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교회를 다녔다는 경험을 내세워 본인이 기독교를 좀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여기저기에 있다. 주로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보이는 첫 반응이지만 최근에는 책을 다루는 팟캐스트에서 그 방식을 접했고, 'presence'라는 단어를 설명하던 번역가가 한때 금요 철야까지 참석하는 열렬한 신자였던 과거를 소환하는 글을 보았다.

그런 경우 기독교는 대개 이십 년에서 십 년 전 어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교회 문화'로 설명된다. 전도하거나 새벽 예배에 참석했을 때 달란트를 주고 그 달란트로 떡볶이를 교환하는 시장을 운영했잖아(어린이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예전에 TV에서 하던 만화영화도 안 보고 교회에 갈 정도로 열심이었어. 그때는 만화영화가 사탄이었어(그랬나요), 금요 철야 시간에 한 손은 가슴에 얹고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들고 찬양하면서 방언도 했어. 그런 선캄브리아기가 내게도 있었다고(놀랍네요), 내가 청년부 회장 출신이야(그러셨군요).

어린이를 종교 규율에 길들이는 달란트 시장 운영, TV 만화영화의 악마화, 열광적 찬양 문화와 방언, 젊은 날의 혈기를 헌신으로 유도하는 청년부 생활. 유년기에 잠깐 혹은 청년기까지 교회에 발을 담갔던 누군가가 이런 레퍼토리로 기독교를 아는 체 할 때마다 난 '할많하않' 상태에 빠지고 만다. 긴 시간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회 문화' 혹은 과거 어느 순간 빠져들었던 열광적 신앙 형태를 근거로 "너 아직도 그 비정상 집단에 속해 있니? 그렇게 안 봤는데"의 애처로운 시선을 마구 분사하지만 일단 참는다. "너도 계좌이체로 헌금해?"까지 나왔을 때 난 태연히 대답했다. "응.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예배하면서 지난주에도 이체했는데?" 못 볼 걸 본 표정이다.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 도무지 나이스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면서 되뇌는 질문. 친구야. 정말 교회에서 달란트 시장과 방언과 헌금 계좌 이체 하는 게 문제야? 그래서 지금 교회에 안 다니는 거야? 기독교를 지나간 유행 대하듯 하는 진짜 이유가 정말 그것 때문이야? 네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바를 채 알기도 전에 교회 로맨스가 끝나 버린 게 문제 아니고?

나는 왜 아직도 교회에 다니고 있을까

G. K. 체스터턴이 지적했듯 차라리 기독교를 "낯선 대륙이나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로 간주하는 편"이 그 본질에 다가가는 적절한 방법이겠다. 20세기 초 영국인 체스터턴은 영국에 있는 교회를 수만 리 떨어진 중국으로 옮겨 놓고 마치 중국의 사원을 판단하듯 공정하고 냉철하게 평가할 수 없을까를 물었지만, 21세기 한국에 사는 나로서는 중국보다는 히말라야 어디쯤에 교회를 옮겨 놓고 싶다. 본인의 경험으로 기독교를 안다고 여기는 피상적 관점에는 거리에 더해 높이까지 필요해 보이니까.

이는 교회를 떠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진실은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서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이들, 신앙의 연수가 늘어나도 인간다움의 깊이가 1mm도 깊어지지 못하는 이들, 고난주간과 성금요일을 지나며 뭔가 감상적 기분에 젖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아 당혹감을 느끼는 이들, 그렇다면 부활절에 기쁨의 환희가 생기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이들, 십자가 목걸이는 하고 다니지만 십자가라는 끔찍한 처형 방식이 왜 기독교의 시그니처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깊어지지 못하는 이들, 십자가 설교가 있는 날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더더욱) 설교 내용이 뻔히 여겨져 지루해지는 이들까지.

이런저런 선입견과 익숙함으로 너덜너덜해진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할 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어야 할까. 아니, 나는 왜 아직도 교회에 다니고 있을까. 그것은 특정 교회 문화에 다른 누구처럼 실망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류 역사의 전환점"(35쪽)이자 "기독교 신앙 한가운데 자리한"(199쪽)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번 알고 그친 게 아니라 달란트 시장이 열리던 유년 시절 그 예배당에서부터 계좌 이체로 헌금을 내는 오늘 코로나 시국의 온라인 예배에서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정말? 교회 문화에 대한 실망과 친숙함보다 십자가가 더 크게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응. 정말. 혹시 그 비밀을 알고 싶은 당신이라면 얼마 전 출간된 플레밍 러틀리지의 <예수가 선택한 길 - 십자가의 죽음부터 부활의 기쁨까지>(비아토르)이 찰떡이다. 러틀리지가 1976년부터 2001년까지 26년간 고난주간~성령강림절 기간에 미국 전역을 돌며 다양한 회중 앞에서 행한 설교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너무 가까워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당신 곁의 십자가를 히말라야 어디쯤으로 올려 보내 줄 충실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예수가 선택한 길 - 십자가 죽음부터 부활의 기쁨까지> /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 류호영 옮김 / 비아토르 펴냄 / 476쪽 / 2만 1000원
<예수가 선택한 길 - 십자가 죽음부터 부활의 기쁨까지> /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 류호영 옮김 / 비아토르 펴냄 / 476쪽 / 2만 1000원
담백하게 본질을 꿰뚫는 '설교'라는 말의 세계

종려주일에서 부활 절기까지 행한 마흔한 편의 설교가 담긴 이 책은 쉽고 간결한 언어로 채워져 있다. 십자가라는 익숙한 주제에 쉬운 언어라니, 우리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는 전혀 없다. 다만 예수 죽음의 의미와 인간 본성의 야만성에 관한 담백한 직시가 있을 뿐. 그 간결한 언어를 따라 천천히 설교를 읽어 나가다 보면 영혼이 차차 젖어 들어감을 느낄 수 있을 터. 묵은 때로 얼룩지고 먼지가 자욱한 내면이 물걸레질되고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상처와 고통의 실체가 떠오른다. 정직한 설교는 이토록 힘이 세다.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는 종려 주일 설교, 내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힘 있게 드러내는 고난주간 설교, 예수의 승리가 인류와 세계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 금빛 미래를 보여주는 빛나는 부활절 설교, 주님의 부활 이후 새 세계의 질서를 일상에서 살아 내도록 격려하는 부활 절기 설교까지. 각 설교를 통해 건네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질문 혹은 선포가 하나씩 가슴에 새겨지는데.

“점령군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는 분이 있다면, 나약함과 부패함 탓에 건강과 행복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아는 분이 있다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때때로 느끼는 분이 있다면, 인자는 바로 여러분을 위해 오신 겁니다." (고난주간, 79쪽)

"예수의 눈빛은 심판하는 동시에 회복하고 재건하고 교정하는 눈빛입니다." (세족 목요일, 141쪽)

"예수의 슬픔과 같은 슬픔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무엇을 견디셔야 했는지 깨닫기 전에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 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성금요일, 193쪽)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씻기고, 모든 악은 영원히 진멸되고, 사탄과 그의 하수인들은 멸망하고 우리가 사랑하던 자들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고, 인류사의 모든 불의와 부정은 바로잡힐 겁니다." (부활주일, 320쪽)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로 이어지는 리듬의 목적은 딱 하나뿐입니다. 유일하게 영속적인 것, 유일하게 계속 머무는 금빛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 주간, 376쪽)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고,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철저하게 실패해도 예수께서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 절기, 396쪽)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에 속해 있다가, 내 발을 씻기는 예수를 부인한 밤을 건너 그의 꿰뚫는 눈빛 앞에서 내 가면이 벗겨졌다가, 비인간화를 겪으며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던 내 삶의 순간과 하나 되신 그분을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으로 값을 치루고 악을 진멸해 인류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여신 일 앞에 기뻐하며 영원한 금빛 아래 믿음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하다가, 가상의 공간이 아닌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인류 공동체 안에 십자가가 이룬 승리의 삶을 수놓고자 결단하는 여정. "사람은 변하지 않아"라는 불신의 세계 위에 끝내 십자가 안에서 누군가를 계속 믿고 섬기려는 발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그런 여정. 마흔한 편의 설교 읽기는 그런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다시, 나는 왜 교회에 다니고 있나

그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이런 확신이 든다.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선과 악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내 길을 제시하는 복음. 이것이 기독교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복음과 일반 종교를 구별 짓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을 재는 가장 내밀한 기준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절도 없었겠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기독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은 메시아의 마지막, 그리스도가 당한 수난의 불경스럽고 사악한 측면, 예수가 당한 죽음의 비인간적이고 극악한 성질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으면, 예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뭐가 다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202쪽)

십자가를 중심에 둔 기독교는 단지 교회 문화를 어느 시기에 접한 것으로 다 퉁칠 수 없도록 광대하고, 설사 지금 매주 교회에 다니고 있다 해도 다 커버할 수 없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매해 깊어진다면 우리는 누군가들처럼 과거 교회 출석 이력으로 기독교를 아는 체하는 자리로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져 매일 '오늘'의 신자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 우리를 안내할 충실하고 친절한 설교자, 러틀리지가 지금 우리 곁에 왔으니 더더욱.

러틀리지를 다리 삼아 오코너로

러틀리지는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한 은유로 드러내기 위해 명화와 문학을 끌어다 썼다. 로비스 코린트의 끔찍하고 잔인한 그림 '순교'를 통해 "변덕스러운 사망의 권세가 내뿜는 광기에 휩쓸려 살아"(51쪽)가는 타락한 인간성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예수께서 희생 제물 되셔서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이기신 장면을 설명하며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악이 점령한 영토에서 은혜가 작용하는 것, 이것이 내가 쓰는 소설의 주제입니다"라는 말을 인용해 독자의 문학적 감수성을 타고 진리를 이해시킨다. 남부 고딕 스타일의 그로테스크한 소설을 쓴 오코너를 "체제를 전복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주제로 삼은" 작가로 소개하며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도 인상적.

십자가가 바꾸어 놓은 인간과 세계의 안쪽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로 넘어가는 것은 이 책에 숨겨진 또 다른 은유에 응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소설 속 인물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기괴한 사건들을 펼쳐 보이는 오코너의 소설 세계는 러틀리지가 그토록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 인간 본성의 밑바닥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신적 계시의 순간을 포착해 내므로. 성주간에 <예수가 선택한 길>를 읽고 고양된 십자가 이해를 메마른 현실 세계에 접목시키려는 데 이만한 소설이 없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기도 일기>(IVP)를 입문서 삼아 젊은 시절 오코너의 영적 세계를 먼저 엿보고 소설로 건너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

박혜은 / 책과 사람 잇는 일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 낮에는 책을 팔고 밤에는 책을 읽는 서점인.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운동·연구한 이력도 있음. 현재는 신앙이 현실에 얼마나 유효한지 실험 중.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