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월), 우리 사회의 두 가지 예민한 현안들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하나는 세종시의 수정안에 대한 정부 발표가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논란이 되었던  사랑의교회 재건축과 관련 해당 교회 공동의회 결과에 대한 비공식적 발표였다. 두 가지 발표의 공통점은 온갖 비난 속에서도 현재 사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절차라는 의도가 충분히 담겨진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세종시에 대한 정부 발표안은 일단 정치적인 공방이 계속되고 있으며 수정안에 대한 국회 통과 절차가 아직 남아 있다.

한편 자체 뉴스 매체인 <E-News 우리>에 따른 사랑의교회 측 발표에 근거해 추정해 보면, 총 유효 투표 수 20,407명 중 1,138명이 반대하고, 19,224명이 찬성했다. (평균 94.2%의 찬성율) 보도에 따르면, 투표 방식은 주일예배와 예배 사이 모두 5번에 걸쳐 공정한 투표를 위해 다른 색상의 투표용지를 사용하여  <1호 안건. 부지 매입 담보 제공 및 은행 차입 추인의 건>과 <2호 안건. 향후 건축 활동 당회 위임 건>에 찬반 표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계속해서 이 뉴스는 이날 투표에서 각 항목에 대해 '94.7%와 94.5%의 찬성률을 얻었고, 평균 94.2%의 찬성률'로 최종 집계되었다고 전했다.

교회 절차상으로 오는 17일(주일) 공식적인 발표를 남겨 두고 있긴 하지만, 이로써 그동안 강력한 비판에 부딪혔던 교회 재건축 문제는 교회 내 인준 절차를 마친 셈이 되었고, 재건축 과정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앞서 일부 단체들은 공동의회 진행 방식에 대한 우려와 유감을 표명하며 공정한 회의를 기대하는 의견을 교회 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결과에 대해 비판적 여론이 더욱 거세질 여지를 남겨 놓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이야기들이 기독교인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민수기 11장,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된 세 가지 이야기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1년 동안 시내산에 머물렀다가 다시 출발하는 시점과 연결되어 있다. 앞서 모세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백성들을 각 지파대로 계수하고, 대열을 갖추어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행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이들이 광야에 머물러서 한 일의 중심에는 '성경공부를 통한 훈련'이 있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시작된 이 공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모두에게 전달하여 나누고, 다시 확인하는 훈련의 시간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대열을 정비하고, 거대 진영을 갖춘 뒤, 시내산을 출발한 직후에 불거졌다. 민수기 11장은 이 시기에 있었던 세 가지 문제를 적고 있다. 아마도 이것들이 가나안 행진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1-3절의 디베라 사건이다. 여행 중 백성들의 원망과 아쉬움에 대해 하나님이 불로 그들의 진영 한 끝에 불을 붙이신 사건이다. 여기서 원망은 '악'의 그들이 무슨 원망을 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둘째는 4-30절의 백성들의 울음 사건이다. 이 울음 사건의 발단은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사람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셋째는 31-35절로 메추라기 사건이다. 사람들이 메추라기에 대해 너무 많은 욕심을 내는 바람에 하나님이 진노하신 사건이다.

이 단락들을 차례로 읽어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1절, 10절, 33절 등)라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성경을 공부하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징계, 벌을 내리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단락들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세밀하고 주도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 속에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바로 11장 4-30절에 나오는 70인 동역자와 메추라기 이야기다.

자기를 위한, 정당하지만 변절된 탐욕

문제의 발단은 4절부터 9절에 들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4절의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 전체가 '탐욕'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맥에 따르면 이 탐욕은 '자기 자신을 위한 간절하지만 변절된 소망'이다.

이 문제가 일어난 배경은 이렇다. (5-9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1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먹거리를 해결했다. 하지만 겨우 만족스러울 뿐 최상의 것은 아니었다. 늘 불편했고, 뭔가 새로운 대안이 절실한 불완전한 상황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 대견할 만큼 참고 견뎌 왔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한 어떤 사람들이 그것은 '불편한 일'이고, 더 '풍요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치근댄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탐욕'의 핵심이다. 그것은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를 그리워한다.

그러던 차에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지난 1년간 너무나 섭섭하고 애달픈 생활을 했다는 것이 떠올라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모를 때는 괜찮았는데, 이 '섞여 사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고기 문제를 채근한 것이 그들의 감정선을 자극한 것이다. 순간 애굽 사람들이 누리는 맛난 음식들이 떠오르고, 자신들도 그 시절이 그리웠다. 그것을 누리며 지내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좋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지난 세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공부하면서 먹었던 '만나'가 어려운 광야 생활의 풍요로운 양식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애굽의 고기에 비할 때'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영에 머무는 동안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지도자 모세, 그의 진퇴양난

본문의 이야기는 10절-15절에서 잠시 멈춰야 한다. 그곳에는 그 울음소리를 들었던 모세의 태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백성의 지도자였고, 60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있는 모세는 과연 이 순간에 어떤 태도를 보여 주는가? 뜻밖에도 모세는 이 일에 대해 울분을 표현한다. 그러나 모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더 중요한 이유는 백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마도 모세 역시 백성들과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에게 동조할 수 없었다. 이유는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해 너무 크게 진노하셨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화'를 최상급으로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어 '메오드'의 사용) 이것이야말로 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장 불편한 상황과 그것을 위한 그들의 간절한 대안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눈에 악으로 보인 것. 이것이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솔직한 반응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10절의 '최고의 하나님의 진노'라는 반응에 대해 모세는 백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소연(11-15절)을 쏟아 놓는다. 그 역시 백성들의 태도와 요구가 내키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극도의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의 항변은 '왜 자신이 백성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는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해 항변한다. '이 많은 사람들을 이끌게 했으면 문제 없이 평안하게 이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모세의 항변은 성경에서 아주 씁쓸한 장면이다. 모세를 통해 보건데 사람들은 지난 1년간 모세 자신을 통해 배웠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 더 풍성한 먹거리와 행복해 보였던 지난 시절로 다시 삶의 방향이 틀어져 버린 것에 대한 무기력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모세의 외침은 아주 좋지 않은 목회자의 사례가 될 만큼 목회자로서 나쁜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인 백성들을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하듯이 품에 품고 가나안까지 가라는 말씀이 전혀 반갑지 않다. 모세의 마지막 항변은 죽음으로써 이 고통에서 건져 달라는 것이다. 그는 혼자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항변한다.

하나님의 의도적 대안, 그 진정한 의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동은 무엇인가? 16절부터 23절의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이 보여 주신 행동은 두 가지 이야기로 소개된다. 먼저 혼자 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모세를 위해 70명의 사람을 뽑아 회막 안에 함께 서라는 '동역자 대안'을 제시한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게는 내일 고기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동안 계속 먹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에 대해 합리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62만 명에게 과연 한 달 동안 고기를 먹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처럼 거대한 양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세가 이처럼 냉철하게 되물었지만 하나님의 의지는 강력했다. 그것은 모세와 백성들의 항변에 대한 하나님의 세밀하고 구체적이며 의도적인 답변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진노'의 마음으로 이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과 연관된 정황에서 모세는 곧 든든한 '70인의 동역자'라는 좋은 환경을 얻을 것이며, 백성들은 '풍성한 양식'을 먹을 것이다. 24-30절은 이 두 가지 일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자세히 보도해 준다.

첫 번째 의도적인 대안은 70인의 동역자가 세워지는 장면이다. (24-30절)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처럼 70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은 장막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놀랍게도 장막 안에 있던 70명은 요즘 말로 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모세와 70인의 지도자는 한마음이 되었다.

한편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장막으로 오라는 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고 무슨 이유인지 그들의 진영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이 일에 대해 시중을 들던 여호수아가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모세가 꾸짖으며 말한다. '네가 지금 나를 시기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까지였다.

두 번째 의도적인 대안은 31절부터 35절까지다. 이 부분은 정말로 천천히 진지하게 읽어야 할 것이다. 본문은 이렇다.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든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은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행진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개역개정판, 민 11장 31-35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람'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욕심을 낸 백성'이라는 표현 등이다. 바람은 바로 앞에서 70명에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라고 할 때의 '영'(루아흐)과 같은 단어이다. 이 바람은 하나님이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바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막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진영으로부터도 하룻길이나 떨어진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인도된 이 장소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며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들은 그렇게 원하던 먹거리가 풍성한 곳으로 갔지만, 그곳은 그들의 죽음의 장소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한 정당한 요구를 한 사람들', 즉 먹거리 때문에 눈물로 호소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적게 거둔 사람이라도 열 호멜(1호멜=약222리터, 1리터=1kg으로 환산) 이상의 메추라기를 거둬들이고, 그것을 진 사면에 널어 놓아 풍성한 고기로 삼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탐욕'에 대하여 위로의 응답이 아닌 진노로 답하였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하나님의 응답

이 이야기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영'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모세와 70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을 회막으로 모을 때, 거기에는 삶(生)이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님의 바람이 그들에게 불어왔다. 그것 역시 하나님에 의한 ‘바람’이지만 사람들을 ‘광풍’처럼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탐욕’의 자리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희망했던 메추라기 더미 속에서, 회막 바깥 진영에서 죽음으로 내몰렸다(死). 그들이 그렇게 원하던 '풍요로운 양식'과 함께.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하는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냉철한 의도는 그들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기억하게 한다. 신명기 8장에 따르면 모세는 이 날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하며 설교한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개역개정판 신 8:3)

먼 훗날 예수님은 더욱 더 간절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마 4:4) 애굽의 고기는 더 이상 우리의 양식이 아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그 메추라기는 한 번은 삶(生)의 양식으로, 또 한 번은 죽음(死)의 양식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삶의 양식으로는 그들이 광야를 지나가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도록, 죽음의 양식으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탐욕'을 감춘 채 하나님에게 양식을 요구할 때 주어졌다.

여기, 힘들고 어려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을 향해 가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메추라기를 강력히 원한다. 그리고 놀랍고 풍요로운 메추라기가 주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며, 누구이든간에 하나님은 그 메추라기를 통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들이 자신만을 위한 탐욕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찔러 쪼개는' 권능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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