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성경의 원리 上·中·下>, <요한계시록 신해> 4권이 30년 만에 개정 출판됐다. 이 글은 그 가운데 <성경의 원리 上>을 중심으로 다룬다.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上>은 우리나라 전통 종교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바탕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독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통 종교들 입장에서 다소 불만족스러울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 이 정도로 개방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전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주목할 것은 선악 나무를 분별지로 이해하는 부분이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을 분별지로 이야기하면서, 거짓 지혜라고 규정한다.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라고 하면서, 선과 악, 미와 추, 진과 위 등의 상대 개념을 비판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거짓 지혜'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거짓'과 '참'을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내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선을 알려면 상대적인 선을 내쳐야 한다는 것이지, 선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변찬린은 '거짓 지혜'가 '교만'과 연결된다고 본다. 인간은 교만해질 때 참된 지혜에서 멀어진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상대적인 앎은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하는 순간, 그 사람은 현실 인식과 동떨어져서 거짓 지혜로 살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분별지'를 그렇게 경계하는 것도,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할 때 진실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무아無我'를 이야기하는 것도 '나'를 내세우는 게 어리석기 때문이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최근 출간된 4권의 책. 사진 제공 류제동

예수와 석가모니
- 신통력의 차연(differance)적 대화 시도

또한 변찬린은 예수의 여섯 가지 도통을 이야기하면서 불교의 신통력들을 대입한다. 그는 여기에서도 "최면술과 독심술讀心術을 하는 사이비 종교인들과 영통을 한다는 적그리스도들은 환시를 보거나 환청을 듣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을 최면 상태에 이르게 해 주체성을 잃게 하거나, 궁예의 관심법처럼 남의 마음을 읽어 낸다고 하는 자들은 사이비 종교인이라는 그의 비판이 당차다. 참된 종교는 다른 사람 마음을 통제하거나 조종하거나 장악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말처럼,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참된 종교인의 자세인 것이다.

예수의 천안통天眼通은 환시幻視를 본 것과 차원이 다르다. '위 없는 하늘'을 개천開天한 것이 예수의 천안통이다. '위 없는 하늘'이란, 인간의 인식 범위를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나 초월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통찰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앎의 범위 안에 넣으려는 교만의 유혹을 받는다. 선악 나무의 유혹이라고도 하겠다. '위'가 없는 하늘은 '위'를 우리 교만한 마음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불교의 깨달음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한없이 진리 앞에 겸손하게 하는 깨달음이다. 이 점을 변찬린은 간명하게 제시한다.

예수의 천이통天耳通 역시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은 후 귀머거리가 되는 모습과 대조된다. 불교식 용어로 말하자면, 아담은 인간의 알량한 지혜를 상징하는 '뱀'에 의해 '알음알이'의 유혹에 빠져 참된 지혜에는 귀가 멀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지혜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 천이통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예수의 신족통神足通 역시 바다에 빠지는 타락과 대조된다. 보통 사람들은 물과 땅을 구분하는 분별지에 빠져 있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못한다. 그러나 깨달은 이는 물이 물이라는, 땅이 땅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물을 땅처럼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은 이들은 상식의 꽉 막힌 알음알이를 벗어난 이들이다.

예수의 타심통他心通 역시 남의 마음을 훔쳐보는 천리안千里眼과 구별된다. 사람의 죄의 심연을 그윽히 주시하는 타심통은 남을 통제하고 장악하고 조종하려는 천박한 마음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이다.

예수의 숙명통宿命通 역시 점쟁이들의 복서卜筮와 대조된다. 여기에서는 "수가촌 여인의 지난날의 비밀을 알았고 세례 요한의 전생이 엘리야였음을 알았다"고 해서, 성경 내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표면적으로만 보면 점쟁이들의 복서와 무엇이 다른가 의문시할 수 있다. 그러나 수가촌 여인 비밀이나 세례 요한 전생이 엘리야였다는 것이나 모두 단순히 그러한 사실을 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 세례 요한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지혜에 의한 통찰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단순히 전생의 사실에 대한 지식은 점쟁이들의 복서일 따름이다.

예수의 누진통漏盡通 역시 '호지 않은 하늘의 옷天衣無縫' 개념으로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옷은 호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상식적인 앎은 여러 분별로 차별을 일삼기 마련이다. 예수의 누진통은 그러한 인간의 분별을 넘어서 있다. 불교에서 누진통은 누, 곧 번뇌가 다하는 경지이다. 번뇌는 인간의 잘못된 사량 분별思量分別에 말미암는 고통스러운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의 극복은 무명無明, 곧 잘못된 분별을 넘어서는 참된 지혜에서 비롯된다. 그 점을 변찬린은 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변찬린은 예수가 "모든 무명을 뚫고 올라와 성도하였다"라고 밝힌다. 성령의 강림은 무명의 극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계 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 간 대화의 새로운 지평 제시

이러한 변찬린의 이해에서 '위 없는 하늘'은 다층일 수밖에 없다. 종교를 원시인의 종교와 고등 종교로 나누는 것이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거북할 수도 있겠으나, 혹세무민하는 종교들이 창궐하는 현실에서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참과 거짓 자체를 상대적 개념으로 폄하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된 지혜를 찾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경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고도의 문명인이라 자부하며 일급 교양을 지녔다고 교만하는 현대인들'을 향한 변찬린의 비판도 경청해야 한다. 지식이 높다고 교만에 쩔어 있는 이들이 현대의 최고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부지기수다.

여기에서 물론 "예수는 <생명 그 자체>이시므로 그와의 만남은 생명과를 따 먹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은 천사가 전해 준 진리이므로 닦아 올라가는 계명과 율법의 종교였던 것이다"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는 '예수' 이외의 종교들에 대한 폄하가 문제가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을 너무 간단하게 이해하면 곤란하다. '다른'은 구체적인 종교들로서, 불교나 유교나 도교 등을 싸잡아서 비판한다기보다는, '예수'의 깨달음과 질적으로 다른 종교들, 앞에서 예를 들면 원시인 종교 수준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종교학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거론하기는 하지만, 모든 종교를 같은 수준에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혹세무민하는 종교가 많고, 예수를 이야기하는 기독교 내에도 참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혹세무민하면서 건물 종교에 매달리는 거짓 성직자들이 수도 없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예수'를 입에 달고 있지만 '다른 종교'들에 속한 사람들인 것이다.

요컨대 변찬린의 성경 이해는 불교 연구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교를 웬만한 불교 연구자들보다도 인격적으로 심층적인 차원에서 이해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탁월한 성과라고 하겠다. 그 자신이 경계하기도 했지만, 그의 저서에 대한 문자적 독해가 아닌 심층적이고 상징적인 독해가 확산되기를 바란다.

류제동 / 비교종교학자이자 불교학자.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2004년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이다. 종교다원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대화에 대해 깊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주요 연구 성과로 <하느님과 일심: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종교학과 대승기신론의 만남>(한국학술정보),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공저, 가나출판사)와 <하쿠인白隱 선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 체험적 삶에 대한 시론적 비교 - 무에의 추구를 중심으로>(<불교학보> 64호) 등이 있다.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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