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는 20세기 교회와 신학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20세기 유럽의 처음이자 마지막 '슈퍼스타 설교자'였다. 1960년대 틸리케가 독일 함부르크 미카엘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면, 교회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경찰이 교통 통제를 해야 할 정도였다. 이를 보고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 Der Spiegel>은 경악하며 이렇게 썼다.

"설교의 시대가 지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다!"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등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형용사가 붙는 신학의 거장들이 여럿 있지만, 일반 대중을 교회로 '전도한' 신학자는 틸리케가 유일했다.

틸리케는 가장 치열하게 '악마와도 같은' 세상의 현실과 대결한 신학자였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화약 냄새가 나는 듯하다. 폭격, 방공호, 파시즘, 핵전쟁 등 그가 직면했던 악마적 현실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신학자들의 글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면이다.

<신과 악마 사이> / 헬무트 틸리케 지음 / 손성현 옮김 / 160쪽 /  1만 원
<신과 악마 사이> / 헬무트 틸리케 지음 / 손성현 옮김 / 160쪽 / 1만 원

<신과 악마 사이>(복있는사람)는 이처럼 악마적인 현실과 치열하고 진지하게 대결하지만, 끝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전하는 틸리케의 입장을 잘 대변해 주는 작품이다. 수천 쪽에 달하는 그의 조직신학·윤리학 및 철학 저서를 탐독하는 것은 전공자에게도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책만으로도 틸리케의 사상이 얼마나 깊고 방대한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마태복음서 4장 1~11절이 보도하는 '예수의 광야 시험'에 대한 신학적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에서 틸리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과 민감한 문제들을 너무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데올로기적 폭정으로 인해 극심한 시험에 빠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건하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중략) 예수께서 당하신 시험을 철저하게 연구하려는 사람은 이렇듯 다양한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동일한 존재의 정체를 꿰뚫어 보게 된다." (19쪽)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폭정"은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출간된 해인 1938년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를 가리킨다. 당시 다수의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총통(Führer)'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메시아였다. 그럼에도 틸리케의 예리한 지성은 히틀러와 나치의 실체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다양한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동일한 존재의 정체"다.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

왜 하필 예수의 시험인가? 성서의 그 많은 장면 가운데 왜 틸리케는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당한 예수에게 주목했을까? 틸리케는 독일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는 히틀러에게서 2000년 전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악마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는 당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험하며 다시 뒤흔들고 있었다.

이 책의 서곡 '빵, 성전 꼭대기, 광야의 모래 속에서 반짝이는 나라들'은 나치라는 악마가 곧 초래할 엄청난 재앙을 미리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먼저 황량한 땅이 보인다. 사람도 사물도 찾아볼 수 없는 곳, 그저 끝없이 펼쳐진 너른 땅 위로 기이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25쪽)

이 글은 어떤 예언처럼 들린다. 우리는 여기서 "황량한 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8년에 나온 이러한 묘사가 예언처럼 들리는 이유는,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1945년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당시 틸리케가 머무르던 슈투트가르트는 폐허 더미로 변했다. "사람도 사물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때 목사로서 틸리케가 할 수 있는 일은 폐허 속에서 죽어 간 사람들을 위해 장례를 치러 주는 것뿐이었다.

사상적인 면에서 보자면, 틸리케는 20세기 독일 신학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틸리케는 이러한 세간의 평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조직신학 저서에서 '보수적'이라는 말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기까지 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틸리케가 말하는 보수적 신학이란 무엇인지 깨닫고 그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 손성현 목사의 번역은 실로 뛰어나다. 독일어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오늘날 한국 독자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작업했다.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을 훌륭하게 증명해 냈다. 헬무트 틸리케라는 독보적 신학자이자 설교가의 진면목을 맛보기 원한다면 이 책 <신과 악마 사이>를 꼭 읽어 보길 권한다. 

안계정 / 독일 보훔대학교 D. theol., <기독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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