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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한국교회에 종말론적 심판이 시작되는 듯한 혼돈이 일고 있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기복신앙과 권력 신앙으로 폭발적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세계적 대형 교회로 위세를 과시해 왔다. 그러나 최근 교회 매매·세습, 성직자 윤리 문제 등 교회 내부 문제가 대외적으로 공론화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여타 사회조직에 못 미치는 대처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이 폭로됐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가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고 '교회는 사업장이 아니다'는 발언을 내뱉는 등 시민 의식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빛과 소금이 돼야 할 종교인의 현실 인식이 되레 세간의 우려를 샀다.

성서 정신과 동떨어진 한국교회의 비·반교회적 행태는 특정 종교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근원적 성찰을 요구한다. 교회가 이익 단체로 전락해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게 아닌지 의구심마저 든다. 한국교회가 회개 없이 현재 모습대로 운영된다면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사태'가 지속될 것이 자명하다.

한국교회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개축과 리모델링이 아닌 새 신앙의 터 위에 시작해야 한다. 한국 종교 역사에서 거의 막내격인 한국 그리스도교가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 '한국의 종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성찰과 실천이 선행돼야 한다.

한국교회의 빛과 그림자
선교 사업과 신학의 토착화
신사참배, 교회 매매·세습

초창기 한국교회는 교육·의료 사업, 신분 질서 타파 등 근대화 시기 사회 혁신에 상당한 역할을 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3·1 운동 한 축으로 나서고, 독재에 맞서 민주 사회를 위한 투쟁에서 앞장선 역사가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역사는 한국 종교사의 어두운 그림자다. 로마교황청 명령을 받은 천주교 지도자들은 거리낌 없이 신사참배를 감행했고, 대다수 개신교 목회자도 신사참배에 동참해 해방 후 교단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다. 신사참배는 조상 제사에 참여하는 유교 의례와는 차원이 다르다.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한 우상숭배이자 신성모독이다. 이렇게 변절했던 한국교회가 과연 참회와 반성 후 새롭게 출발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래 이후 한국에는 서구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둔 교파·교회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졌고, 지금도 상당한 교세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과연 한국의 다른 종교와 공존하며 조화롭게 성장해 왔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국교회가 진정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 뿌리내린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종교학자이자 신학자 이찬수가 지적하듯 "그리스도교가 한국적이기 위하여"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한국교회는 수입·번역된 신학을 중심으로 서구 신학이 각축을 벌이는 대리 경연장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자생한 교회는 '이단'으로 치부되고, 교단 신학을 뛰어넘은 용기 있는 신학자는 축출당했다. 대표적으로 감리교에서는 종교 간 대화에 물꼬를 튼 변선환, 포스트모던신학을 주장한 홍정수 등은 출교되고, '민중신학' 한 축을 개척한 연세대 서남동은 해직(?)당했다. 그 후로도 한국교회의 서구 신학 추종은 심화해 왔다.

한국 천주교도 1997년 광주가톨릭대 이제민 신부, 서강대 교수 정양모·서공석 신부가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경고를 받은 신학적 자유 침해 사태가 있었다. 한국 교계에는 칼 라너, 칼 바르트, 폴 틸리히, 장 칼뱅, 위르겐 몰트만 등 서구 신학자들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한국다운 신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한국 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신학의 토착화는 결국 서구 신학을 한국 종교 문화에 이식하는 '종교 사대주의' 내지 '식민 신학'일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만이 '정통'이고 이외 학문은 '좌도'左道·'이도'異道·'음사'淫事로 치부됐던 일이 한국교회에서도 그대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단 소속 신학자는 교단 신학을 위해 복무하며 서구 신앙·신학을 한국에 전파하는 나팔수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교가 가진 강력한 무기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개념이다. 정통과 이단은 사실상 자본의 양과 신도의 수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정통과 이단' 기준이 절대적이라면 각 교파·교단이 정죄하는 '이단'이 저마다 다른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 민족 시조인 단군상과 단군 성전을 세우는 일을 반대하는 종교적 정당성을 누가 부여했는지 물어야 한다. 단군상이 우상숭배라면 가톨릭 성당에 있는 성모마리아상, 성화, 교회마다 솟은 십자가는 과연 우상숭배가 아닌지 동일한 관점에서 물어야 한다.

천주교 순교자뿐만 아니라 허균, 홍경래, 전봉준 등이 처형된 아픈 역사의 현장을 로마교황청이 '천주교 서울 순례길'로 지정한 일은, 일제강점기에 로마교황청이 신사참배를 지령했던 제국 종교의 횡포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기복신앙과 자본 신앙 토대 위에서 교회가 매매·세습되며 기독교 신앙 자체를 희화화하는 일이 성서가 가르치는 일인가. '예수의 몸 된 성전'이라는 교회를 사고팔고, 세습하는 일은 드러난 일부 대형 교회뿐만 아니라 중소형 교회 같은 물밑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학자·목회자·신자는 '살아서 편안하게 믿고, 죽어서는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은총을 위해 침묵으로 일관하며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성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회칠한 무덤'같이 적막하다. 한국교회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한국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성서 공부, 인격 교회 자각,
한국적 성서 해석의 보편화

지구촌 시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각국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한국인의 자긍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코로나19 이후 교회 공동체의 이율배반적 행태는 역설적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국교회가 다원화한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몇 가지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그리스도교인는 성서를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성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교인에게 보낸 편지이자 인류의 경전이다. 성서 공부는 목사와 신학자 등 직업 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서에는 영생의 말씀이 있고(요 5: 39-40), 영생의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담겨 있으며(딤후 3:15),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는 안위와 소망이 담겨 있다(롬15:4). 예수도 성서를 읽었고(막 14:49, 눅 24:27, 요 5:39), 베드로·스데반·바울 등 예수의 사도들도 성서를 읽고 예수를 증거했으며(행 2:14-40; 7: 1-20; 28:23-31), 초대교회 베뢰아 성도도 날마다 성서를 상고했다(행 17:11-12).

성서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제시한 장대한 구원의 파노라마이기 때문에 이를 공부하는 일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스도교인은 하나님 말씀이 담긴 성서에 정통해야 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직접 해석·실천해야 한다. 성서를 믿고 깨닫는 그리스도교인은 생명의 영(롬 8:2), 진리의 영(요 14:17; 15:26, 요일 4:6), 영원하신 영(히 9:14), 성결의 영(롬 1:4), 영광의 영(벧전 1:14), 약속의 영(엡 1:13), 은혜의 영(히 12:29), 생명의 영(롬 8:2)이신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신앙생활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이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인간이 곧 교회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건물 교회가 '교회'라는 비성서적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시멘트와 철골로 만든 건물에 '교회' 팻말을 붙인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필자가 2019년 11월 5일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한국교회에는 올바른 교회론이 있는가'라는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구약성서는 '인간 = 성전'이라는 '인간 성전' 개념을 말하고 있고(렘 31:33-34), 신약성서는 '인격 = 교회'(고전 3:16; 6:19, 요 2:21, 계 21:22)라는  '인격 교회', '인격 공동체'(엡 2:20-22)를 말하고 있다. 교의학에서도 교회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고 말한다.

성서는 인간이 만든 건물에는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한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성전을 닫으라"(1:10)고 말하고, 예수는 "성전을 헐라"(요 2: 19)고 명령한다. 교회가 인간 성전과 인격 교회라는 성서의 기본 가르침을 수용하지 못하고, 외형적 건물을 교회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 앞에서 주저한다. 참 그리스도교인은 역사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아픔을 안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본·권력·명예·탐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위해 사는 인격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건물 = 교회'로 여기기 때문에 교회 매매·세습이 관례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신자들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의 몸 된 성전'을 짓기 위해 헌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몸 된 성전이 상품으로 매도되는 신성모독이 한국교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데도 어찌 '통곡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침묵하는가. 이런 일에 침묵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어찌 그리스도교인이라 할 수 있으랴.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 이용필

셋째,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린 새로운 성서 해석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전래한 이래 양식 있는 신학자가 '신학의 토착화' 담론을 형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구 신학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토착화는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민중신학이 세계 신학계에 명함을 내밀지만 한국교회를 혁신하기에는 그 힘이 아직 미미하다.

한국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성서 해석을 벗어나는 신학적 사유를 하지 못하고, 개신교는 웨슬리, 칼뱅 등이 주창한 종교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벗어나는 신학자·목회자는 '해직·출교'당하기 일쑤다. 교단 신학자 중 이단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신학자는 사실상 서구 신학 테두리 안에서 사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은 번역 신학, 식민 식학, 제국 신학 위에서 한국의 종교 영토에 '서구적 황금탑·교리탑'을 쌓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을 때 한국 그리스도교인은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이 문제로 한 평생을 구도한 변찬린은 이렇게 묻는다.

"일찍이 유·불·도에 의해 윤간당한 한국인의 심성은 마지막 때를 당해 맑스교와 기독교의 꼬임을 받고 세계의 갈보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더럽혀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원효 같은 위대한 화쟁혼이 있었고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도 풍류의 얼을 고이 간직한 고운이 있었고 썩은 선비들이 사색당쟁의 개판을 칠 때도 퇴계와 율곡과 같은 사상의 거봉들이 정신의 산맥을 융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은 없는가?"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한국신학연구소), 9~10쪽]

한국교회는 서구 신학 사대주의와 세속적 자본 신앙, 건물 종교에 함몰된 세속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 종교의 역사적 학맥을 계승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새로운 답을 제시해야 하며, 성서 정신을 체화한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탄생시켜야 한다.

코로나19는 문명사적 전환기다. 이후 전개될 새 문명 속에서 한국교회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계를 선도하기를 바란다. '신사참배'라는 역사적 과오와 '교회 매매·세습'이라는 현재적 과오에 대한 무거운 참회가 선행해야 하며, 새로운 성서 해석과 위대한 그리스도교인의 탄생이라는 열매를 세계에 내놓아야 한다. 지금은 새 문명을 밝히는 새벽이다. 새로운 빛으로 무장한 그리스도교인이 환골탈태해 새 문명의 밀알이 돼야 한다. 빛은 동방으로부터 비친다.

이호재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 종교로 종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 종교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 축 시대의 영성 생활인'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 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운동>·<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문사철), <인생 지도>(나비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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