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3회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영화 평론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이동기 님이 쓴 글입니다. 평론 대상 영화는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의 '어 퍼펙트 데이(A Perfect Day, 2016)'입니다. - 편집자 주

고요한 수면 위에 돌멩이 하나를 던지면 작은 파동이 일어난다. 이는 흡사 사각형 화면 속에 만들어진 모호한 형상과 유사하게 보인다. 하나의 지점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이 또 다른 사건과 만나 서로 중첩·상쇄되는 서사의 파급력은 마치 수면 위 파동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각각의 사연처럼 그 순간 강한 작용을 일으킨다. 우리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쉽게 내뱉곤 하는 '머피의 법칙'은 1949년 미 공군 대위였던 에드워드 머피가 진행한 인체 대상의 중력 한계 실험 실수에서 처음 등장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어떤 사건의 실수·사고가 반복될 때 사용하는 관용어로 받아들여진다. 흔히 징크스로 정의되는 이와 같은 개념은 우리가 사회를 바라볼 때 비관적인 시선을 취하는 부분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서 특정 사건에서 파생되는 개인의 '사연'이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 경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부딪혀 묘한 기제를 형성하는 반복된 행위로 이어져,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의 영화 '어 퍼펙트 데이'(2016)가 이야기하는 독특한 형상을 살펴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우연적 사건의 연속에도 각각의 사연에 함의돼 있는 필연적 형상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스위스의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가 주장한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맞닿는 부분이다. 그는 우리가 소통하는 과정에서 의미 전달을 위해 사용하는 표식인 '기호'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로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아서, 하나의 기표가 제각기 다른 기의를 표현할 수 있고, 반대로 제각기 다른 기표가 동일한 기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가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에 기표와 기의가 지닌 함의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영화 속에서도 우연적·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이 이러한 함의를 통해 하나의 형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 흔히 영화가 말하는 배경과 사연은 바로 이러한 서사적 예술로서의 정형화된 패턴을 가장 경계하는데, 영화 '어 퍼펙트 데이'는 그 패턴을 애써 숨기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형상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어, 그 메시지를 수월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 '어 퍼펙트 데이' 포스터.
영화 '어 퍼펙트 데이' 포스터.

영화에서 맘브루(베니시오 델 토로)와 B(팀 로빈) 일행이 마주하는 연속된 '우연적' 사건 또한 기호의 형태를 드러낸 '필연적' 형상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반복해서 보이는 도로 위 '소의 시체'가 그렇다. 주변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지뢰의 위치와, 이를 피하고자 하는 그들의 시선과 노력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보스니아 내전은 유고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보스니아계(이슬람교),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계(가톨릭) 사이의 오랜 민족적·종교적 반목이 불러온 참사다. 1995년 미국 데이튼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약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와 230만 명 이상의 난민을 초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는 전쟁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느 마을의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 속에 시체 한 구가 빠지게 되면서, 한시라도 빨리 물의 오염을 막고자 투입된 NGO 구호단체 요원들의 좌충우돌 하루 일과를 다룬다. 이처럼 아픈 배경, 누군가의 눈물과 사연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하나의 형상에는, 우리 삶에 녹아 있는 또 다른 묘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여러 사건이 뒤죽박죽 얽혀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어느새 자연스레 해소되고 마는 정형화된 틀을 갖추고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맘브루 일행이 우물 속 시체를 끌어올리기 위해 찾던 '밧줄'은 사건 해결의 직접적인 도구였다. 마을 구호를 위해 한시가 급했던 그들의 초조함은 처음부터 그들의 행위를 직선적인 방향으로 빠르게 앞당긴다. 이에 비해 그들 일행에 뒤늦게 합류한 꼬마 니콜라(엘다 로지도빅)가 들고 다닌 '공'은 어디로 튈지 모르므로 방향도 쉽게 제시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방향을 정하지 않은 공은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또 다른 부분을 얘기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밧줄'과 '공'이라는 서로 다른 매개체는 '정해진 방향'과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구분된 그들의 하루를 나눠 표현함으로써, 인생의 굴레를 또 다른 시각으로 표현하는 도구다. 결국 두 팀으로 나눠 밧줄과 공을 찾아 나섰던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니콜라의 집에서 이를 모두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밧줄'은 니콜라 부모의 목에 매어져 있던 것으로, 사용하기에 따라 '밧줄'이 사람들을 구할 수도, 해할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기호'로 제시된다. 반면 '공'은 니콜라로 대변되는 아이들의 사회를 향한 시선과 성장을 함께 드러내는 함축적인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꼬마 니콜라(엘다 로지도빅, 사진 왼쪽)와 구호단체 요원 맘부르(베네시오 델 토로). 사진 출처 Daum 영화
꼬마 니콜라(엘다 로지도빅, 사진 왼쪽)와 구호단체 요원 맘브루(베네시오 델 토로). 사진 출처 Daum 영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얻어 낸 그들의 성과는 어처구니없게도 엄격하게 제시된 규정을 들이민 유엔군의 제지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니콜라의 손에 쥐어진 공 또한 그의 손을 벗어나면서, 그들이 하루 동안 들인 노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또 하나의 '외력'이 새로운 형태의 '기호'로 제시된다. '머피의 법칙'이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그들의 하루가 보여 주는 이와 같은 형식의 사건 제시는, 그럼에도 좌절·포기보다는 긍정·낙관을 불러오게 만드는 독특한 기제를 드러낸다. 영화가 던지는 주제를 담론으로 이어 가기 위해, '사건의 해결'보다 '사건의 이해'에 우리의 시선을 묶어 둬야 하는 이유다. 사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여러 사건을 이어 붙이며, 하나의 조각을 천천히 맞춰 나가듯 개별 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이리저리 꼬이는 사건의 연속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화면 속에서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데, 이는 구호 활동의 배경이 되는 전쟁터의 긴장감 보다, 앞서 언급한 기표와 기의에 대한 함의를 우선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커다란 이유가 된다.

도로 위 '소의 시체'를 바라보며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 모르는 지뢰를 찾기에 여념 없는 이들 옆으로 현지 여인이 소를 몰며 태연하게 지나가는 장면은, 기표와 기의에 대한 함의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고 원했던 '비'를 불러오게 만드는 사전적인 사건으로도 이어져, 이들의 처진 어깨를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어떻게든 애써 사건을 해결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비'라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너무나도 쉽고 평온하게 종식된다. 이 허무하고 맥 빠지는 결말은 또 다른 시선에서 우리 삶을 '완벽(Perfect)'이라고 수식할 수 있는 사전적 정의에 어떤 함의를 담아낼 수 있는지 자연스레 표현하는 감독의 메시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연적 사건으로 이어졌던 각각의 사연이 하나의 필연으로 귀결되는 이와 같은 형상은, '밧줄'을 통해 해결되기를 바랐던 그들의 인위적인 방식보다 '공'이라는 매개체로 이해될 수 있는 자연적인 형태의 또 다른 '기호'로서 해석된다. 이는 계속 꼬이는 사건을 앞에 두고, '비만 내리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는 B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지는 장면에서 또 다른 형태의 반어적 표현으로 드러난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 사진 출처 Daum 영화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 사진 출처 Daum 영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비'는 오랜 전쟁으로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셔 주는 기능, 구호 요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역할, 전쟁 후유증에 지쳐 고통받고 있는 주민들의 슬픔을 대표하는 눈물, 우물 속 시체를 끌어올려 주는 표면적인 기능을 한다. 이와 더불어 앞서 언급한 도로 한가운데 놓인 '소의 시체', 꼬마 니콜라의 '공', 니콜라에게 건네준 맘브루의 숨겨 놓은 '비상금' 등은 우리가 이들의 사연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주체'가 아닌 '객체'의 영역에서 사연을 바라보고 이해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마치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표현을 내면적인 것으로 재해석해 그 속에 숨겨 놓은 또 다른 의미를 이야기하는 '블랙 코미디'처럼 말이다. 이는 자연적인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 또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하나의 해법이 될 수도 있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이 스크린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단순히 전쟁의 참상이 안겨 주는 슬픔과 아픔이 아니라 바로 이 부분이다. 이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오히려 화면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로 나타난다. 즉 앞서 언급한 민족적·종교적 반목이 불러온 참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의미로서 말이다.

온종일 답답한 사건들이 이어지는 것에 비해 영화의 타이틀 '어 퍼펙트 데이'가 의미하는 '완벽'은 바로 이러한 역설을 드러낸다. 꽉 막히고 속 터지는 상황의 연속이지만, 이 모든 사건이 허탈한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그런 하루. 감독 특유의 위트는 물론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감독은 오랜 전쟁으로 깊은 후유증을 겪고 있는 이들을 앞에 두고, 그들의 아픔을 직접 대변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 꼬여 가는 여러 사건을 늘어놓고 마치 엉켜 있는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나가듯 자연스레 해결돼 가는 과정에 집중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구호 활동을 위한 노력으로 비치지만, 오히려 전쟁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인간 욕구와 공격성·파괴성에 대한 강한 경고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욕심과 증오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피해와 고통으로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삶. 그 속에도 분명 웃음이 존재하고, 복잡했던 모든 것도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엉뚱함이, 실로 사람들에게 허탈하지만 가볍고 유쾌한 실소를 던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동기 /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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