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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배제와 차별을 일삼는 이들을 향한 경고
  • 이상철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8.01 16:02

*6월 24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보완하였습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1.

오늘 하늘 뜻 제목은 미국 유니언신학교에 있는 폴 니터 교수의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비판하고 종교 간 대화, 이웃 종교와의 평화와 상생을 도모하는 폴 니터의 문제의식이 집약된 제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종교개혁 이후 벌어진 종교전쟁들, 각종 마녀사냥과 종교재판들, 서구 열강들이 제3세계를 향한 제국주의적 선교 과정에서 있었던 만행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구호였고, 교회의 폭력과 광기를 덮고 넘어가게끔 했던 면죄부 역할을 했던 것 역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구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장 12절 본문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구원의 배타성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전거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베드로의 이 말은 그리스도교 외의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으며,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는 말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물음이 제기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교를 모르고 죽었던 사람들, 지금도 예수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착하고 선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구원의 대상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

저는 지금 개신교인 의식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신앙 전반에 대한 설문을 실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 개신교인의 의식의 지도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2015년 인구센서스 결과 개신교인의 비율이 종교인 인구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습니다(960만). 하지만 출석률은 88.4%(2004년도)에서 76.7%(2017년도)로 12% 낮아졌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150~200만 가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개신교인들의 신앙관이 생각보다 근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1)'타 종교에서 진리가 있느냐'는 질문에 47%가 '그렇다'(23.9%,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고, (2) '타 종교의 가르침도 선한가'라는 질문에 58%가 '그렇다'(11.3%, 그렇지 않다), (3)'교회의 현실 참여를 지지하느냐'라는 질문에 48.5%가 '그렇다'(16%, 그렇지 않다), 즉 개신교인 50%가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고, 타 종교의 가르침도 선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통계를 근거로 한국 개신교의 성향이 다원주의(pluralism)까지는 아니지만, 배타주의(exclusivism)에서 포괄주의(inclusivism)로 옮겨 가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여전히 배타주의적 면모를 지우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4)'성서에도 오류가 있다'라는 질문에 20% 만이 '그렇다'(그렇지 않다 50.9%, 보류 29%), (5)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질문에 28.4%가 '그렇다'(그렇지 않다 45%, 보류 26%) 즉, 성서무오설과 구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한국 개신교의 과반이 확고하게 성서무오설과 구원의 배타성을 고수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학자는 과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교인 인구의 고령화로 인해 개신교인들은 한 세대 후 지금보다 2/3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고, 그때쯤 되면 더욱 종교다원주의적으로 흐를 것이다, 라는 예측을 합니다. 암튼 20~30년 내 한국교회는 커다란 격변을 맞을 것이고,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청년층 급감, 신학교 사양화 등).

3.

한백교회 교인들 같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적인 언어로 들립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이단 논쟁,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선교와 식민주의, 원주민 학살, 인종주의, 제국주의적 침략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수행된 침략과 학살, 타 종교 배제와 억압, 전통문화의 파괴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모토 아래 희생당한 모든 희생자에게 교회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라는 주님의 명령을 신뢰하며 세상으로 나가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주장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진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런 믿음과 고백으로 선교지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이름 모를 선교사 또한 많습니다.

시카고에서 4년마다 한 번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한인 선교사들이 모여 일주일 정도 묵으면서 선교 대회를 합니다. 우리나라 선교사가 1만 8000명쯤 된다고 해요. 미국이 2만 명이 넘는 선교 1위국인데, 대회 장소인 위튼칼리지 빌리그레이엄센터에 2000~3000명 되는 한인 선교사들이 옵니다. 저는 시카고에서 유학하는 동안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정말 수십 년 동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많은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어요. 그분들 앞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에서 발생했던 폭력들, 현재 선교사들이 저지르는 깃발 꽂고 예수의 이름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선교의 문제점들에 대해 제가 배운 것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신 있게 말 못 하겠더라고요. 제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이 또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구절은 해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서 안에는 진리에 대한 배타성과 다원성이 서로 모순적으로 각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상수리나무 옆에 제단을 쌓으면서 타 종교와 공생의 길을 간 전통이 있는가 하면(창 12:6-7),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간 사이에 금송아지로 우상을 섬긴 일이 발생하죠. 주께서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는 일이 발생합니다(창 32장). 즉 가나안이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모습이 성서에는 있고, 반면 그런 경향을 반대하는 전통이 성서에는 또한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구한말에 척화파와 개화파가 있었듯이, 성경이 쓰일 당시에도 이방의 종교를 포용하느냐 배척하느냐를 두고 성경 저자들 사이에 입장이 달랐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 우주의 주님으로 고백되었습니다. 인간 세계만이 아니라,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모든 것의 신이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엡 4:6). 이렇듯 우주적 하느님으로 그려지다가도 동시에 하느님은 땅 위의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당파적인 하나님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신 7:6).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시체를 너희가 섬기는 그 우상들의 시체 위에다 쌓아놓을 것이다. 나는 도저히 너희를 불쌍히 여길 수 없다"(레 26:30)고 말씀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은 다른 한편으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요 3:17) 말하는 그런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마치 옛날 마징가 제트에 나왔던 아수라 백작과도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신입니다. 아주 밀당을 잘하는 애인 같기도 한 하느님입니다. 무엇이 신의 진정한 모습일까요.

5.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증언,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해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임했고, 사도들의 말을 듣고 수천 명이 예수를 믿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한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와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는 일이 발생했고 다음 날 제자들을 향한 문책이 이어집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이런 일은 구체적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는 일'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유언비어 유포, 집시법, 사기 등등의 죄목으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가 말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행 4:9-10)."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1-12)."

베드로가 이 말을 한 후에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놀랐다고 적혀 있습니다(행 4:13). 왜 놀란 것일까요? 사람들이 나았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을까요.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 것 때문에 놀랐을까요. 하루 밤새 수천 명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에 놀랐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행 4:13)"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와 같았던 사람들, 세례 요한과 같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수처럼 귀신 들린 사람을 쫒아내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수처럼 병든 사람 고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가히 기적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적을 일으키고 무슨 요술을 부르는 것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근거로, 즉 어떤 이름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하느냐입니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을 가두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6.

제자들을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누구입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율법을 하찮게 여기면서 신성모독을 일삼았던 죄인입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도 능란한 언변과 기적을 행하면서 민심을 얻고 있는 예수가 골치 아픈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유대 지도자과 로마제국 앞잡이들의 음모, 조직되고 동원된 대중들의 광기 어린 선택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렇게 제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한과 베드로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더니 수천 명씩 예수의 메시지에 동의를 하고 있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제는 죽어 사라진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 자신들과 당당하게 맞짱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척 그들에게는 경악스러웠던 것이죠. 이것이 지금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라는 발언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2000년이 지난 후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구절에서 다른 종교의 구원의 유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런 의도도 없습니다. 내가 믿는 신, 내가 믿는 신을 향한 구도의 길을 따라가기도 힘겨운 마당에 다른 종교의 구원을 논할 오지랖을 펼칠 정도의 한가함과 여유가 제자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특별히 종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종교는 모두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다만 그 방식과 내용이 다를 뿐이지요. 이웃 종교의 구원 논의를 적대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들이 역사적 교회 안에서는 있어 왔고, 그 역사는 광기와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한국 개신교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예수 밖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이나, 그리스도교만이 갖는 구원의 배타적 독권을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부와 권력에 기대어 살아갔던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선동에 넘어가 동원된 대중에게 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구원은 율법에 대한 기계적이고 엄격한 준수에 의해 얻어지거나, 아니면 현실의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 황제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처형은 유대 율법과 로마제국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세력들과 예수와 단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민중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환호했습니다.

7.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도망가거나 회피했던 추종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모든 억압되었던 것은 귀환하기 마련입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울부짖고 있었을 때 내가 뭘하고 있었던 거지.' 이것이 바로 그들이 던졌던 왜상적 기억의 내용입니다. 어쩌면 성령강림 사건은 억압된 트라우마를 지우고 현실로 귀환하게 하여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들은 변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다양한 민중적 메시아 운동들 통하여, 유대-로마 전쟁에서, 회당 시스템에서 축출당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지난 시절 예수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휘감는 고통을 속에서도 예수의 고통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 순간을 견디며 예수를 전승하였습니다. 예수를 기억하면서 현실에서 자신들에게 닥치는 불의와 고난에 맞섭니다. 이런 예수 전승의 활성화가 결국 지금 이곳에서의 저항과 이곳에서의 부활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 아닐까. 그것이 민중신학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수의 사건과 부활을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이야기는 주변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순환되고 전승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지금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늘 아래에서 구원을 약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뉴타운을 통해 너희를 잘살게 해 주겠다. 경제개발을 해서 너희를 잘살게 해 주겠다. 빨갱이를 이 땅에서 몰아내면 잘살 수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고 나면 우리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감언이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달콤한 속삭임에 얼마나 많이 속았고(속고 있고) 얼마나 우리가 좌절했습니까(지금도 좌절하고 있습니까).

이런 이름은 권력과 자본이라고 단순화하여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실로 신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고 실제로 그 힘으로 누군가는 구원을 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함으로써, 권력과 자본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이 말은 그 누구도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어떤 무엇인가로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자본으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고백은 자본과 권력만 있으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한 대항 담론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공격성,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웃 종교인들에 대한 저주의 언어가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은 또한 제도와 법을 가지고 세상을 가르는 사람들, 그 기준으로 배제와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말이기도 합니다. 국경을 경계로 자국민과 난민을 가르고, 21세기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계약직과 정규직을 가르고, 창조의 섭리란 이름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흑인과 백인을 나누면서, 그러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고, 다름을 배제의 메커니즘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름 아래서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다"(갈 4:28)고 선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제자들의 발언은 세상을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이름과 논리에 대한 저항이고 반대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독선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나 차별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세가들을 향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경고의 구절이고, 민중들에게는 세상에 쫄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격려의 구절이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어 지금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이상철 / <제3시대> 편집인, 한백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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