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른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한 사람의 마지막으로 여겨지지만, 살아생전 그의 행적은 죽음과 함께 삭제되거나 폐기되지 않는다. 모두의 기억 안에 영원히 남아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다. 11월 23일, 5·18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이 죽었다. 우리는 지금 그 죽음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역사의 필름은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10·26 사태 이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노태우 등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미국을 등에 업고 은밀하게 정권 탈취 음모를 꾸몄다. 시민들이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표출하며 '서울의 봄'을 이끌어 가는 동안, 신군부는 비상계엄의 전국적 확대를 기획하고,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한 '공세적 진압 훈련'인 충정 훈련을 실시했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책에 올라 중앙정보부를 불법적으로 장악했고, 5월에는 '북한의 남침 조짐'을 구실로 전군에 경계 태세를 내려 쿠데타 준비를 완료했다.

계엄 철폐를 외치며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를 이어 가던 대학생들은, 군부대 투입 소식을 듣고 유혈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5월 15일 자진 해산한 후 학업에 전념하며 당국의 성의 있는 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신군부는 17일 오히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선포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민주 인사들을 구속했다.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을 무시하고 등교하려던 전남대학생들과 학교 정문을 막아선 군인들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졌다. 수많은 학생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분노한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해 시민들에게 계엄군들의 야만적인 폭력을 알렸다. 시민들이 시내로 모여들자, 곳곳에 숨어 있던 계엄군은 광주시민을 본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광주는 역사의 희생양이 됐다.

계엄군은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시민들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계엄군에게 붙잡힌 시민들은 죽도록 두들겨 맞고 속옷 차림으로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후 군 트럭에 실려 갔다. 시위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젊은 사람은 무조건 붙잡혀 구타당하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집단 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최종 책임이 학살자 전두환에게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으나, 그는 아무런 사죄도 없이 죽었다.

전두환은 2019년 11월 7일 강원 홍천의 한 골프장에서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묻는 임한솔 정의당 부대표의 질문에 "광주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답했다. 당시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재판을 기피하던 상황이었다. 사진 제공 임한솔
전두환은 2019년 11월 7일 강원 홍천의 한 골프장에서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묻는 임한솔 정의당 부대표의 질문에 "광주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답했다. 당시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재판을 기피하던 상황이었다. 사진 제공 임한솔

계엄군의 학살에 맞서,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조직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은 시민군의 저항을 받아 철수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외곽 봉쇄 작전으로 광주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고립무원이 되고 말았다. 5월 22일부터 광주는 해방 공간이었다. 시민들은 자치 공동체를 수립하고 투철한 시민 의식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골목마다 솥을 들고 나와 주먹밥을 지어 나눴고, 거리를 청소했으며,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하면서 서로 섬기는 민주 공동체가 되었다. 그동안 단 한건의 방화·약탈·강도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5·18 광주의 정신은 저항의 정신이자, 나누는 일에 하나가 되는 대동 정신이며, 평화를 갈망하는 샬롬의 정신이었다.

항쟁 마지막 날인 5월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은 긴장과 정적에 쌓여 있는 도청을 포위하고 시민군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시민군의 낡은 소총으로는 그들의 엄청난 화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진압으로 사망한 사람만 25명 이상이었다. 이때 필자의 선배 문용동 전도사도 희생당했다. 다음 날 아침, 계엄군과 공무원들은 광주시내 얼룩진 핏자국을 지우기 시작했고, 상무관에 안치돼 있던 시신들을 쓰레기 치우듯 망월동에 매장했다. 상여도, 만가도, 화환도 없었다.

이후 광주시민은 41년 동안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살아왔다. 학살자 전두환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사과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회고록 따위를 써 가며 5·18과 광주시민을 왜곡·폄훼했다.

국립 5·18 민주 묘지 사진. 뉴스앤조이 최승현
국립 5·18 민주 묘지 사진. 뉴스앤조이 최승현

전두환은 죽었지만, 우리는 그를 축복하고 부역한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5·18 광주의 피울음이 채 그치기도 전인 1980년 6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두환을 위한 조찬 기도회를 연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신군부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전두환을 여호수아에 빗대어 축복했다. 이들이 학살자 전두환과 조찬을 나누며 그를 축복한 일은,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그와 공범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학살자를 향해 "과오를 회개하고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하라"고 예언자적으로 외치지는 못할망정, 201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비롯한 군사 쿠데타 주역들과 오찬을 한 목사도 있다. 이뿐인가. 심지어 교회 강단에서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 우리 교회를 방문한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꽃다발을 준비했으니, 뜨겁게 박수하자"고 한 목사도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람도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중 누구도 공개적으로 사과하거나 회개한 사람이 없다.

이와 같은 부역자들도 학살자 전두환처럼 언젠가 죽음 앞에 설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거짓과 악행은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5·18 광주 무력 진압과 군부독재 폭압이라는 야만의 역사 앞에서 한 점 참회도 없이 죽은 학살자를 생각하라. 그리고 죽음 이후를 생각하라. 하늘 법정이 있음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장헌권 / 광주 서정교회 목사. 광주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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