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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맞은 21세기 벽두, TV로 생중계된 9·11 테러 사건을 바라보며 경악했던 일이 생생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침공이 시작됐고, 곧이어 나는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 프로젝트로 북한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라 대한민국 여권만 있어도 북한을 다니는 데 문제가 없었다.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7년에 평양과기대를 완공하리라는 목표로, 전 세계를 다니며 '동양의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일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아, 북한"을 외치며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그 일, 우리 민족이 하나 되고 통일의 길을 여는 그 일에 온몸을 불사르듯 매진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2007년 아프간에서 '샘물교회 사건'이 터지며 순교자가 발생했다. 기독교계 내부에서조차 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들어간 그들이 무슨 순교자냐며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흥을 기대하며 "아, 북한"을 외쳤는데, 갑자기 아프간 사태가 발생하면서 북한도 아프간도 모두 막히고 말았다. 보수 정권이 집권한 뒤로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북한을 드나들기 위해서는 캐나다 영주권이 필요하게 됐다.

마침내 평양과기대 설립이 끝난 후인 2010년 봄, 나는 80일간의 실크로드 육로 횡단을 감행했다. 남북이 연합해 함께 달려갈 미래를 엿보기 위해서였다. 북한 변경에서 출발해 중국·카자흐스탄·키르키스스탄 경계를 넘었다. 마침내 타지키스탄과 아프간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무르티무르강가의 국경선 철조망에 이르렀을 때, 눈만 내놓고 두건을 휘두른 채 흙먼지를 뒤집어쓴 우리 일행의 모습은 여지없는 '탈레반'이었다. 아프간 사태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여행 금지령이 떨어진 상태라 우리는 거기서 멈춰야만 했다. 국경 근처 난민촌에서는 쫓겨난 아프간 한국 선교사들이 아프간 난민들을 돌보고 있었다.

아프간은 역사 속에서 결코 함락되지 않는 땅, '제국의 무덤'으로 불려 왔다. 페르시아제국과 중국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간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아프간은 항상 제국의 먹잇감이 됐다. 제국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주검과 혈흔이 낭자했고, 남은 자들은 신에게 부르짖었다. 그들의 신앙이 조로아스터교에서 불교, 힌두교, 경교를 거쳐 마침내 이슬람교로 바뀌어 가는 동안에도 제국의 침공은 그치지 않았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모든 제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피압박 민족에 대한 폭압·살상·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아프간은 실로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적신 땅이 됐다. 그리고 그 피는 그 땅을 다시 살려 내곤 했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제국, 몽골, 영국, 소련이 실패한 아프간 땅에서, 이제 세계 초강대국 미국도 뼈아픈 수치의 기억만을 남긴 채 물러가게 됐다.

제국의 속성 중 하나는 민족을 이간질하고 쪼개 분할통치하고 내전을 일으키는 일이다.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꼭두각시 정부를 만들기 위해 분봉왕·총독을 파견하고, 반정부 집단을 세우고 내전을 통해 정부를 무너뜨린다. 오래전 바빌론·페르시아·로마제국이 하던 그 역할을 19세기에는 영국이 담당했고, 20세기엔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수많은 민족 갈등과 내전을 양산했다. 미소 합작 군사 강점과 분할통치로 일어난 한국전쟁뿐 아니라, 베트남전쟁, 니카라과 내전, 이라크 전쟁, 시리아 내전 등 지난 세기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의 배후에는 항상 제국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식민지에는 예외 없이 선교사들이 선봉에 서서 들어왔다. 선교사와 함께 물질이 따라오면 교회가 건축되고 신학교가 만들어진다. 공개된 예배와 각종 프로그램이 돌아가며 선교사를 돕는 현지인·교인들에 의해 공개적인 선교가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지난 수백 년간 서방 국가의 가톨릭·개신교가 진행한 '위로부터의 선교'였다. 아프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도 카불에 세워진 친미 정부에 의해 아프간 사회는 서구 문명과 접목되며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기독교 복음도 전파됐다. 그로 인해 여성들의 교육과 인권이 신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2010년 아프간 국경에서 들여다본 것은 장차 다가올 아프간의 미래였다. 우리가 거쳐 온 중앙아시아 모든 나라에서는 소련 붕괴 후 서방과 한국 선교사들이 현지에 세웠던 공개된 교회와 선교 프로그램들이 이미 강성 이슬람교에 의해 예외 없이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교회들은 숨어 지내는 비공개 '가정 교회', '지하 교회'가 됐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국인과 중국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실크로드 80일 육로 횡단 당시 이란과 터키,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을 거쳐 종착역인 이스라엘에 들어가, 여행을 마치는 과정에서 선지적으로 깨닫게 된 미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띵동, 박부장입니다>(홍성사)를 썼다. 벌써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프간에서 급히 철군하는 미군의 소식, 맥없이 무너져 내린 친미 정부, 탈레반의 점거로 급변하고 있는 아프간 사회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전해 들으며, 그때 썼던 내용이 떠올라 책을 뽑아 살펴봤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조만간 미국과 다국적군이 빠져나간 이후에 어떻게 아프간에서 생존 가능한 교회와 성도들을 심어 줄지가 관건입니다. 현재 다국적군의 통치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개된 사역들은 조만간 모두 무너질 성벽을 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힘에 의한 선교는 힘이 빠져나가는 순간 바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월남이 패망한 이후 보트 피플이 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죠.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장악할지라도 생존 가능한 교회의 씨앗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비공개 사역과 그에 맞는 교회를 집어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비공개 교회에 관심을 갖는 이유입니다." (218쪽)

놀랍게도 오늘날 일어날 상황을 10년 전에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북한과 아프간은 장차 나타날 환란 날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지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이 현상을 전 세계가 함께 경험하도록 만든 사건이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이런 전 지구적 재앙은 성경의 예언대로 마지막 때에 일어날 환란 속에서 어떤 교회가 나타날 것인지 미리 보여 줬다.

이제 미국이 물러난 그 자리엔 다음 주자인 중국이 일대일로를 완성하기 위해 들어갈 것이다. 아프간 철군으로, 키르기스스탄 미군 기지, 사우디 및 중동 국가에 배치된 사드와 미사일들이 사라진 실크로드에서 중국은 이제 거칠 게 없을 것이다. 중국과 실오라기처럼 맞닿아 있는 아프간 국경선을 따라 육상 실크로드가 다시 열리고, 세계 3대 상인인 중국·아랍·유대 상인들이 각축전을 벌일 시대가 열릴 것이다. 중국과 함께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 57개 이슬람 연맹, 22개 아랍 연맹이 뭉쳐 이스라엘을 에워쌀 그날이 다가오지는 않을지, 많은 생각이 오간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본다. 이제 그 길을 따라 북한·중국의 핍박과 환란 속에서 훈련받아 온 비공개 교회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지하수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각 나라와 지역사회를 섬겨 나갈 것이다. 공개된 교회의 서방 선교사가 떠나고 추방당한 그 자리에서, 그들이 할 수 없는 사역을 비공개 교회가 해낼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참 기독교의 역사는, 지표수 위를 떠가는 화려한 유람선이 아니라, 목마른 자를 살리는 지하 생수처럼 앞으로도 계속 흘러갈 것이다. 예수의 삶이 그러했듯이.

정진호 / 한동대 교수, 전 평양과기대 설립부총장, 유라시아 원이스트씨 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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