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중제 2번 이하에는 영화 '미스트'(2007)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엄청 놀라운 영화이니, 이 글을 읽는 모두와 그 놀라움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꼭 영화를 먼저 보시고 글을 읽으시길 권해 드립니다. - 필자 주
1. 희망이 주는 공포

성서 열왕기하 6~7장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도성 사마리아가 적국 아람 군대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입니다. 적군에 포위된 성안에는 먹을 것이 점점 떨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비둘기 똥 한 덩이가 수십만 원에 거래될 정도의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성 안에서의 배고픔과 성 밖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전쟁의 위험 상황이 언제 끝날지, 끝나기는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서로의 아이를 번갈아 가며 잡아먹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남의 아이는 같이 잡아먹고, 자기 아이는 숨기는 사람이 생겨서 심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성문 어귀의 나병 환자들은 생각했습니다. 나가서 적군의 칼에 맞아 죽으나 여기 앉아서 이렇게 굶어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으니 항복이라도 해 보자고. 그래서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아람 군대 진영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적 진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군들은 진작 무언가에 놀라 겁에 질려 도망치고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성서의 본문을 기적을 일으켰던 엘리사의 시점으로 살펴보면, 약속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전쟁의 위험과 기근을 해결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다시 배불리 먹게 되는 해피엔딩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미래를 전망할 수 없어 불안감 속에 있던 사마리아 성 안의 평범한 백성의 시점으로 살펴보면 해피엔딩이 아니라 기괴한 공포 일담이 돼 버리고 맙니다. 미래를 비관했기에 가담했던 도살과 식인 같은 선택들은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희망과 맞닥뜨렸을 때 앞으로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흔히 미래에 대한 공포감은 미래에 두렵고 불안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에 있는 것이 너무나 찬란한 희망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잔인하리만큼 무서울 수 있습니다.

2. 안개라는 소재

희망이 주는 공포를 꽤나 잘 묘사한 영화가 있습니다. '미스트'(2007)입니다. '미스트'는 '쇼생크 탈출'(1994)을 연출했던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작품입니다. 이 두 영화는 모두 희망에 대한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영화를 맺는 방식에 익스트림 롱숏을 사용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두 영화에서 마지막에 사용되는 공통된 숏, 인물에서 주변의 넓은 배경으로 관객의 지각을 넓히는 숏은 영화가 표현하는 희망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장면입니다.

앤디와 레드의 재회를 비추며 아름답고 드넓은 태평양 바다로 시선을 넓히는 '쇼생크 탈출'의 마지막 숏은 좁은 공간이었던 감옥과 대비되는 태평양을 비추며 자유의 이미지를 담아냅니다. 그리고 '미스트'의 엔딩 숏은 주인공의 얼굴에서 서서히 멀어지며, 안개 너머 괴수들과의 전투에서 어렵지 않게 승리하고 있던 군인들을 비춥니다. 감옥 너머에 주인공이 꿈꾸던 꿈과 자유가 있었다면, 안개 너머에는 주인공이 그토록 원했던 아들을 지킬 기회와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스트'에서 안개는 영화 종반부까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게 만드는 표현의 소재로 자리합니다. 안개 속에서 많은 인물은 죽임을 당했고, 주인공 일행은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군용 탱크 소리를 괴수의 소리로 여기고 생사를 포기할 정도로 비관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의 마지막 씬. '쇼생크 탈출' 스틸컷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의 마지막 씬. '쇼생크 탈출' 스틸컷
영화 '미스트'(2007)의 마지막 씬. '미스트' 스틸컷
영화 '미스트'(2007)의 마지막 씬. '미스트' 스틸컷

안개는 이전 상태의 중단을 선언함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진단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소재입니다. 모든 것이 안개와 기이한 괴수의 출현으로 뒤덮여 버린 상태에서, 현재 상황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일은 양쪽 모두 어렵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광신자 카모디 부인에게 사람들이 점점 동조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현재에 비추어 미래를 판단하기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미래에 대한 뚜렷하고 선명한 메시지는 비관적일지라도 힘을 갖습니다. 그것이 비록 분노한 하나님께 한 명씩 인신 제물을 바쳐야한다는 몰상식하고 비합리적인 비관일지라도 말입니다.

3. 종말론적 믿음에 대한 요청

영화의 결말은 희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주인공은 카모디 부인의 비관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함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극악의 상황에 처하자 마침내 주인공은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만드는 안개는, 주인공 일행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는 탱크를 지척에 두고도 그 소리를 괴수의 소리로 오인하도록 만듭니다. 현재 상태에 비추어 안개 밖을 상상한다면 당연한 결론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안개 속에서 죽임을 당했고, 자신의 아내마저 죽었고, 한길로 안개 밖으로만 달려 보려 탔던 자동차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서 연료가 다 떨어진 채 기동을 멈춰 버렸으니 말입니다.

주인공은 현재 상태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려 도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 상태가 부정적이라면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안개는 현재 상태가 극히 부정적이라는 정보를 계속 줬지만, 그 뒤에 있던 희망은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안개가 걷히는 마지막 씬은 더없이 비극적입니다. 믿음을 포기했을 때 맞이할 수 있는 파국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안개는 현재 상태가 극히 부정적이라는 정보를 계속 줬지만, 그 뒤에 있던 희망은 가리고 있었습니다. 영화 미스트 스틸컷
안개는 현재 상태가 극히 부정적이라는 정보를 계속 줬지만, 그 뒤에 있던 희망은 가리고 있었습니다. '미스트' 스틸컷

따라서 한편으로 우리는 이 영화에서 종말론적 믿음에 대한 강한 요청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 믿음이란 카모디 부인의 설교와 같은 비관적인 시한부 종말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질서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세계에 임하는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안개 밖에 있던 구원의 상태를 보여 주는, 감독의 전작 '쇼생크 탈출'과 동일하게 사용된 '미스트' 마지막 씬의 익스트림 롱숏은, 마침내 외부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바람직한 상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믿음에 대한 지각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은 희망과 낙관주의를 구분합니다. 이 둘은 모두 긍정적인 기대를 의미하지만, 낙관주의가 현재에 비추어 미래를 얼마간 바람직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반면, 희망은 과거나 현재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새로운 외부에서 주어지는 바람직한 상태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앞선 인터뷰에서 저는 교회가 코로나19와 기후 위기, 시장 자본주의의 횡행 속에서 '신앙 공동체가 이전처럼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한가', '공동체적인 신앙과 사랑이 아직 유효한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옛 방식은 낡아서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지만, 새로운 질서가 아직 오지 않은 '궐위의 시간'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흐릿한 안개 속에 있는 '미스트'의 주인공처럼 미래에 대한 진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재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기존 질서가 중단된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와 상관없이 미래에서 다가오는 희망, '종말론적인 믿음'을 갖는 일일 것입니다.

종말론적 믿음을 갖는 것은 현재에 비추어 미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관주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바람직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안고 전적으로 불안정한 현재의 문제를 응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은, 현재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궐위의 시간에 전망의 기준이 내부가 아닌 외부,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주어지는 믿음에 있어야 함을 잘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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