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유명희(테레사) 사제(63)는 대한성공회가 여성에게 성직을 주지 않던 1983년 천신신학교(현 성공회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만난 여성들과 함께 '성공회젊은여성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1987년에는 이 모임 회장을 맡기도 했다. 성공회젊은여성모임이 발행했던 소식지 <우물가>는 모임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젊은여성모임이란? 나이에 구속받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찾아 주체적으로 사는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비민주적 사회제도를 변화시키고, 스스로를 구속하는 길들여진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완전한 인간화를 추구하는 모임입니다." [<우리들의 사제>(성공회출판사), 80쪽]

1980년대 불붙었던 여성 인권에 대한 그의 의식은, 성직 후보자 과정이었던 사목신학연구원(현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후 여러 교회를 거치며 현실적인 장벽을 만나면서 한풀 꺾였다. 홀로 외로움을 감당하며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버텼고, 결국 부제 고시 응시 후 15년 만에 사제 서품을 받게 되면서 대한성공회 여성 성직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이야기는 여성 성직이 도입되기 전후로 여성 사목자에 대한 인식이 과연 얼마나 변했는지 돌아보게 해 준다.

유명희 사제.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유명희 사제.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여성은 '청강생' 신분이던 시절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2년 후 체신부(우편·전기통신·전파관리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중앙행정기관 - 편집자 주) 공무원으로 전화국에 다녔어요. 한 4년 일하고 25살 되던 해에 '여기를 계속 다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면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뭘까'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제가 교회에 있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교회에서 하느님 일을 한다면 평생을 해도 싫지 않을 것 같다'고 확신이 강하게 왔어요. 그때는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있다 없다 하는 생각보다는, 일단 신학교를 가면 어떤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꼭 여성 사제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입학한 건 아니었지만, 학부 때부터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수련회 같은 거 하면 우리 팀에서는 '여성 사제'를 주제로 꽁트를 짜고, 대동제 같은 축제에서 성공회 여성사를 주제로 극을 만들어서 공연한 적도 있어요. 학부 졸업할 때도 여성을 주제로 논문을 썼죠. '왜 성공회에는 여성 리더십이 미약할까' 계속 관심 있게 봤어요. 저는 여성 선배가 없으니까 당시 여신학자협의회나, 교회여성연합, 기독교 단체는 아니지만 여성평우회 같은 데도 쫓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배웠어요.

과거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셨던 분들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죠. 1930년대에 성공회 전도부인들 활동이 활발했거든요. 그런데 1940년에 일제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다 추방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신부님들이 다 추방되니까 그 자리를 한국 신부님들이 메웠죠. 그때 전도부인들에 대한 대처가 아무것도 없이 그냥 멈춰 버린 거예요. 당시 활동하셨던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은 아마 그때 선교사들이 추방된 것도 모르시지 않았나 싶어요. 그저 하느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부르셨으니, 교회에서 인정하든 말든 계속 전도 활동을 하신 거예요. 그 모습이 저에게는 굉장히 감동이었고 한편으로는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여성들은 여전히 열망·열정이 있었는데,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까 전도부인의 명맥이 끊겨 버린 거예요. '이분들에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구나', '어떻게 이들을 이렇게 무책임하게 팽개치듯이 대했을까', '이래서 제도가 있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강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대한성공회에 여성 리더가 부재한 것은 그저 그러한 제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유명희 사제는 학부 시절부터 성공회 내 여성 리더십에 대해 고민했다. 사진 제공 유명희
유명희 사제는 학부 시절부터 성공회 내 여성 리더십에 대해 고민했다. 사진 제공 유명희

제가 1986년에 학부를 졸업했는데, 졸업 전 가을에 4학년 여학생 5명이 상당히 난감해했던 기억이 나요. 남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사목신학연구원으로 가는 거니까 별생각이 없었는데, 여학생들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고민이 많았어요. 당시 교수님께서 "너라도 연구원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런데 당시 여자가 연구원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청강생'으로 가는 것뿐이었어요. 원래 들어가려면 시험을 봐야 하고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주교님 추천서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추천서를 받지 못하니까요. 입학금도 내지 않은 상태에서 교수님이 "일단 들어가 봐라" 하셔서 그냥 가게 된 거예요.

1987년 3월 첫 등교 날, 학교를 향해서 가던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늘 가던 길이고 으레 들어가는 교문·강의실인데, 어디에서도 저에게 자격을 주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내가 여기 가도 될까', '도로 집에 갈까' 마음속에 갈등·번민이 계속됐어요. 그런 상황에서 강의실 문을 딱 열었는데, 남학생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보고 침묵했던,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던 그때가 생각나요. 그때 남학생이 23명이었을 거예요. 얼른 앞에 있는 자리 아무 데나 가서 앉았는데, 모두 다 내 뒤통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1년을 청강생으로 다녔죠. 다행히 2학년 때는 추천도 받고 시험도 보게 됐어요.

앞날이 불투명했지만 그 당시 외국 성공회에서는 여성 사제에 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어요. 성공회에는 '램버스회의'라고 전 세계 주교님들이 10년에 한 번씩 하는 회의가 있어요.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가지고 토론하고 결론도 내리는 회의인데요. 1968년 램버스회의에서 여성 부제를, 1978년에 여성 사제를, 1988년에 여성 주교를 인정하는 결정을 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계속 이런 소식을 들었죠. 가끔 해외 여성 성직자들이 오기도 하고요. 그래서 '뭔가 가능성이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됐죠.

첫 여성 부제 고시 응시, 결과는?

입학할 때는 좀 그랬지만, 다닐 때는 사실 뭐 차별이나 이런 걸 경험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성공회가 좀 열려 있는 편이니까 남학생들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죠. 근데 1989년 초 졸업하고 나니까 성직 고시부터 해서 계속 부딪히고 막혀 있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됐어요. 동기들과 함께 부제 고시를 보기는 했는데, 저는 합격인지 불합격인지조차 이야기해 주지 않더라고요. 판정이 보류된 거예요. 동기들은 부제 서품도 받고 이후 사제 서품도 받았죠. 지금 성공회대학교 김기석 총장, 대한성공회 교무원장을 지낸 유시경 신부가 제 동기예요. 하지만 저는 당시 보류 상태로 아무런 조치 없이 그냥 있었어요.

졸업 후 부산교구에서 간사로 몇 달 일하다가, 좀 더 근본적인 무언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다 접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1990년부터는 기도 생활을 좀 했어요. 신학교 들어갈 때도 제 모든 걸 다 드린다는 마음으로 갔으니까, 제 앞날에 대해서도 인도해 주시는 대로 가겠다고 했죠. 기도에 대한 세미나도 가 보고 상담도 받고 하면서 몇 달 지내다가, 다시 교회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응답을 받았어요. 그래서 강원도 태백에 있는, 탄광 선교를 하다가 당시는 활동하지 않던 교회로 가게 됐어요. 거기서 한 2년 지내고, 대전대성당에서도 1년쯤 지내고, 충주교회에서도 2년 정도 있었어요.

그렇게 5년을 사역하면서 돌아다녔는데, 교구에서는 한 번도 정식으로 발령을 내 주지 않았어요. '전도사'라고 불리기는 하고 급여도 조금 받았지만, 공식적으로 교구에서 파송된 성직자는 아니었던 거죠. 사제도 없는 시골 교회에서 사역하는데 제도적으로 뒷받침이 안 돼 있으니… 뭔가 안전한 신분보장이랄까, 사역에 힘을 받쳐 주는 부분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보니 늘 혼자 고립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심리적으로도 굉장히 위축됐고요. 결국 교회 사역을 그만두고 예수원에 들어가서 몇 년 지내게 됐죠.

대한성공회에서는 1990년대에 여성 성직을 위한 움직임이 많이 생겼어요. 실질적·적극적 활동으로 교회 내 의사 결정 구조에 여성이 참여하는 제도를 이뤄 낸 시간이죠. 근데 저는 좀 달랐어요. 1980년대에는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고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오히려 1990년대에는 지방 여러 교회를 돌기도 했고 예수원에 있으면서… 조금 관망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상태였던 것 같아요. 가끔 여성 성직을 위해 같이 활동하자는 연락을 받기는 했는데, 제 신분이 발령도 내 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활동을 하러 좀 나갔다 오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요. 계속 저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많이 위축된 상태였죠.

유명희 사제(가운데)는 부제 고시 8년 만에 합격 통보를, 15년 만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진 제공 유명희
유명희 사제(가운데)는 부제 고시 8년 만에 합격 통보를, 15년 만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진 제공 유명희

그러다 1997년, 교구에서 부제 고시 결과를 합격으로 인정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시험 친 지 8년 만에 합격 통보를 받은 거예요. 마음 한편에 늘 아쉬움이 있었는데 '그래도 인정을 받았구나', '뭔가 마무리가 됐구나' 싶은 마음에 기쁘기도 했죠. 근데 그때는 제가 예수원에 있었던 시절이라 바로 부제 서품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몇 년 후 다시 교회로 돌아가라는 응답을 받고 부제 서품을 받으려 했는데, 그땐 또 '성직 후보자가 아니다'라는 등의 이유로 주지 않더라고요. 2002년 예수원을 나와 부산교구 상주교회로 사역을 가게 되면서 부제 서품을 받을 수 있었어요. 이듬해 서품식을 상주교회에서 했는데 가족과 동기들이 그 먼 곳까지 와 축하해 줘서 참 좋았죠.

그 1년 뒤 사제 서품을 받았어요. 사제로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건 참 기쁜 일이었죠. 부제였을 때는 사제에게 성체를 가져가서 축성을 받아 와야 해요. 보혈은 없이 면병만 나눌 수 있죠. 미사도 집전할 수 있기는 한데 몇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는 매일 아침마다 혼자 미사를 드렸어요. 원래 성공회는 회중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 미사를 드릴 수 없는데, 그때 교회 상황이 워낙 어려웠거든요. 그래도 아침마다 혼자 기도하고 미사 드리는 그 시간이 참 행복했어요.

사제직만 탁 던져 주고

기본적으로 교회에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많아요. 특히 남성 사제들은 여성 사제를 동료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항상 남자들끼리 얘기하고 결정하고, 의사 결정 구조 안에 여성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여성 사역자가 뭔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그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인격적인 교류가 있는 환경이 돼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냥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고 단정하는 느낌을 받게 되니 힘들었죠.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남성 사제들에게 제 얘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은퇴하신 한 여성 사제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요. 자기는 사역하면서 뭘 해 볼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비전이나 계획대로 사역해 볼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고 해요. 전도사였을 때는 위에서 시키는 것만 해야 했고, 사제가 되어서도 계속 개척교회나 규모가 작은 교회만 가셨으니까요. 그분이 늘 "나는 '문열이'였다"고 말씀하세요. 자기 역할은 '문을 여는' 거였다고.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여성들이 안정적으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는 비단 성공회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단도 마찬가지죠. 여성 성직, 여성 안수가 도입됐다고 해서 끝이 아니에요. 그다음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까 문제인 거죠. 이제까지 교회 제도·구조가 남성 중심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사제가 된다고 하면 거기에 대한 별도의 지원이 있어야 해요. 남성들은 '역차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건 역차별이 아니라 공동체의 '성숙'이라고 봐요.

지금은 어찌 보면 그냥 사제직만 탁 던져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 하는 형편인 거죠. 남성 사제들뿐 아니라 신자들도 여성 사제에 대한 의식이 생소한 상황에서, 여성 사제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 사람 개인 문제라기보다 제도 문제인 경우가 많아요. 그걸 여성 사제 혼자서 해결하라고 하는 건 잘못됐다고 봐요. 우리가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함께 논의해야죠. 근데 그런 게 전혀 없이 개인이 다 떠맡으라고 하니까 힘에 부치는 것 같아요.

제도권 안에 기관을 만들어서 전문가들이 여성 사제들을 개인별로 상담하고 필요를 파악하면 좋겠어요. 거기서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제도를 정비해야죠. 대천덕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그런 것들이 '자비'예요. 그냥 간과할 수 있는 것도 지나치지 않고, 그 사람 입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찾아보고 계속 서포트해 주는 거죠. 여성 사제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해요. 지금은 그런 시스템이 없어요.

지난해 9월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에 참석한 유명희 사제. 뉴스앤조이 구권효
지난해 9월 대한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에 참석한 유명희 사제. 뉴스앤조이 구권효
여성도 '주교'가 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지난 4월 23일 처음으로 여성 주교가 나왔어요. 동아시아 최초예요. 물론 그분이 동경주교좌대성당 주임사제도 했고, 역량이 정말 뛰어난 분인 건 사실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여성이 주교가 되고, 남자 성직자들이 동료로 인정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아요. 제가 1993년 민병옥 사제님과 함께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났던 일본성공회 첫 여성 사제 사사모리 다츠가 이번에 홋카이도교구 주교가 된 거예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더 가부장제가 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성 주교를 허용한다는 건 남성들이 기득권을 내놓는 걸로 볼 수 있죠.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남성들이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근데 요엘서에 나오는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말씀처럼, 남성과 여성이 같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협력하고 조화·균형을 이루면서 가는 것이 하느님나라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아직 멀었죠. 여성이 주교좌성당 주임사제라도 한다 치면, 교인들은 '어디 여자를 주임사제로 서게 하느냐'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겠나 싶어요. 이제 사제까지는 허용되지만, 주교는 아니라는 거죠. 대한성공회는 전도부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을 때 제일 전도도 많이 됐고 활기 찼어요. 그 시절부터 여성들이 교회 리더로 자리 잡아 갈 수 있었다면, 여성들의 성직이 제도적으로 보장됐다면, 지금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인식부터 많이 변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 우리 여성 사제들도, 남성 사제들도 함께 많이 노력해야죠.(계속)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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