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의 첫 번째 책이자 정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창세기는 모세율법의 서론이며, 성경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구속사의 시작이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타락으로, 타락에서 구속으로, 마지막으로는 재창조로 나아가는 네 악장(창조-타락-구속-재창조)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처음의 두 악장을 간략하게 기술하여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기초를 놓아 준다. 아울러 세 번째 악장이 시작된다. 네 번째 악장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계 21~22장)의 주제인데, 이 두 장에 창조의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계 21:1, 5; 22:1-6).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과 조화롭고 놀라운 관계가 재건되게 되는 새로운 시작과 같다.

일반적으로 창세기는 신학적 플롯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에서 바벨탑까지(창세기 1~11장), 족장 이야기들(12~36장, 38장), 요셉 이야기(37, 39~50장). 창세기 1장과 2장 주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셨으며, 세상을 창조하시되 근동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선언을 하셨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창세기 3~11장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저지르는 죄와 반역을 강조해 주는 다섯 개의 이야기들(타락, 가인, 네피림, 홍수, 바벨탑)을 열거하고 있다. 각 이야기는 죄-(심판의) 말씀-완화(은혜)-심판이라는 문학적 구조를 통해, 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만연되고 죄에 대한 심판 역시 증가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신다는 주제를 드러낸다. 그래서 최초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창 3장)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할 뿐 아니라 구원의 복음에 대한 최초의 선포로서의 원시 복음(창 3:14-15)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의 창조 기록은 종말론적 회복 신앙으로, 타락 기록은 구속사의 시작점으로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연결된다.

창세기가 처음 기록된 때와 그것을 읽는 우리 사이에는 수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 저자들과 문화적인 맥락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는 희로애락의 인간사와 인간 됨의 보편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과 우리는 아주 큰 차이점을 가진 동시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을 함께 공유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공유 가능한 경험들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사용했던 문학적인 장르에 대한 이해로 어느 정도나 바꿀 수 있을까? 그들과 우리가 소유한 지식의 간극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우리 문화에도 창세기 1~11장과 비슷한 장르가 존재할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장르의 글일까? 또 창세기 1~11장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역사인가? 허구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장르에 대한 이해는 개별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연구가 지난 2000여 년 동안 줄곧 진행되어왔음에도, 이 물음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창세기 원역사 논쟁 -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한 세 가지 견해>(새물결플러스)는 이 논쟁적인 문제들을 상세히 탐구하고, 성경을 읽는 개인과 성도 모두 이 논쟁의 주된 화제에 주목하여 더 많은 지식을 얻도록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창세기 1~11장의 장르와 역사성, 그에 따른 성경 해석상 의미에 대하여 제임스 호프마이어, 고든 웬함, 켄톤 스팍스 세 명의 성경학자가 작성한 짤막한 각자의 논문과 서로에 대한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원역사 논쟁 -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제임스 호프마이어, 고든 웬함, 켄톤 스팍스 지음 / 찰스 할톤, 스탠리 건드리 엮음 / 주현규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80쪽 / 1만 6000원
<창세기 원역사 논쟁 -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제임스 호프마이어, 고든 웬함, 켄톤 스팍스 지음 / 찰스 할톤, 스탠리 건드리 엮음 / 주현규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80쪽 / 1만 6000원

먼저 제임스 호프마이어는 그의 논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내러티브가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및 실제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창세기의 지리학적 단서들과 문학적인 요소들, 그리고 역사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여러 특징을 지목한다.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신화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정반대 관점으로 기록되었다는 이해를 기초로 성경의 신학적인 담론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스라엘 서기관들은 권위가 있고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당대의 오해들과 신화들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호프마이어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매우 단호하다.

"만일 누구든지 창세기 1~11장을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허구적인 이야기나 신화로 축소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구속사는 존재의 이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든 웬함은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기저에 창세기 1~11장을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데 주저하게 만드는 암류(undercurrent)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창세기를 원형적인 역사로 믿는 호프마이어 주장에 동의하지만, 그것을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를 통해 실제로 발생했던 일들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창세기가 원형적인 역사이며,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위해 역사를 해석해 놓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창세기 1~11장의 메시지를 되찾는 것이 그 장르를 결정하고 정의를 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중략) 창세기 1~11장이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를 결정하고 그 정의를 확실히 하는 것은 해당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데 어느 정도 명료성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그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제언한다.

켄톤 스팍스는 창세기의 저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문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은 창세기 내러티브가 기술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스팍스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역사 문헌 편찬을 위해 널리 사용되던 문학적인 양식들을 채택했지만, 특정 장소와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간주한다. 단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하기 위해서 성경 저자들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학적인 이야기들을 차용해서 문학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1~11장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오늘날 역사적인 사실들과 현대 과학적인 결과물들이 결코 지지해 줄 수 없는 고대의 장르적 전통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이런 한계점을 직접 다뤄 보아야, 지극히 초라한 수단으로 주어졌던 성경을 더욱 삼가는 마음으로 마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면, 고대의 저자들이 성경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들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정확한 역사적 재구성이나 과학적인 결과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시고 간섭하심을 통해서, 즉 참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창세기 1~11장을 사려 깊게 들여본다면, 창세기 1~11장은 우리에게 다름 아닌 그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창세기 1~11장이 역사적 기록인지, 아니면 문학적 양식인지에 관한 물음은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자 마음먹은 독자들에게는 무척 골치 아픈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최첨단 과학 시대의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물들과 수천 년 동안 신앙 공동체 형성의 근간이 되어 온 성경상 담론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문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인 문제로 확장된다. 실제로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동일한 교리를 표방하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이라 할지라도, 창세기 1~11장에 대해서 반드시 한 가지의 동일한 이해와 해석만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러한 논쟁과 불일치가 전문 신학 지식이 없는 일반 교인들을 자칫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걱정스러운 시선도 있다. 하지만 건전한 신앙생활과 신학적 토대는 토론과 논쟁의 과정을 통해 입증되고 또 더 견고해질 수 있다. 이 책에서 세 학자가 서로의 불일치에 대한 진지한 논평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른 '읽기' 행위는 저자를 이해하는 것만큼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을 동반한다. 이는 '보는 것'과 '보기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성경 이해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 저자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초기 교회 시대에 믿음의 선조들과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 1~11장을 읽지 못하고 또한 읽지 않는다. 초기 교회 시절 성경 해석가들은 창세기 1~11장이 실제 역사를 반영했는지 안 했는지 문제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성경이 사실이라고만 생각했으며, 성경을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패러다임 대신에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범주로 다뤘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현대 독자들이 성경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읽으려 한다거나, 장르에 관한 질문을 갖거나,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원시 역사가 과학자들 또는 역사학자들이 재구성한 역사와 조화를 이루는지 따져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역사적인 연구법과 과학적 지식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또 다른 질문과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할 것이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도 그렇게 계속 바뀌어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통찰력과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다시 탐색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은, 어떤 형태로든지 기독교 신앙이 지성적인 일관성과 설득력을 지탱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북인더갭) 저자 엘리자베스 존슨은 이에 대해 "기독교 신앙이 모든 세대에 호소력 있게 다가가려면 당대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방식들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장르와 역사성이라는 주제는 창세기를 연구하는 이 시대 교회에 속한 많은 이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이 사안들이 기독교의 하나 됨을 저해하는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 그래서 창세기 1~11장과 관련해서 직면하게 되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공유하는 한마음으로 의견을 모으고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창세기 1~11장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실제로 원시 역사 시대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또한 묘사된 그대로 발생했든지 아니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창세기 1~11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기독교인이 뿌리를 내리고 흠모하며 닮아 가고자 염원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중략) 사실 초기 교회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에 대해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상이한 관점과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조성하고자 하신 것은 자애로운 사랑이지 정확함을 기초로 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지에 대한 열망은 자주 그것이 필요한 목적을 잃게 하곤 한다. 창세기 첫 부분에 대한 현대 지성의 탐구적 열정은 그것이 진정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제한된 지식으로 대립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닌 꾸준한 한계 인식과 겸손이 탐구의 방향이어야 하며, 이는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그리스도 안으로 더 많은 연합을 이끄는 행위이어야 한다.

오래전부터 창세기 1장을 펼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데 7일이나 필요한지 의문이 들었다. 순식간의 찰나에 창조하실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역설적으로 긴 시간인 7일간의 창조 이야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지성이 등장하더라도 7일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담겨 있는 스스로 낮추시는 하나님의 사랑 원리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한계이다.

창세기 논쟁은 평행한 불일치 속에서도 안으로는 우리 사이의 인식 차이를 극복해 가는 사랑과 연합의 과정이 되어야 하며, 밖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당대 세계관에 부합하는 지성적인 일관성과 설득력을 지탱하기 위해서 탐색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이 책의 결론적 제언에 깊이 공감하며 이 책을 권한다.

박우민 / 신경외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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