를 환대하는 데 실패하고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똑같은 실패를 예수께도 범한다. 심지어 그는 객이 아니라 우리의 주로 오시는데도 말이다.

예수께서 오셨다. 그리고 오신다. 예수라는 한 사람이지만, 그와 함께 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든 세대가 고대했던 참생명의 빛이 그와 함께 돌입한다. 그러니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 압도적인 경이 앞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가 있다. 바로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단지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에게 한 사람으로 온 하나님을 바라본 경이의 해설이다. 윌리엄 윌리몬은 잃어버린 성육신의 경이를 되찾고자 <성육신 - 하늘과 땅이 겹치는 경이>(비아)를 썼다.

"성육신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충만하게 드러내셨다'는 신비에 대한 묵상과 성찰의 산물이자 그 절정입니다." (19쪽)

"초기 교회부터, 오래된 신경부터 그리스도교는 계속 예수의 탄생이 기적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지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기보다 '예배와 경배로의 부름'에 가깝습니다." (32쪽)

<성육신 - 하늘과 땅이 겹치는 경이> / 윌리엄 윌리몬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 172쪽 / 1만 2000원
<성육신 - 하늘과 땅이 겹치는 경이> / 윌리엄 윌리몬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 172쪽 / 1만 2000원

책의 부제대로, 성육신은 '하늘과 땅이 겹치는 경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시큰둥하다. 어쩌다 그 경이를 잃어버렸을까? 언제 어디에서 그 감격을 떨어뜨렸을까? 성육신을 기쁨으로 고백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성육신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부활이니 하는 초자연적인 신앙고백들은 인기가 없다. 그 원인으로 과학적 세계관이나 이성과 합리성을 꼽을 수도 있지만, 예수를 본 원년元年의 사람들의 반응 역시 예수를 거절하고 죽이기까지 할 만큼 싸늘했다. 성육신은 처음부터 줄곧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성육신을 고백하기 어려운 이유로 과학 혁명 이후의 이성을 꼽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오시기를 바라는 데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수용하고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방식이 얼마나 타당한지 입증하는 데 시간과 열정을 쏟는 동안 우리는 성육신의 신비로부터, 주님께서 오시는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성육신>은 대림절에 꼭 알맞은 서적이다. 이 책은 묻는다.

"여러분은 과연 하느님께서 오시는 대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61쪽)

여러분은 과연 하느님께서 오시는 대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하느님께서 오시는 대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대림절은 단지 성탄절을 준비하는 절기, 예수의 생일잔치를 준비하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살펴 우리의 삶의 자리로 꺼내 오고, 오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시간이다. 우리 삶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우리 욕망과 열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길을 닦는 계절이다. 성육신은 그 길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데 좋은 나침반이 된다.

성육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놀라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새로운 길'이 우리에게는 새롭지 않은 '인간'이라는 길에 있다는 모순 때문이다. 반전에 반전, 허를 찌른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인간이시다. 교회는 이 모순 속에서 꾸역꾸역 전진해 왔다. 하나님과 '거의' 같은 분(양자설), 하나님처럼 '보이는' 분(가현설)이 아니며, 훌륭한 '피조물'(아리우스주의)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이며 참으로 인간이라는 이 모순을 손쉽게 혹은 억지로 해결하지 않았다. 그 모순 자체를 끌어안기로 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한 서로 다른 두 속성을 억지로 꿰맞추거나 심하게 단순화시키지 않고 '맹렬히 적대적인 두 속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경이롭게 결합된다는 지혜를 발휘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89~90쪽)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지만, 동시에 우리와 전적으로 달랐다. 윌리몬은 교회가 이 모순을 해결하기보다는 그 모순이 발생한 이유에 주목했음을 알려 준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대답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가 그 이유다.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는 그가 우리 중 하나가 될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현재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다. 그분이 우리의 인간적 활동 속으로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신뢰할 때, 그 모순이 우리 속에서 경이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성육신이 자아내는 경이는 우리와 상관없는 경외가 아니다. 성육신은 진리가 인격적이었다는 사실을 더듬어 올라가, 우리도 참으로 인간적인 사랑의 삶으로 그 경이를 살아 내도록 요청한다.

이 책의 목적은 분명하다. 성육신이 식상해져 버린 이들에게 그 경이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것, 오직 그뿐이다. 그리스도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다. 성육신 교리를 촘촘하게 살피거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이 책의 과제가 아니다(이를 원한다면 출판사가 공들여 붙인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하늘과 땅이 겹치는 경이로 초대할 뿐이다. 그런 이유로 앞서 이야기했듯 이 책은 대림절에 맞춤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성탄절의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고들 한다. 무슨 이유일까, 우리가 동심에서 멀어져서인지, 성탄절 교회 행사가 줄어서인지, 저작권 문제로 거리의 캐럴이 사라져서인지,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아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허전하다. 그러나 허전함을 달래겠다고 엉뚱한 데서 성탄절의 기쁨을 찾고자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 진정 성탄절의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할 곳은 한 인간이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성육신뿐이다. 그 경이를 되찾아 다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한 사람으로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정말 그렇다고.

이광희 /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일의 예배>(브랜든선교연구소), <예배의 감각>(비아)을 한국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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