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종교의 현실 논파하고
신앙과 신학의 해방적 담론 제시하다

종교는 유독 정통과 비정통을 나누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정통은 뭐고 비정통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의 권력과 기준으로 정통과 비정통을 가르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기존의 기득권의 종교는 신흥종교들을 아예 이단, 혹은 사이비라도 규정하면서 매도하고 나선다. 종교적 경험에서 신에 대한 경험을 독점하거나 그 공통적인 체험을 하나의 이론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으로 통한다.

다시 말해, 종교적 경험(종교 경험이 아닌 종교를 통한 초월자에 대한 경험 일반)을 특별한 개인과 종단에 국한해서 범주화한다면 폭력이나 다름이 없다. 종교에서 드러난 신에 대한 체험이 어떻게 획일화할 수 있으며, 단일한 이론으로 확정할 수 있겠는가.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의 이질성의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가 매우 많았지만, 언어적 묘사의 한계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은 잘 아는 바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겸허할 수밖에 없고, 초월자에 대한 묘사도 신중하면서 절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변찬린이라는 한 인물을 조명하고, 그의 신앙과 신학을 평가하는 일은 사뭇 조심스럽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의 역사 안에서 주어진 그의 시공간적 한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의 종교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그의 독특한 신앙 이력 덕분에 호불호가 나뉘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 이호재 교수가 약 800쪽에 가까운 글로 변찬린이라는 인물의 종교 사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 점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밝 변찬린 - 한국 종교 사상가> / 이호재 지음 / 문사철 펴냄 / 792쪽 / 3만 3,000원

치기 어린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이력을 내세워, 변찬린을 앞세우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제도 종교, 전통 종교의 범주 밖에서, 그의 종교 사상을 통해서 종교의 혁명을 기획하고자 한 하나의 학문적 시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변찬린은 정통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본다면, 수긍이 안 되는 성서해석학적 견해를 통해 알레고리적 의미를 도출해 내고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서구 유럽의 해석학, 영미권의 해석학을 적극 수용하기보다 독창적 성서 해석으로 종교계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려 하였기 때문에, 종래의 동일한 해석학적 궤적을 밟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연유로 그 낯섦이 곧바로 "이단이다", "사이비다"라고 매도하기에는, 흥미로운 주장과 논리 그리고 신앙 실천을 나았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당대의 훌륭한 종교 사상가요 실천가인 다석 유영모나 함석헌과도 교류하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적 소양도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논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 종교계, 특히 그리스도교 일각에서는 변찬린의 존재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개신교에서는 그의 성서해석학적 식견과 방법을 대거 수용하고 따랐던 사목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급을 회피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변찬린이 갖고 있는 이단 시비 문제와 종교적 여로에서 잠시 조우했던 통일교와의 인연(분명한 것은 나중에 결별했다는 점인데, 이것이 그의 종교 사상의 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사상적 매력을 폄하하는 꼴이 된다)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를 거론하자면, 사목자 자신이 변찬린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류라는 점을 애써 감추고 싶어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그를 단순히 그리스도교에 국한한다는 것은 한 종교 사상가에 대한 또 다른 폄훼를 가져올 수 있다. 저자 이호재 교수가 논하고 있듯이, 그는 선각자와 같은 맥락에서 유불도를 넘나 들며 성서를 해석하고 있고, 게다가 성서가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을 넘어서 초종교성을 갖고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그를 단순히 그리스도교라는 특정 종교에 한정 지어서 이단 시비 거리로 삼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성서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초종교성을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서나 그리스도교를 범인류의 경전과 인류의 종교로 격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만큼 성서나 그리스도교가 어느 특정한 종교에 매여 있는 소승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변찬린을 잘 모르는 학자나 신앙인이 있다면, 함부로 재단할 일이 아니다.

변찬린의 공과와 한국 종교의 과제

변찬린의 종교 사상 중에 독특한 점이 있다면 먼저 성서해석학의 독창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분류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해석학은 크게 7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언어·상징·재현 해석 △풍류 해석 △유기체 해석 △화쟁 해석 △실존적 암호 해석 △관조 해석 △도맥 해석이다. 아마도 일반적인 서구 신학의 해석학에 익숙한 신학자들은 그의 해석학에 난색을 표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럽 신학계에서 파생한 역사비평학과 기호학적 성서 해석이나 영미 신학계에서 발생한 독자반응비평, 수사학적 비평, 이야기비평은 전부 서구 신학의 산물이기에 한국 종교의 맥락과는 사뭇 유리된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변찬린의 비판적 해석학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을 하고 있다. 한국 및 동양의 시선에서, 전통적인 철학과 사상에서 배태된 해석학적 도구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서구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기에 실제로 전통적인 신학계의 교리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윤회론이라든가 야훼 천사론이라든가 하는 전혀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내거나 차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무리 해석학적 자유나 영성적 해석의 가능성이 언제든지 열려 있다고는 하나 변찬린의 해석학적 주석은 다소 과장이나 비약이 눈에 띈다. 어떠한 대학자나 영성가라도 흠이 없을 수는 없다. 그저 옥에 티라고 생각하고 선별하여 그 해석학적 도구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종래의 해석학에 한계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변찬린의 해석학을 눈여겨볼 만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면 결국 맹신에 빠지게 된다.

변찬린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던 바, 고착화된 해석학적 의미와 주석을 탈피하여 좀 더 유연한 신앙적 사유로 인도하고자 했다는 것에 정당한 종교학적·신학적 평가를 내리면 된다. 다만 서구 신학계의 해석학적 방법에 대한 의도적인 기피로 인해서 동양적·한국적 해석학을 시도, 강조함으로써 종래의 서구 신학계의 해석학적·주석학적 의미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유불도의 탁월한 식견을 통한 회통적 해석은 높이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한국 종교의 건물 신학, 건물 의존적 종교성이다. 예수가 당시 제자들에게 신앙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가시적 건물로서의 교회나 성당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현상을 보면, 건물의 맹신, 건물의 신성화, 건축을 통한 신앙 실증화 등이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불거진 건물 종교의 대표적 사례로서 한 대형 교회가 세습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은 건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고사하고 건물 자산의 유지, 건물 자본의 맹신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이미 하나님은 그와 같은 건물에서 떠났다. 아니, 애초부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건물의 자산과 자본을 잘 부풀리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왔던 한 욕망적 신적 존재와도 같은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변찬린은 이와 같은 현대 건물 종교, 건물 숭배에 대한 비신앙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궁극에는 교회당, 성당과 같은 가시적 성전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이 성전이 되는, 이른바 '인격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변찬린의 종교적 합리성은 바로 이와 같은 데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전통적 신학의 입장에서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논리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말하는 내용들과 주장들이 매우 성서적이다. 성서적이지 않은 종교에 대해서 성서적 정신에 입각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논증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종교적 선언과 전망들에 입각하여 본다면, 현재의 대부분의 종교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영성 생활을 한다. 이에 변찬린은 진정한 종교라면 인간의 유한적 시공간을 넘어선 영성우주를 지향하는 종교(인)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세속과 자본에 물들어서 더 이상의 자정 능력을 상실한 종교들이 제 모습을 찾고 적어도 비종교인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종교 본연의 초월성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한국의 다종교적 상황에서 종교와 종교 사이에 평화와 사랑, 배려와 환대, 상호 인정과 상호 배움이 사라지고 서로 반목·갈등·질타·폄훼 등을 조장하는 것은 여전히 종파·종단 운운하면서 정체성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변찬린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범주·구별·구분을 넘어서서 서로 화합하고 경계 짓기보다는 모두가 영성적으로 생활한다는 차원(저자는 영성 생활인이라고 표현)에서 공통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생활에서도 영성인으로, 영성이 곧 생활이 되는 삶이 진정으로 종교적 삶이고, 각 종교가 추구해야 하는 신앙적 자세가 아닐까 싶다. 바로 이것을 변찬린 자신이 구도자적 삶을 통하여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책을 손에 쥐는 순간, 묵직한 무게감과 부피감이 느껴질 것이다. 지레 놀라서 독서 의욕을 저하시키지 않을까 저어되기도 하지만, 넘기는 순간 술술 읽힐 것이다. 저자가 다년간에 걸쳐서 자료를 수집하고 변찬린에 대해 쏟은 애정이 묻어난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종교적 사유를 편견 없이 폭넓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다만 긴 호흡이 필요할 것이다.

김대식 / 종교학과 철학으로 각각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와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기독교미래교육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아나키즘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 해체 구성적 종교론, 종교공학, 환경과 기술철학, 종교 및 정치미학, 미래 종교·철학적 인간학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칸트철학과 타자 인식의 해석학>(모시는사람들),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서강대학교출판부), <그리스도교 감성학>(문사철), <아시아 평화 공동체>·<인문학적 상상력과 종교>(공저, 모시는사람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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