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 교회와 건물 교회의 혼란

최근 일부 대형 교회가 교회법에 위반되는 교회 세습을 편법으로 용인하고, 사회 법에 저촉되는 지하 예배당 건축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교회 매매와 세습은, 종교 의례를 행하는 장소를 '성당'이라고 하는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다. 교의학에서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 글에서는 '가시적 교회'인 지상 교회가 일반 부동산과 같이 매매되고 세습되기에 부동산 개념인 '건물 교회'라고 표현한다. 신앙적 교회와 건물 교회의 혼란에 대한 비평적 대안을 제시하는 글이기에 오히려 필자가 만든 단어인 '건물 교회'가 독자와 소통하는 데 적합한 용어라고 판단한다.

교회 용어 사전에서 교회는 "문자적으로는 '밖으로 불러 모으다'는 뜻으로, 죄악 세상에서 불러 모아진 성별聖別한 자들의 모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모임을 가리킨다(엡 1:22-23; 히 2:12)"고 정의한다. 과연 교회라는 명칭을 건물 장소에 붙이는 것은 성경적 맥락에 맞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이라는 교회를 매매하고 세습한다는 것은 기독교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한정된 지면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과 신약의 교회 개념이 다양한 맥락 가운데 어떤 통일성을 지향하고 있는지 성서에서 말하는 성전과 교의학에서 말하는 교회를 구별해 살펴본 후 한국교회 현상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통해 나름대로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성서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 모신 성전',
인격 성전을 말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성전은 어떠한 맥락으로 기술되어 있을까.

아브라함과 대화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낸 하나님은 인간 안에 거하고 인간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렘 31:33–34). 이스라엘 백성은 각자의 심령 성전에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섬기는 생활을 한다(히 8:10-11 참조). 성전에 대한 첫 언급은 모세가 네 차례 시내산에 오르는 가운데 세 번째 시내산에 오르면서 성막을 짓는 모형을 계시받는 데서 비롯된다. 무형의 성전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유형의 성막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장막 성전을 종교 의례 중심지로 삼으며 40년 동안 40번 장막을 옮기면서 시내 반도를 방황한다. 주요한 점은 성막 성전은 고정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광야 교회'였다는 점이다(행 7:38).

성전은 이동하는 장막 성전 시대를 거쳐 솔로몬이 B.C. 960부터 B.C. 950년 사이에 예루살렘성전을 건축했다.(왕상 6:1, 6:37–38). 성서 역사에서 첫 건물 성전을 지은 솔로몬마저도 인간이 지은 성전에는 하나님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예루살렘성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B.C. 587년 예루살렘을 침략해 파괴된다(왕하 25:8-9, 스 6:12).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이 B.C. 516년에 파괴된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한다(스 5:2, 6:12). 유대인은 관습적으로 예루살렘성전에 하나님이 있다고 맹신하고 모세 율법에 근거해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런 종교 의례 타락 현상에 대해 구약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는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 1:10)고 하면서 구약은 막을 내린다.

기독교에서 메시아라고 신앙하는 예수가 왔을 당시에도 예루살렘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닌 시장으로 변모해 있었다(마 21:12-13). 이처럼 예루살렘성전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제사장의 종교 의례 장소와 시장터로 변모해 있었다. 이런 정황을 보고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는 '실체 성전'(요 2:21, 계 21:22)이고, 예루살렘성전은 '상징 성전'인 건물 성전에 불과하다. 성서에서 모세의 장막 성전, 예루살렘성전 등은 상징 성전이고, 예수가 말하는 참 예배는 고정된 건물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와 수가촌 여인의 담화에서 예배할 장소에 대해 문답을 나누는 대목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가촌 여인은 예루살렘성전과 사마리아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 중 어느 곳에 가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예수께 질문한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각각 자신이 만든 성전에서 예배해야 하나님이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는 인간이 만든 성전은 예배할 장소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중략)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성서의 주인공인 예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과 예루살렘성전이라는 건물 성전에서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인격 성전이며 실체 성전인 예수의 안목으로,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드리는 예배는 모르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우상숭배였다(행 17:23-25). 예수만이 인격 성전으로서 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수는 성전은 살아 있는 인간 성전 즉 인격 교회(요 2:21)이며, 두세 사람이 한마음이 되면 그곳에 있겠다고 약속했다(마 18:19–20). 예수 사후 최초 순교자인 스데반도 이사야 66장 1절과 2절을 인용하며 건물 성전에는 하나님이 부재하는데도 유대인이 오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행 7:48-51). 예수의 제자들도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혹은 교회는 '가시적 교회'라고 명칭을 단 건축물이 아니고 거듭난 인격이며, 인격이 사랑으로 연대한 인격 공동체가 교회이다(엡 2:20–22). 심지어 바울은 말한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제물"(롬 12:1)이라고 강조한다. 성서는 이처럼 인격 교회를 지향하고 있지, 건물 성전 혹은 건물 교회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성서의 일맥상통한 맥락은 성서의 마지막 문서인 요한계시록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개명되어 하늘에서 거룩한 성이 내려오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연출된다. 성전은 없고 거룩한 성만이 있다는 것이다. 성전은 바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지칭하는 예수이다.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과 예수는 바른 신앙고백 위에 거듭난 인격 교회에 거한다고 신약성서는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새롭게 거듭난 인격교회인 성전은 누구의 설교나 계명에 따라 타율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율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인간은 진리로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계 21장).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존재가 거할 영원한 집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진리만이 우리가 거할 참 집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된 성전! 이것이 새날의 교회이다."[변찬린, <요한계시록 신해>(한국신학연구소), 272쪽]

건물 교회는 신앙 공동체로서 성도들이 거룩하게 교제하는 담소의 장소 혹은 기도하는 예배당에 불과하다(마 21:13 참조). 특히 성전과 교회를 건축할 때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을 직업 종교인이 부동산인 양 매매하고 세습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도, 교의학의 교회론도 아니며, 교회법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는 위법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을 가르치는 건물을 '교회'라고 하는 것을 외부인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하나님의 성전'인 가시적 교회와 매매와 세습이 되는 '건물 교회'라는 신앙적 괴리를 기독교 구성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의 성전은 이동성이 담보되었던 장막 성전, 예루살렘성전을 헐라던 예수의 비판, 그리고 예수 사후 스데반은 건물 성전에 하나님이 없다는 증언을 하면서 순교자의 길을 간다. 건물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예수와 사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전대를 매지 않았다. 무소유로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 성서의 정신이다.

교의학 교회론도
건물 교회를 '교회'라 하지 않는다

교회 역사는 모세의 장막 성전, 예루살렘성전 시대를 거쳐 성직자의 제도 교회에서 형제자매의 공동체로서 역사적 변천을 거듭해 왔다. 초기 신앙 공동체는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생활공동체의 양상을 띤다(고전 3장 참조).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을 시발로 로마의 기독교는 국가교회로 변모한다. 또한 기독교 변증가에 의해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Salus extra ecclesiam non est)라는 사도 계승이 교리화하고 국가 차원의 거대한 위계적인 성직자 제도와 이를 정교화한 종교 의례가 만들어진다. 특히 가톨릭 신학에서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적통으로 세우고 324년 니케아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이라는 성격을 가톨릭 교회관의 전통으로 삼는다. 이를 바탕으로 교황을 정점으로 추기경-주교-사제 등의 위계질서를 가진 성직자 제도로서 보편 교회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마태복음 16장 18-19절이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하략)"라는 성구이다. 당시 이미 베드로 계열의 공동체, 바울 계열의 공동체, 야고보 공동체 등도 있었기에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위 성구는 사도를 계승한 성직자 교회로서 자리 잡게 하는 핵심적 성구가 된다.

반면 개신교는 기톨릭 중세 국가교회의 모순점을 비판하며 종교개혁가는 성직자들의 '객관적, 법적 제도'가 아니라 성도들의 교통,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교회의 본질로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개신교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성직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도들의 모임과 사귐을 천명하고 있다. 특히 큄멜(W. Kümmel)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출전을 둔 ekklesia는 제도 교회가 아닌 예수 부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형성한 생활공동체가 교회의 모형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장의 공동체 성령 체험과 새로운 생활 모형인 인격 공동체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기억해 보자. 또한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 같은 신학자도 '장소와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듣는 곳'이 교회이며, 민중신학도 민중 교회는 민중의 삶 속에 드러나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즉, 교회는 건물 교회가 아니고 '사건 혹은(과) 말씀 혹은(과) 삶'에서 드러나는 교회로 규정된다. 이런 사상은 몰트만도 교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기독교인이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신학자 입장에 따라 다른 맥락의 교회관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고정된 장소가 '교회'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다.

심지어 개혁 교회는 성령을 받은 성도들의 자발적인 봉사와 헌신에 맞게 직분을 맡는 등 인위적인 성직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한다. 이처럼 가시적인 교회 조직은 비가시적인 교회를 본떠 위계질서와 계급 질서 등 일체의 차별과 차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개혁 교회의 본질적 정의이다. 그러나 개혁 교회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정해진 제도의 틀에 의해 목회자가 육성되며 직분은 목사·장로·권사·안수집사·집사 등으로 차등화, 차별화한 교회 신분으로 고착화해 가는 경향을 보이며, 만인사제설은 유명무실하게 되어 초기 개혁 정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종교 조직으로서 교회는 종교적 위계질서에 의해 점차 경직화하고 타율화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가 내건 "개혁되어진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manda)라는 스스로의 종교적 구호에 충실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인격 교회 선포하고
인격 공동체 형성하라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천주교는 성당이라는 부동산 개념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신교는 '국명 혹은 소속 교단 명칭 혹은 지역'을 혼용하며, 대부분 마지막에는 교회 명칭을 붙인다. 과연 이것이 개혁 교회가 규정한 교회의 본질과 동일한가. 굳이 언어철학과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언어와 실재는 명실상부해야 한다. 즉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개신교의 대부분 건물교회가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명실상부한가. 대부분 교회를 지을 때는 '하나님의 성전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으로 헌금을 거두어 교회를 성대하게 짓는다. 따라서 목사 등 직업 종교인이 이것을 매매하거나 세습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붕괴시키는 신성모독이다. 더구나 종교 자유가 보장되는 한국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교회 매매와 세습, 사회 법을 위반하는 교회 사태는 신앙공동체의 구조적 모순이다. 이는 일부 대형 교회 문제라기보다 한국교회 공동 책임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이런 사태를 직면하고도 기독교 구성원의 담론 형성 지점을 보면 한국교회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교회 신앙체의 근본인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고팔고 세습하는 '대사건'인데도 진작 기독교 구성원들이 보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과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한 반응은 외부인 시선으로는 의아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기독교는 그동안 무엇을 신앙하고 있었는가. 일부 진보적 기독교 지도층은 검찰 개혁에 서명을 하는 등 사회적 발언에 용기를 보이지만, 진작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교회 존립의 근간을 흔드는 교회 매매와 세습에 대한 소극적 태도에는 상대적으로 신앙 공동체의 '침묵의 카르텔'을 보이는 경향마저 감지된다. 생각해 보라.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전통적 구원관의 근간을 흔드는 교회 매매와 세습에 대해 그동안 한국 기독교의 중추적 역할을 해 온 기독교 지도층의 책임 있는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리고 있는가.

사실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한반도의 국제 정세와 한국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에 가지는 큰 기대와 희망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 고비에 공과는 있었지만 어느 종교 조직보다 신앙 공동체로서 잠재력과 저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이 조그만 계기가 되어 기독교 근본 개혁을 위한 하나의 건전한 담론으로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지금부터라도 신앙의 본질에 대해 토론하고 반성하고 한국의 명운이 걸린 남북 평화 질서, 사회 개혁, 종교 혁신 등에 앞장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종교학자로서 내놓는 단기적인 실천 가능한 대안과 중장기적인 근본 개혁 방향에 대한 제안이 기독교 혁신과 갱신의 출발점으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첫째, 교회 명칭을 건물 교회는 건물 교회답게 예배당, 교회당 등 장소의 명칭으로 바꾸어야 한다. 예를 들면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예배당(혹은 교회당) 혹은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당(혹은 예배당) 혹은 기독교대한감리회 ○○교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예배당(혹은 교회당) 혹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회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회당(혹은 예배당) 등 장소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교회는 부동산으로 간주되어 기독교인의 교회에 대한 신앙 지향점과의 괴리 현상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동산을 매매하고 세습하는 것은 정해진 사회 법 절차에서 용인되는 상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도기적으로 성서 정신과 교회라는 교의학적 개념과 명실상부하지 않는 건물 교회를 공동체가 모이는 장소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명분 있는 작은 대안이 될 것이다.

둘째, 기독교인 각 자가 주체적인 인격 성전으로 인격 교회를 선포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성서의 기본 정신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름을 받은 자는 예수와 같이 '나=교회' 즉 인격 교회임을 선포하며 예수의 길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가 언제 건물 성전에서 민중과 더불어 동고동락했는가. 성전 자체였던 예수는 스스로가 민중의 삶 속에서 사회적 약자와 사랑 실천을 솔선했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일관된 기술이다. 깨어난 기독교인은 구약성서의 장막 성전과 건물 성전 시대는 예수의 인격 교회 선포와 제자들의 증언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져야 하는 역사적 유물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인 스스로가 주체적인 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서 인격 교회를 선포하는 운동이 자율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셋째, 종국적으로 인격 교회와 인격 교회가 연대한 인격 공동체 운동을 확산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 고난을 받고 부활한 후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성령이 내림으로 유무상통하는 신앙 공동체가 생긴다. 이 신앙 공동체는 신약성서에 처음으로 기술된 성령 공동체이다. 이들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라는 오순절 체험 모습이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오순절 체험은 교회 공동체의 모형으로, 오늘날 재현해야 할 '인격 공동체'의 원형이다. 오순절 공동체는 자율적이고 자발적이고 자립적으로 민중의 삶 속에서 형성되는 열린 공동체이다. 오순절 공동체는 자발적인 공동체이지 타율적인 제도 공동체가 아니다. 예수와 제자의 설교는 삶의 행동이었다. 정형화한 설교로 민중과 교류하지 않았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처럼 하나님이 왕이고 공동체 구성원은 수평적인 질서 속에서 포도송이처럼 인격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런 제안이 당황스럽고 현실을 모르는 대안 운동이라고 기독교인은 말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기독교의 근본 신앙을 믿는 한국의 주류 기독교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의 계명을 금과옥조처럼 신앙하는 기독교인이 위에 제시한 성서 정신과 교의학에 부합하는 대안 운동을 실천하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다고 믿는다. 심지어 예수는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용기와 희망을 주기까지 한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면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다는 용기, 사랑 계명만 실천하면 '나의 친구'라고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참 기독교인이라면 어찌 예수의 당부를 실천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성서 정신과 교회론에 부합하는 인격 교회 선포와 인격 공동체 형성은 새 시대 기독교인의 큰 사명이다. 인격 교회와 인격 공동체는 하늘나라의 지상적 모형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24, 유사 성구: 눅 14:27, 마 10:3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중략)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2:12-14)."

말씀을 회복한 '인간=교회'인 인격 교회는 성서의 언어 맥락에서 말하는 참 교회인 '새 교회'이다. 반면에 인간이 만든 건물 교회는 늘 우상숭배 근거지로 하나님이 부재하다고 증언하는 것이 성서의 근본 정신이다. 참 기독교인은 스스로가 인격 교회임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한다. 그리고 인격 교회와 인격 교회가 사랑의 마음으로 인격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바른 교회관이다. 건물 성전이 축 시대의 성전이었다면,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을 '인간(공동체)=교회'에 모시는 인격(공동체)교회는 새 축 시대의 '새 교회'이다.

이호재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 종교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 종교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의 사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새 축 시대의 영성 생활인'이라는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 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운동>(2018), <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2017), <인생 지도>(2017)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 재래 종교의 '구원'관>, <함석헌의 '새 종교'론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변찬린의 새 교회론 연구> 등 수십 편의 국내외 논문이 있다.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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