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특정 이슈에 대한 합의는 고사하고 그 이슈와 관련된 '현실 인식'조차 학생들마다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페미니즘처럼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이슈일수록,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 부재하다. 그래서 나는 여성학 수업을 진행할 때면, 건설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 각종 '통계자료'로 첫 시작을 연다.

국내 연도별·연령별 남녀 임금격차부터 시작해, 이와 같은 격차가 OECD 가입국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수준인지 다양한 그래프와 논문을 통해 설명한다. 심지어 앞서 제시한 통계자료에 따라붙는 각종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팩트 체크' 영상도 함께 보여 준다. 단순히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현실에 대해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그 다음 단계로 논의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 학기에 꼭 한 명씩은 수업에서 제시된 자료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한 명백한 근거는 없다. 다만 해당 매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됐으니, 그를 통해 생산된 담론 또한 진실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매체에서도 똑같은 통계적 사실을 다루고 있는데도 말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편견'에 사로잡혀 사실을 왜곡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되묻고 싶어진다. 성별 임금격차라는 엄연한 현실도 이렇듯 쉽게 부인되는데, 우주 저 멀리에서 지구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혜성의 존재가 부정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는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갈무리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는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갈무리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 2021)'은 과학적 진실조차 정치적 입장에 종속돼 버린 '탈진실(Post Truth)' 현상을 매우 유쾌하면서도 통렬하게 꼬집는다. 영화 초반, 6개월 후 혜성 충돌로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케이트(제니퍼 로렌스)와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과학적·전문적 견해는 중간선거에 혈안이 된 대통령에 의해 가볍게 묵살된다. 그러나 선거판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혜성의 '경제적' 가치를 알아본 기업가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반전된다. 이번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뭇 비장한 어조로 혜성의 존재를 알린다. 단, 이번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투표하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흘리면서.

이렇듯 탈진실 현상은 진실 자체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무언가를 지키고자 할 때 일어난다. 그러니 처음부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신념이나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부합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진실'이 되기에 충분하다. 혜성에 포함된 광물이 나에게 경제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특히나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무엇보다 지구 종말이라는 뜻밖의 진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면, 전문가들이 말하는 과학적 사실이라도 기각돼야 마땅하다. 그렇게 영화 속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혜성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돈 룩 업"을 외쳤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념과 권력을 굳건히 지키고, 미지의 것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고 만 것이다.

'탈진실'이라는 용어는 가짜 뉴스가 범람하게 된 현대에 들어와 통용되었지만, 사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간의 인지 편향성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탈진실은 앞서 살펴봤듯 '자신의 신념을 보호하기 위한 어리석음'으로 추동되기 때문에,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종교 집단과 항상 그 궤를 같이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 내가 믿는 신이라면, 그 행위에 정당성과 거룩함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짜 뉴스의 주요 생산지로 '보수 개신교'가 지목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신학적 논쟁과 현대적 담론을 모두 적대시하는 근본주의적 신앙관은 신자들을 '진리의 수호자'로 자처하게 만든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외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는커녕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적 합의마저 깨뜨리며,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를 분열로 이끌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 집회에 몰려나와'혜성 충돌로 인한 지구 멸망'이라는 과학적 진실을 부정했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갈무리
정치 집회에 몰려나와 '혜성 충돌로 인한 지구 멸망'이라는 과학적 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갈무리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 <의심에 대한 옹호>(산책자)라는 책을 통해 근대성의 다원화 과정이 초래한 실존적 불안과 그로 인해 발현된 성속聖俗에서의 근본주의를 깊이 있게 고찰한다. 사회적 합의가 깨지고 정치적·종교적 신념이 진실을 가리는 탈진실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근본주의 혹은 상대주의'라는 양극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두 저자는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심의 기술'을 제안한다. 불신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믿기 위한 의심', 배제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수용하기 위한 질문'을. 그러한 의심과 불확실성을 담은 질문이야말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도구가 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확실성으로 한 걸음 내딛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안과 불편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의 신념을 위협하는 새로운 진실과 만났을 때 즉각적으로 생각을 멈추거나, 감정적으로 공격하거나, 일말의 여지도 없이 그 진실을 기각하려는 움직임은, 뇌과학자들이 말하듯 어쩌면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존경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아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즉 '새로운 진실에 기꺼이 상처받겠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영화 '돈 룩 업'은 블랙 코미디 장르답게 실소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헛소리로 가득하지만, 종말을 앞두고 다 같이 모여 앉은 식탁에서 율(티모시 샬라메)이 드리는 기도는 참으로 진솔하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어 온 가나안 청년 율의 기도는 다음과 같다.

"주여,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닥쳐오든 당신의 용기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유지윤 / 콜로라도대학교에서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원이자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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