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순서

- 2024년 로잔 한국 대회에 바란다(상)
1. 총체적 복음의 가치로 이어 온 로잔 운동 50년
2. 왜 로잔 한국 대회인가?
3. 로잔 한국 대회 새롭게 준비돼야 한다.

-2024년 로잔 한국 대회에 바란다(하)
4. 로잔 한국 대회에 드리는 제언
5. 복음주의 사회 선교 운동가로서의 개인적 소회

1. 총체적 복음의 가치로 이어 온 로잔 운동 50년

1974년 개최된 로잔 대회(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 총회)를 통해 국제 로잔 운동이 첫발을 내디뎠다. 국제 로잔 운동이 출범하게 된 배경이 있다. 20세기 초까지 서구는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앞세워 인류 무한 성장의 기대를 이끌었다. 서구는 이를 전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근대 문명주의적 사명과 함께, 당시 서구의 신앙이었던 기독교를 세계에 선교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러나 제1·2차세계대전은 이 모든 낙관주의와 서구적 기독교 운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깊은 반성과 성찰을 가져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선진적 기독교 신앙과 문명의 확산은 고사하고 결국 같은 기독교 국가들(개신교·가톨릭·정교회)끼리 벌인 세계 식민지 쟁탈전이었기 때문이다. 또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역시 히틀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추앙한 국가 교회의 축복 속에서 집단 학살극을 자행한 사실을 전 세계가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와 선교, 복음화는 깊은 반성과 고뇌에 빠지는 게 당연했다.

그 결과, 세계 교회와 선교 기구들은 인간화 과제와 함께 가지 않는 복음화는 반쪽일 뿐 아니라 왜곡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변화된 세계 상황에서 교회연합운동과 인간화 과제까지 끌어안은 포괄적 선교 운동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겨 만들어진 것이 1948년 출범한 세계교회협의회(WCC) 운동이다. 그러나 WCC가 지나친 인간화·상황화에 치중하고, 선교를 소홀히 한다는 불만 속에서 일단의 복음주의자들은 드디어 1974년 국제 로잔 운동을 시작했다.

로잔 운동의 가장 큰 기여는 특정 교파·교단·단체·기구·인물의 개별적 성향과 관심에 따라 이리저리 치우쳐 왔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선교적 활동을 성경의 맥락대로 '총체성', 곧 온전함의 기준으로 재평가한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교회)는 개인 전도 중심의 복음화와 선교만이 우리의 과제와 사명의 전부라고 믿어 왔다. 이에 대한 반발로 출범한 WCC 운동은 전통적 선교를 무시하고 인간화와 사회변혁적 과제가 전부인 것처럼 치우쳤다. 

로잔 운동은 첫 대회인 1974년부터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교의 불변적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가 그동안 (억압받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등한시한 것과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을 회개한다."(언약 5장)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가 보다 중심적인 사역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이러한 로잔 운동의 기본 뼈대와 문제의식은 이후 1989년 2차 마닐라 대회와 2010년 3차 케이프타운 대회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물론 변화도 있었다. 2·3차 대회를 비롯해 해가 갈수록 다양한 과제(세계화·다원주의·국가주의· 민족주의·생명·환경 등)에 대한 대응이 부각됐다. 그것이 선교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실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서구권보다 비서구권 참가자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그들의 요구가 왕성히 반영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이에 비례해, 세계 선교를 이끌고 주도해 온 서구권이 소위 선교 모국으로서가 아니라, 다시 선교를 받아야 할 선교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40년 동안 인도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이 너무나 많이 변한 모국의 상황을 보며, 서구 사회도 다시 피선교지로 봐야 한다고 탄식했던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한다.

로잔 운동은 지난 50년 동안 운동의 주역과 중심 주제와 내용까지 시대 상황에 맞춰 끊임없이 변해 왔고,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하다. 선교란 결국 변치 않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끊임없이 변해 가는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유효하게 전파할 것인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로잔 2차 대회 모습. 로잔 운동 홈페이지 갈무리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로잔 제2차 대회 모습. 로잔 운동 홈페이지 갈무리
2. 왜 로잔 한국 대회인가?

이처럼 로잔 운동은 세계 기독교 역사 측면에서나 선교 운동 측면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겨 왔다. 출범 50주년을 맞는 국제 로잔 운동은 이제 2024년 로잔 한국 대회를 개최하려고 한다. 그러면 50주년이라는 뜻깊은 시기에, 누구보다 험난한 현대사의 질곡을 거쳐 지금의 변화와 발전을 이뤄 온 한국에서 로잔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 대회란 그저 장소만 빌린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한국교회가 과연 로잔 50주년 대회를 열 만큼 로잔 운동의 정신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교회와 선교계가 이를 잘 흡수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큰 의문이 든다. 1974년 첫 대회에 조종남·조동진·김옥길 등 몇 명의 한국 대표가 참석했으나, 유신 체제에 절대 순응했던 당시 사회·교계 분위기에서 그들은 참석 자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고, 로잔은 알려지지도 않았다. 로잔 소식은 뜻밖에도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대회 참가자 중 하나인 조종남 박사 및 영국에서 공부하던 이승장 목사 등에 의해 번역·소개됐고, 이는 당시 독재와 민주화 운동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소리 없이 퍼져 나갔다. 이처럼 한국에서 로잔 언약과 그 운동은 대다수 주류 교회보다는 1990년 이후 새로 태어난 복음주의 사회 선교 운동 진영 및 선교한국이나 IVF·ESF·겨자씨모임 등 청년 선교 운동 등을 통해 확산됐다. 21세기 들어 로잔 언약은 한국교회에서 더 널리 언급됐고, 2010년 케이프타운 대회에도 적지 않은 한국 대표들이 참석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로잔 한국 대회를 불과 2년 앞둔 지금 한국교회가 정말 로잔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하고 있는지 몹시 의문이 든다. 흔히 복음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대다수 한국교회에 로잔 운동은 여전히 낯설고, 총체적 복음의 로잔 정신은 외면받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당하다. 왜 그런가?

1)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총체적 복음에서 여전히 멀다.

변함없는 로잔 운동의 핵심 가치·모토는 "온 교회(the whole church)가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전 세계에(the whole world)!"다. 여기서 시선을 끌며 세 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whole(총체적, 온전한)'이다. 이렇게 총체성을 강조하는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그동안 어딘가에 계속 '치우쳤다'는 걸 전제한다.

한국교회도 이제는 보수와 진보, 교단과 교파를 넘어 복음의 목표가 '하나님나라'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기존의 개인 전도와 개별 구원 성격의 복음이 하나님나라 복음으로 더 넓고, 깊어진 '총체적 복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정말 하나님나라 중심의 총체성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같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교회)들이다. 그러나 각자가 강조하는 신학과 신앙의 강조점과 특징에 따라,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정치적 상황에 따라, 맡겨진 우선적 역할과 은사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모습과 배경·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당연하다. 좋다. 문제는 각자 자신들의 우선적인 은사와 역할, 배경을 넘어서면, 다른 영역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같은 믿음의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심하다는 데 있다. 총체적이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한, 치우친 모습을 복음의 전부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분열상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단지 교단이나 교회 숫자가 많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조금만 달라도 서로를 용납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단처럼 여기기도 한다. 각자 한편의 내용만 붙들고 전부인 것처럼 과장하고 강요한다. 무엇보다 전통적 선교 외에 사회 선교는 설 자리도 없고, 교회는 온통 장로교 일색이다. 그러므로 한국 로잔 대회 준비에서 'whole'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과제다.

2) 한국 대회는 21세기 선교와 시대적 변화상을 잘 담아 준비돼야 한다.

20세기 이후 세계 교회와 선교의 지형은 이미 확연히 변했다. 특히 기독교 인구와 선교 동력이 '전통적 기독교 세계'인 서구에서 비서구로 넘어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¾이 비서구권에 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여 로잔 대회도 1회 대회만 서구권인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한 후, 2회 필리핀 마닐라, 3회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이어, 4회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전 세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는 참으로 독특하다. 한국은 식민지·가난·전쟁·분단·독재의 슬픈 역사를 다 겪으면서도, 단기간에 경제성장·민주화 등 사회 발전과 급속한 복음화까지 이뤄 냈다는 점에서 세계와 공유할 특별한 경험이 많다. 그러나 한국은 비서구권에 위치하고, 오랜 약자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구권에 더 동질성을 느끼며, 비서구권 국가와 문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 최근 한국민들은 더 가까운 미얀마·태국에서 발생한 독재·인권침해 상황에 대해서는 훨씬 무심했지만, 먼 우크라이나의 아픔은 잊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상황도 이와 비슷해, 서구 편향적인 신학 풍토와 미국 추종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뛰어넘는 보편적 복음을 말하면서 서구와 비서구의 대립을 부추기자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한국 대회가 장소만 빌릴 뿐 막대한 자본력과 대중문화 영향력을 갖춘 서구·미국의 시선과 의식에 우선한다면, 세계 상황의 변화와 한국 대회로서의 특수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정당한 우려를 말할 뿐이다.

1974년 로잔 첫 대회의 과정을 회고해 보자. 대개 우리나라 기독교계는 '로잔 언약' 하면, 빌리 그래함 중심의 대중적 복음 운동(미국)과 존 스토트 중심의 통합적 지성 운동(영국)의 결합으로만 생각한다. 일단 맞는 말이다. 당시 세계적 대부흥사이던 빌리 그래함과 미국의 대중적 부흥주의 교회들, 그리고 영국 존 스토트가 없었다면 로잔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단순한 선교적 부흥 대회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제1·2차세계대전과 1960년대 인종·민권·해방운동이 제기한 인간화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교회도 선교도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도 느꼈다. 이러한 도전은 특히 남미·아프리카·아시아 등 소위 제3세계 비서구권 복음주의자들로부터 강하게 일어났다. 남미 사회적 제자도 그룹이라 불리는 르네 빠디야, 사무엘 에스코바, 올란도 코스타스 등과 부유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역설한 미국 로날드 사이더 같은 인물이 그 주역이었다. 1990년대 <제자입니까>(두란노)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 역시 당시 로잔 대회에 참여했던 아르헨티나 복음주의자였다.

영국의 존 스토트 등은 자칫 충돌할 수 있었던 이들 사이를 넘나들며 타협·중재하고 창조적으로 결합해 역사에 길이 남을 '총체적 복음', 곧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복음의 양 날개 정신을 빚어낸 것이다. 만약 국제 복음주의가 서로 반대와 배제로만 남을 수 있던 두 관점을 총체적 복음 안에 잘 담아 두지 못했다면, 기독교는 더 극단적 근본주의와 인본적 세속주의로 양극화하는 결과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복음주의라는 말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회 2년을 앞둔 지금 로잔 한국 대회는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가? 국내외에서 바쁘게 설명회를 열어 가고 있지만, 총체적 복음의 로잔 역사와 기본 정신에 대한 착실한 이해와 올바른 설명까지 충실히 진행되고 있는가? 다시 묻는다. 2024년 로잔 한국 대회는 왜 로잔이며, 왜 한국인가? 이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충실하게 준비돼야 한다. 이는 한국과 세계 교회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한국 사회, 무엇보다 우리와 만유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질문이기도 하다.

존 스토트(사진 왼쪽)와 빌리 그래함. 로잔 운동 홈페이지 갈무리
존 스토트(사진 왼쪽)와 빌리 그래함. 로잔 운동 홈페이지 갈무리
3. 로잔 한국 대회 새롭게 준비돼야 한다.

선교가 성립되려면 주역이신 '하나님'과 전달돼야 할 메시지인 '복음', 동시에 그것을 받는 만백성, 곧 '청중'이 있어야 한다.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우리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러나 청중에 대해서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청중은 단지 메시지를 듣는 피동적이고 추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 속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선교에는 반드시 그들과 그들의 시대·삶·상황을 이해하려는 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 복음과 선교의 밭인 세상은 갈수록 교회에게 똑같은 교리만 반복하지 말고, 이 복잡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와 당면한 위기를 돌파할 복음적 대안을 묻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언제까지나 '썩어 없어질 세상에 미련 갖지 마라', '일단 교회에 오면 알려 주겠다'라고만 할 것인가? 

로잔 운동은 1974년 로잔에서 출발해, 1989년 마닐라와 2010년 케이프타운을 거치며 이미 그리스도인만의 언어와 메시지를 넘어 시대적·사회적 의미와 메시지를 담으려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2024년 한국에서도 분명히 세계 선교와 복음화의 큰 방향뿐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묻는 기후 위기, 더욱 심해진 동북아 냉전 속에서 갈수록 커져 가는 빈부 격차와 다음 세대의 열패감, 젠더 이슈의 부상, 한국교회가 보이는 급격한 쇠퇴 등의 의미(대립·갈등·도전·변화)를 잘 성찰해,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로잔 한국 대회는 마땅히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민, 한국 사회의 질문을 의식해야 한다.

지난 5월 인천과 6월 뉴욕 설명회를 통해 국제로잔본부와 한국로잔조직위원회는 2024년 한국 대회를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국제로잔를 대표하는 마이클 오 총재는 구원의 보편성과 유일성, 그리고 세계 선교의 당위성을 언급하며 로잔 운동과 한국 대회를 설명했다. 한국로잔 이사인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는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여 온 사회와 여론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로서의 로잔 대회를 역설했다. 모두 그 자체로 뭐라 할 것은 없다. 다만, 그게 로잔 정신을 제대로 대변하는, 한국 대회의 당위성인지 묻고 싶다. 

이러한 의문은 한국로잔위원회 조직만 살펴봐도 느껴진다. 의장은 이재훈 목사(온누리교회)이고, 이사회는 김정석 목사(감리회·광림교회), 최성은 목사(기침·지구촌교회), 박상은 장로(안양샘병원), 최형근 교수(서울신대), 유기성 목사(감리회·선한목자교회), 한기채 목사(기성·중앙성결교회), 이규현 목사(예장합동·수영로교회), 한철호 목사(미션파트너스), 정대서 장로(온누리교회), 전재중 변호사(법무법인 소명, 감사), 조용중 목사(KWMA), 황성수 목사(감리회·한사랑교회, 감사)로 구성돼 있다.

알려진 교회들과 인물들을 익숙한 교단별 분포에 따라 배분했지만, 존 스토트가 복음 전도의 다른 쪽 날개로 중요시했던 사회 선교도, 이미 세계 선교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오순절 운동도, 교회와 사회의 현재와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여성과 청년들의 자리도 처음부터 잘 보이지 않는다. 준비위원들의 개인적 능력과 신앙을 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그저 전통적·일반적·방어적 입장과 시각을 되풀이할 것이라면 굳이 왜 로잔 대회를, 그것도 한국에서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뿐이다. 이것은 변화된 상황에서 변치 않는 복음의 답변을 추구한다는 로잔 정신에서 비춰 봐도 미흡하다. 이는 총체적 복음을 목표로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주장한 첫 대회는 물론, 가장 최근 2010년 3회 대회 최종 열매인 '케이프타운 서약'의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케이프타운 신앙고백
1.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2.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3.~5. 우리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사랑한다.
6.~10.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세상·복음·백성·선교)을 사랑한다

우리가 섬기는 세상을 위하여: 케이프타운 행동 요청
- 다원주의적이며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하기
- 분열되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기
- 타 종교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기
- 그리스도의 교회가 겸손과 정직과 단순성을 회복하기
- 선교의 하나 됨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동역하기

교회가 종교다원주의·자유주의신학·세속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자주 종교다원주의와 사회의 다원성을 착각한다. 더구나 복음과 선교의 과제는 항상 하나님의 허락 속에 끊임없이 변해 가는 시대 상황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성경에서 출발한 성실한 답변이 아니었나? 이는 단지 로잔 운동만의 독특한 역사가 아니라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보편적 기독교 세계의 선교적 도전(질문)과 응전(답변)의 모습이다.

유대의 배타적 민족 경계를 공식적으로 벗어났던 예루살렘 회의(행 15장),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종교적·신학적 왜곡에 저항해 일어난 종교개혁, 그리고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총체적 복음으로 극복하려 했던 로잔 운동으로 이어진다. 더 넓게 보면, 뾰족 첨탑 위에 앉아 홀로 고고했던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회중과 소통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궈 낸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로잔 운동은 세상과 근본주의·자유주의 양극단에 놓인 신앙 운동 사이에서 길을 잃은 기독교회와 선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탁월한 운동이며, 그런 면에서 균형추 역할을 톡톡히 해 낸 존 스토트의 공로는 말할 수 없이 크다. 

만약 빌리 그래함 등 미국 대중적 부흥 운동의 열정과 비서구권 사회 선교 운동의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소화하고, 조화시키지 못했다면, 로잔 운동은 또 다른 정통주의·근본주의 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잔 한국 대회는 지금부터 로잔의 본래 정신과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총체성을 회복하고 그에 합당한 준비의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계속)

구교형 / 성서한국 이사장.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