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독교>(컨콜디아사)는 두 공저자의 조합이 신박한 책이다. 진 에드워드 비스 주니어(Gene Edward Veith, Jr.)는 패트릭헨리대학(Patrick Henry College)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젊은 시절 이곳저곳에서 영적 방황을 하다가 나중에 루터교에 안착했다. 국내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아가페문화사), <현대 사상과 문화의 이해>(예영커뮤니케이션), <지성으로의 초대>(생명의말씀사), <그리스도인에게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나침반), <십자가의 영성>(컨콜디아사) 등 여러 책이 번역됐고,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중적 해설가로 유명하다. 반면, 트레버 서턴(A. Trebvor Sutton)은 모태 루터란으로 현재 누가루터교회(St. Luke Lutheran Church)의 주임목사이자, 루터교 신학교인 콘콜디아신학교(Concordia Seminary)에서 테크놀로지와 신학·미디어를 공부하는 학생이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거쳐 마지막으로 루터교를 선택한 노학자와 미디어·테크놀로지에 대한 최신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목회자의 조화만으로도 기대감이 올라가는 책이다.

이 책의 저술 동기 또한 신박하다. 저자들은 이머징 교회 운동의 중심 인물인 브라이언 맥클라렌(Brian McLaren)의 <기독교를 생각한다 A Generous Orthodox>(청림출판)를 읽고 한마디로 '열 받아서' 이 책을 기획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부제에 있다. 충격적일만큼 긴 이 책의 부제는 "나는 왜 선교적, 복음주의적, 후기/프로테스탄트적,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신비적/시인적, 성경적, 은사주의적/관상적, 근본주의적/칼뱅주의적, 아나뱁티스트적/성공회적, 감리교적, 가톨릭적, 생태적, 성육신적, 낙심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머젠트적, 끝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인가(WHY I AM a missional, evangelical, post/protestant, liberal/conservative, mystical/poetic, biblical, charismatic/contemplative, fundamentalist/calvinist, anabaptist/anglican, methodist, catholic, green, incarnational, depressed-yet-hopeful, emergent, unfinished CHRISTIAN)"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루터교적'은 빠졌을까? 루터교는 다가오는 시대에 적합하지 않는 구시대적 유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교회 전통은 뭔가 특징적인 내용이 있지만, 루터교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저자들은 맥클라렌이 이 시대에 적합한 기독교의 형태를 모색하는 가운데 루터교를 뺀 것은 큰 착오이고, 역으로 루터교야말로 이 시대에 적합한 기독교의 한 유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루터교가 단순히 포스트모던 시대에 얼마나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좀 더 근원적인 대안과 치유를 제시한다. 이 대담한 주장을 간단히 소개해 보려 한다.

<진정한 기독교 - 루터교가 현대사회에 던지는 제안> / 진 에드워드 비스 주니어·트레버 서턴 지음 / 엄진섭 옮김 / 컨콜디아사 펴냄 / 236쪽 / 1만 5000원
<진정한 기독교 - 루터교가 현대사회에 던지는 제안> / 진 에드워드 비스 주니어·트레버 서턴 지음 / 엄진섭 옮김 / 컨콜디아사 펴냄 / 236쪽 / 1만 5000원
'번아웃' 된 신자들과 영적 세속주의자들

종교 인구의 변동은 그동안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오래전부터 미국에서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Spiritual but not religious)'고 생각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교회 생활에 지쳐 '번아웃' 된 신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여기에 해당하는 인구는 통계에 잡히지 않지만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는 신자들에게 왜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 묻기보다는 왜 아직까지 교회에 나가냐고 묻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돼 버렸다. 교회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과 대책을 간구하고 있지만 뾰족한 방안은 없어 보인다. 그동안 여러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기독교 잡지 한 편을 차지하고 있고, 구도자에게 민감한 세련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와 음향 장비에 집착하는 교회도 있다. 선교적 교회 운동을 커피숍 목회나 도서관 목회에 접목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이런 움직임들은 대부분 어떻게 하면 현대인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고심하고, 교회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도됐다. 생소한 예전이나 전통을 제거하고, 좀 더 매력적인 교회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었다. 세련된 건물, 약한 신학, 향기로운 커피, 거대한 스피커, '세바시'를 닮은 설교, 배경 음악이 깔린 기도, 대형 스크린을 통한 감동적인 영상 등. 대형 교회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런 노력과 시도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 주의를 끌 수는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교회는 어디까지 최신 기술과 트렌드를 따라가야 교회로부터 등 돌린 이들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 교회는 문화센터보다 더 탁월한 영어 학교를 제공할 수 있을까? 교회는 동네 드립 커피 전문점보다 더 향기로운 커피를 제공할 수 있을까? 교회는 영화관보다 더 큰 스크린을 설치할 수 있을까? 혹 이렇게 세속 문화와의 점유율 대결에서 승리하면, 문화 전반에 걸쳐 기독교의 영향력을 전파할 수 있을까?

이 책 저자들은 이제 우리에게 다른 틀, 더 나은 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나안 교인에 대한 정교한 사회학적 분석이나 미디어를 활용한 신박한 예배 디자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갈구하고 있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종교개혁 당시 중세 교회의 폐해를 무너뜨리고, 혼돈 속에 있는 개혁 세력을 통합한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 루터는 전환기의 신학을 고민했고, 이전 시대와 다음 시대를 연결하는 교회를 꿈꿨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학은 역설(paradox)로 가득한데, 이런 점이 오늘날 시대 상황과 유사하다는 진단이다.

"루터교는 기독교의 지적 전통을 긍정하여 교육 사업에, 또한 예술과 문화에 역사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둔다. 그럼에도 루터교는 이성주의를 거부하고 개인 경건을 장려한다. (중략) 루터교인들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재세례파에 동의하는 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운동가들에 동의한다. 루터교는 발생 초기부터 혁명적인 동시에 보수적이었으며,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었다." (47~48쪽)

저자는 루터교회의 이런 메타적 성격이 오늘날 에큐메니컬 운동에 큰 역할을 할뿐 아니라 다양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루터교 교리의 현대적 적용 가운데 몇 가지를 골라서 소개해 보겠다.

정당화에 대한 인간의 집착

루터교신학의 핵심 교리를 하나 꼽으라면, '칭의론(theory of justification)'을 들 수 있다. 칭의론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어떤 행위와도 무관하게 의롭게 된다"(79쪽)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의롭다'는 용어를 일반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정당하다'는 말이 된다. '정당화', '바름', '옮음', '이유' 등은 모두 같은 의미군이다. 현대사회는 '인정 투쟁'의 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정당화에 혈안이 돼 있다. 모든 갈등은 내 말이 맞고, 내 주장이 정당하다는 자기 확신과 상대방은 틀렸다는 정죄에서 비롯한다. 부부 싸움의 주 원인도 여기에 있다. 합리화와 변명 모두 자기 정당화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죄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하고, 죄를 끄집어내는 것, 그리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철저한 자기방어, 이것이 죽음의 소용돌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자신의 논리와 주장이 정당하다는 입증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자기 비난이 죄책감, 실패감, 절망"(85쪽)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자기최면을 걸더라도, 여전히 인정과 지지를 받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증명하고, 얼마나 선한지 주장하고, 방어하고, 비판자들을 비난과 정죄로 보복한다.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한다. 용납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선과 거리가 멀더라도 남들이 우리를 선하다고 봐 주기를 바란다. 우리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우리가 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85쪽)

루터교신학에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를 의롭다 할 수 없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아무리 칭찬하고 위로해도 채울 수 없는 근원적인 인정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의 부족함과 이기적인 마음을 하나님이 선하다고 인정해 주신다면, 나의 삶은 가치가 있다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면, 그리고 그 인정이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객관적인 사실이라면 어떨까? 소셜미디어의 '좋아요' 숫자로 자존감을 확인받고, 어떻게 해서든 경쟁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불안한 마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될 때 가라앉는다(86쪽)." 스스로 의롭다고 증명하고 입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고, 세상과 화해했기 때문이다.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한 마음은 칭의에서 평안을 발견한다. 자기 의의 부산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쉼을 얻는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끊임없는 욕구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실패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묻히고 영원히 죽임당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자기 의의 끝없는 러닝 머신에서 끌어내셨으며 그분 안에서 끝없는 평화를 주셨다." (97쪽)

힐링과 현실 직면 사이에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자존감이 떨어지는 이 시대에는 잔소리나 훈계보다는 격려와 용기가 필요하다.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에는 신선한 영감이 필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내 인생을 이끌어 줄 어른이 필요하며,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일 때 결정을 도와줄 멘토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번영과 부를 약속하는 '축복의 신학'이 대중 신학이었다면, 이제는 위로와 '힐링의 신학'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 같다. 물론 축복의 신학이나 힐링의 신학, 그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대중의 필요를 채워 주고 대중의 욕구에 반응하지 못하는 신학은 고상한 채 자기만의 논리에 갇힌 추상적인 종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예수는 철저하게 대중의 필요를 채워 줬다. 그래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삶이 고되고 힘든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현실을 잊게 해 줄 달콤한 위로와 용기, 현실을 이겨 낼 수 있게 하는 격려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위로와 격려가 그들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영혼의 각성제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영혼의 각성제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달픈 현실을 직면해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리느니, 차라리 잠시라도 고통의 시간을 잊을 수 있는 위로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기독교는 내용이 없는 형식도 아니고, 값싼 위로로 현실을 도피하게 만드는 마약도 아니다. 누군가는 현실을 직면하고 고통의 사건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야 한다.

루터교신학의 또 다른 특징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신학'으로 대변되는 현실 인식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드러내신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계시하신다."(106쪽) 루터는 영적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고, 신앙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진정한 세상의 현실로 인도한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싶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루터는 인간의 현실을 에둘러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고통과 십자가에서만 발견"(111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십자가신학은 우리의 삶이 비록 고난으로 가득하더라도 그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삶의 소망을 찾으며, 타인에 대한 긍휼을 회복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타인의 고통은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 자신의 고통은 우리를 더 큰 하나님 믿음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고통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은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 (112쪽)

현대 신학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대속 교리는 루터에게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과 위로, 타인에 대한 연민과 긍휼은 사실 누군가가 대신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위로다. 하나님은 고난을 허용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방관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악을 자기 안으로 가져가신다(118쪽)." 본회퍼는 그래서 오늘날 대속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라고 말할 수 있었다.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역사의 죄책을 교회가 떠안으라고 말한다. 우리의 위로와 격려가 그저 싸구려 각성제가 되지 않으려면 실제로 타인의 고통을 감당하고 떠안으려는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십자가의 능력이 현실을 바꾸는 능력이다.

무엇이 '힙한' 예배인가?

어쩌면 지금까지 설명한 루터교신학이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예배만 보더라도 기성 교회와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한마디로 그리 다이내믹하지는 않다. 루터교회에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생각보다 많고, 예배 도중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시끄러울 수도 있다(루터교회는 세례받은 아기들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기에 전 세대가 함께 공동 예배를 드린다). 루터교의 예배 의식은 제각각 다를 수 있으나 그 속에서도 기본적인 예전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이런 올드함이 어떻게 현대인의 입맛에 맞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취향 차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최신 트랜드를 쫓아가기 위해 대중적인 음악 스타일을 도입하고, 목사의 옷차림을 대중적으로 바꾸고, 예배당을 콘서트장처럼 바꾼 것에 질려 버렸다. 낡은 벽돌로 쌓아 올린 예배당과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손때 묻은 교회의 성경책, 그리고 금이 가고 깨진 나무 설교단을 보며 묘한 거룩함을 느낀다. 2세기 교회에서부터 예배 시간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사제와 성도의 '삼중 대화'라든가, 고대의 찬송들(찬트 형식의 찬양)은 직장 생활을 하며 속물처럼 변해 버린 내가 신비와 거룩을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글쎄, 무엇이 멋이고 무엇이 시대에 발맞추는 예배인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루터교회의 예배가 '힙'하다.

마지막으로 루터교 예배 의식의 핵심은 매 주일 시행하는 성찬에서 찾을 수 있다. 보통 한국교회에서는 특별한 절기 때만 성찬을 시행하는데, 루터교회에서는 매주 성찬 의식을 한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숨어서 일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있고, 직접 만질 수 있는 성찬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숨어 계신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직접 드러내셨으며, 지금은 성령을 통해 성찬에서 현존하신다.

이 현존에 대한 감각은 미디어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해독제가 된다.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기 보다는 핸드폰과 컴퓨터 스크린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성찬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24시간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기는 버겁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성찬을 통해 온전히 예수님에게 집중할 수는 있다. 이 시간은 관념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과 손과 입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우리에겐 잠시라도 하나의 사물과 하나의 사건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다. 성찬의 시간이 나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다.

최경환 /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출판사와 아카데미에서 일하면서 강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세미나를 진행해 왔다. 현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공신학과 정치철학을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공저),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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