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노를 보며 떠올리는 것

아내와 딸이 기모노 입은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다워 감탄을 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한국인,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모노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편견이 동시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11년 전, 내가 속한 교단의 선교사 파송 교육에 서울 강남의 한 대형 교회 소속 선교 담당자가 강사로 왔다. 일본에서 3~4년 선교사로 있었다는 그녀는, 일본에 대한 자신의 이런저런 견해를 늘어놓더니 불쑥 기모노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 기모노가 어떤 옷인지 아세요? 아무 곳에서나 바로 펼쳐서 그 위에서 섹스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옷이 바로 기모노예요! 허리 뒤에 담요 같은 것 매단 것 보셨지요?"

순간 아연해진 나는 함께 수강 중이던 일본인 아내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어서 강사는 "일본의 여중생들 중에는 섹스를 안 해 본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말했다. 요지는 그러한 음란의 영에 사로잡힌 나라 일본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한 아내는 일순간 성적으로 문란할 수 있는 여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주변 동료들도 아내를 의식했는지 무안해했다. 아내는 불쾌감을 안 드러내려 애쓰는 표정이었다. 청중 가운데 있을지 모를 당사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수많은 교계 강사들 모습에서 심각한 무례함을 느낀 일이 적지 않다.

필자 부부의 일본 선교사 파송 예배 모습. 기모노와 한복 두루마기. 사진 제공 홍이표

'기모노'에 대한 왜곡된 정보는 인터넷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 '일본에 대해 알면 좋은 상식'과 같은 제목으로 여전히 자주 등장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쟁 직후 남자들이 많이 죽어 인구를 늘이기 위해 아무 곳에서 아무 여자나 붙잡고 마음대로 성행위를 해서 임신시킬 수 있도록 명령했는데, 그때 이불 담요처럼 즉석에서 깔 수 있게 고안한 옷이 바로 기모노라는 것이다.

특히 '오비'라 부르는 넓은 허리띠의 뒤쪽에 풍덩한 사각형 매듭이 고정된 것을 보고, 마치 성행위를 위해 마련된 이부자리인 것처럼 상상하고 그대로 믿어 버린다. 심지어 기모노를 입을 때는 팬티를 입지 않도록 하였고, 지금도 그렇다는 주장도 인터넷상에서 수없이 떠돌고 있다. 그 설명을 일본인에게 하면 모두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놀라워한다. 설사 도요토미 시대의 성 문화가 개방적이고 여성 억압적이었다 할지라도, 조선의 가부장성이 보인 성적 분방함도 그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도요토미 때부터 축첩 공인이나 유곽 제도가 생겨났지만, 그것은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고, 유곽 제도를 만든 것도 실은 남녀의 문란한 생활을 정부가 관리하려는 차원에서 발생한 조치였다. (데루오카 야스타카, 정형 옮김, <일본인의 사랑과 성>, 소화, 2001.)

그런데 한국에서는 '동물의 왕국'과 같은 야만적 일본상이 당연하다는 듯 일상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그러한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표출된 대표적 소재가 바로 '기모노'이며, 특히 그 시선은 '오비'(허리띠)에 집중돼 있다.

기모노의 뿌리는 우리 옷

'기모노'着物는 말 그대로 '걸치다'는 의미의 '키루'着る라는 동사와 물건이라는 뜻의 '모노'物가 합쳐진 말이다. 즉 '옷'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전통 옷인 '한복'의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면 '와후쿠'和服라는 말도 있다. '의식주'衣食住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가장 기본적인 삶의 보호 수단이다. 그중에도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옷'이다. 그러므로 '옷' 그 자체인 '기모노'도 추운 바람과 뜨거운 햇빛, 병충해 등으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풍속사 연구의 1인자로서 교토여자대학 교수였던 에마 츠토무江馬務(1884~1979)는, <일본 복식사日本服飾史>(1929)에서 일본의 기모노 역사를 총 6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제1기는 왜민족倭民族 고유의 풍속기, 제2기는 한반도와의 빈번한 교류에 의한 고유 풍속이 한풍화韓風化되어 소박함에서 화려미가 더해진 시기, 제3기는 당나라와의 교류로 그들 문화에 매료되어 맹목적으로 그들을 모방하던 시기, 제4기는 다시 일본의 국풍國風이 부흥한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 제5기는 전국시대 이후 남만인南蠻人(중국 남부)과 동남아인과의 교류로 다시 외국 풍이 들어온 시기, 제6기는 에도시대 이후 서민들의 유행과 서양 문화의 유입 시기로 보았다. 그는 "왜민족倭民族은 언제나 외국 풍속을 유입시켜 되도록 그것을 국풍화國風化해 왔으므로, 대부분이 외국의 요소들이 쌓여 동화되어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는 한반도로부터의 영향도 있음을 솔직하게 말한다. 심지어 이 점이야말로 일본 옷, 즉 기모노의 자랑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나라 복식(기모노, 하카마, 유카타 등)의 오늘날에 이르는 발달에는 수많은 압박壓迫을 받은 체험을 거쳐 성립되었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 일본 복식의 광채光彩가 있고 근거가 있다. (중략) 오늘날 기모노キモノ라는 말은 세계에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서반아西班牙(스페인) 황제는 일본 부인의 의복을 찬미하였고, (중략) 인도의 타고르 옹도 와후쿠和服를 입이 닳도록 상찬賞讚하였다." (江馬務、「日本服飾史」、長坂金雄編、『日本風俗史講座』 第六巻、東京: 雄山閣出版、1929年、pp.166-167.)

동양 복식사 연구의 대가인 스기모토 마사토시杉本正年도, "일본의 복장을 논할 경우, 동시대의 일본 주변 민족의 복장, 즉,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또 연해주 등의 동아시아 문화권의 문제를 무시하고는 그 정확성을 기할 수 없다"(杉本正年, <동양 복장사 논고>, 26~27쪽)고 고백했다. 실제로 <니혼쇼키日本書紀> 제3권에 "백제에서 옷을 꿰매는 공녀 마케스眞毛津가 건너가서 일본의 의봉의 시조가 되었다"(應神十四年春二月 百濟王 貢縫衣工女 曰眞毛津 是今來目 衣縫之始祖也)는 말을 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힘을 빌어 오吳의 옷 꿰매는 공녀 네 사람이 일본에 건너갔다"[應神十七年春二月戊午朔 (중략) 令求縫工女 爰阿知使主等 渡高麗國欲達于吳 (중략) 由得通吳 吳王 於是與工女兄媛·弟媛·吳織·穴織·四婦女]는 표현도 나온다. 여기서 유래하여 일본 기모노를 '고후쿠'吳服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또한 <부상약기扶桑略記> 제3권에는 "법흥사法興寺: 飛鳥寺를 짓고 그 찰주초刹柱礎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던 날 백여인百餘人이 모였는데 모두 백제 옷百濟服을 입고 기뻐하였다"(建法興寺 立刹柱日 嶋大臣弁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以佛舍利籠置刹柱礎中)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옛 일본인들이 한국의 복식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고분 시대의 여자 의복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식이나 신라 토우의 여성 복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杉本正年, 문광희 옮김, "동양 복장사 논고", 경춘사, 1995. ; 北村哲郞, 이자연 옮김, "일본 복식사", 경춘사, 2000. 참조)

이런 사실들을 보면 우리가 쉽게 폄훼하는 기모노 안에는 우리 옷의 영향도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통 혼례복 안에 원나라 지배 당시의 몽골 복식(족두리, 연지 곤지 등)이 깊이 스며들어 있듯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옷이란 것은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 완성된 것들이다. 기모노를 모욕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가 모욕당하는 셈이다. 일본에서 수많은 문화가 유입되어 기모노가 완성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자랑하듯, 우리 한복 안에도 그러한 문화적 다양성이 녹아 있음을 직시할 때 그 아름다움에 풍성함이 더해질 수 있다.

필자가 일했던 탄고미야즈교회의 옛 사진들. 교우들이 기모노를 입고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오비는 진짜 그런 옷인가?

그렇다면 기모노에 대한 편견이 오롯이 집중되어 있는 오비(허리띠)의 유래와 역사는 어떠할까. 도요토미의 야만적 성행위 명령에서 '담요'처럼 생긴 오비가 탄생했다는 말이 널리 회자되는데, 사실일까.

오비는 이미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 이후 민간에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겉으로 두르는 것이 아니라 안에 안 보이게 묶었다. 밖에 노출해서 묶기 시작한 것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1573~1603)부터이다. <무로마치단 이야기室町段物語>에는 "아동兒童들에게는 의복에 얇은 끈으로 묶은 뒤 오비를 둘렀다"는 표현이 나온다. '오비'는 옷을 입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하는 의복의 필수적인 한 요소였다.

우리 안에 만연한 오비에 대한 풍문이 근거 없는 낭설인 첫 번째 이유는 시기에 있다. 오비의 폭이 지금처럼 넓어진 것은, 도요토미가 지배하던 아지츠 모모야마 시대가 아니라, 도요토미가 죽은 이후 한참 뒤인 에도江戶시대(1603~1868) 중후기 일이기 때문이다.

에도시대는 임진왜란 이후 포로로 와 있던 유학자 강항姜沆(1567~1618) 등의 영향으로 조선 성리학의 널리 전파되어 '인의예지신'을 기초로 한 유교 이념이 강화된 시기이다. 심지어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남녀유별 사상도 확산되었다. 헤이안 시대 때만 해도 불륜 개념 등 남녀 윤리 의식이 강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점차 엄격해졌다. 가마쿠라시대(1192~1333)에는 불륜을 토지 몰수 형벌로 다스렸고, 무로마치 시대(1338~1573)에는 간통한 양자 모두 사형에 처하는 형벌이 공인되기도 했다.

이후 에도시대의 <어사치례유집御仕置例類集>은 하인이 주인의 딸과 정을 통하면 참형에 처해진 판례가 기재돼 있으며, <지방공재록地方公裁錄>이란 판례집에도 무거운 판결 기록이 보이는 등, 중세 봉건시대의 일본이 결코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였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에도시대에는 '중혼 금지규정'도 더욱 엄격해졌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바로 이런 시기에 폭이 조금 넓어진 오비를 보고 섹스 편의를 위한 담요라고 왜곡하고 있다.

고대에 한반도가 일본의 복식 전반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앞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비'도 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까지는 조선의 끈목 기술이 전파되어 사용된 것이었다. 기모노뿐 아니라 '오비'의 뿌리에도 우리의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허리끈이 그리 넓을 필요는 없다. 당연히 칸분寬文 시대(1661~1673) 전까지만 해도 오비의 폭은 7cm 정도밖에 안 됐다. 그리고 속옷 쪽에서 묶어서 밖으로는 내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에도막부 시대에 이르러 유교 사상의 강화로 남녀 성 윤리도 통제가 강화되자, 점차 서민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런 욕구 표현의 갈증이 증폭된다. 그 결과 오비의 폭을 점점 넓혀 화려한 문양을 새기고 돋보이게 하는 패션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7.5cm 정도였던 오비가 1670년대에는 11cm로, 1680년대 들어서면 22cm 정도로, 1690년대에 이르면 지금의 오비 정도에 해당하는 34cm 정도로 폭이 넓어져 갔다. 특히 엔보우延寶(1673~1681) 시대에 일반 서민들도 폭이 넓은 오비를 본격적으로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있다. 유명 가부키歌舞伎 배우, 즉 시라뵤시白拍子인 우에무라 키치야上村吉弥는 꽃놀이를 가다가 한 소녀의 오비 매듭帯結び을 보고 감탄하여, '키치야 매듭'吉弥結び을 고안했다. 무대 위에서 그 매듭을 선보이자, 수많은 여성 대중이 그 화려한 오비에 환호하였고 대유행으로 이어진다. (增田美子, 『日本服飾史』, 吉川弘文館, 2010, p.250-251. ; 增田美子, 『日本服飾史』, 東京堂出版, 2013, p.132. ; 홍나영 외 지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 한·중·일>, 교문사, 2011, p.386.)

에도시대에 유행한 다양한 오비 매듭법(왼쪽), 1960년대 윤복희가 유행시킨 미니스커트(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가수 이효리나 소녀시대가 입은 새로운 패션이 크게 유행한 뒤, 전에 없던 새로운 의상 문화가 생겨나는 현상과 비슷한 일이다. 한국에 미니스커트를 가장 먼저 알린 인물은 다름 아닌 독실한 크리스천 가수 윤복희 씨다. '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엄혹한 그 시절은 에도시대와도 비슷했다. 1967년 미국에서 돌아온 그녀는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억눌려 있던 많은 여성들은 환호했다. 치마 길이 단속이라는 억압 속에서도 그 당시 여성들은 금기를 깨고 미니스커트를 입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상화한 미니스커트처럼, 넓고 화려해진 에도시대의 오비는 속박당하던 여성들의 유일한 자기표현과 욕구 분출의 통로였다.

물론 오비와 그 매듭 방법을 비롯해, 화장법, 머리 모양 등의 유행을, 가부키 배우나 유곽의 유녀遊女들이 선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황진이黃眞伊(1500년대) 같은 예인들이 각 시대마다 한복의 새로운 유행을 이끈 바 있다. (심지어 12년 전 드라마 '황진이'에서 하지원이 입은 한복도 크게 유행하여 한복의 역사를 바꿨다.) 새 유행으로 사치 풍조가 확산될 것을 엄려한 에도막부는 더욱 엄격한 통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에 만연한 유행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에도시대에 탄생한 기모노 오비의 탄생 배경이다. 복식사 연구가 스기모토의 말을 들어 보면, 넓어진 오비가 도요토미 시대에 자유 성행위를 돕기 위해 고안된 것이란 풍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기모노의 문화는 에도시대에 이르러 가장 순수한 일본의 문화재로서 완성된다. (중략) 사농공상이라는 절대적 계급제도 속에 억압받는 서민, 특히 상인들의 자기주장과 욕구불만은 복장 속에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함으로써 해소되었다." (杉本正年, <동양 복장사 논고>, 22쪽)

외국인의 눈에 오비는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장식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오비야말로 세계 복식사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일본 예술 문화라고 자랑한다. 작달막한 일본인의 체구를 둘로 나누어 더 예쁘게 보이도록 한 일본 미학의 결과가 바로 '오비'라는 것이다.

복식사 연구자 마스다 요시코增田美子는 "이 시기에 유행한 무대의상과 일반 복식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복식 표현이 창출된다. 대표적인 예 가운데, 마츠모토 코우시로松本幸四郞의 '고라이 야지마'高麗屋縞(고려옥 명주)를 들 수 있다"(增田美子, 『日本服飾史』, p.273.)고 말한다. 이처럼 한국풍의 영향은 에도시대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데도 기모노를 타자화하여 바라보기만 할 수 있을까.

○○ 눈에는 ○○만 보인다

오래전 동양 복식사 연구자에게 이러한 풍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근거가 없는 왜곡이 만연해 있어 곤혹스럽다며 한탄했다. 그러한 기모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그대로 우리 옷 '한복'韓服으로 가져오면 오히려 더 무안한 반론에 봉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행위 시의 편의성만 놓고 보면 기모노보다 오히려 한복이 더 간편하고 개방적이라는 그릇된 주장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여성 기모노와 치마저고리를 향한 음흉하고 폭력적인 남성들의 가부장적 시선에 기초한다.

기본적으로 기모노 안에 껴입어야 하는 속은 4~5겹 정도 된다. 궁중이나 귀족 명문가에서는 쥬니 히토메十二単, 즉 12겹단이라고 해서 그걸 다 입으면 옷의 무게만 18kg에 달한다. 일반인들도 한 시간 넘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입어야 할 만큼 입기 힘든 옷이다. 이 말은 곧, 기모노를 벗는 과정도 매우 힘겹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옷이 성행위의 편의성을 위해 고안된 옷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 왜곡된 시선을 그대로 한복에 투사할 때 우리는 매우 불쾌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과거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에 돌아가 우리의 한복을 단순히 "성행위 직전에 탈의할 필요조차 없는 섹스 편의성이 극대화된 옷"이라고 소개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크게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사를 연구해 온 필자는 한복에 대한 그런 왜곡된 진술을 본 적이 없다. 그동안 일부 한국인들은, 기품 있고 우아한 한복에 비해 기모노는 일본의 문란한 성적 문화와 풍토의 소산이라는 식으로 단정 지어 왔다. 그 왜곡된 시선과 무지, 편견을 한국의 일부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이 재생산하고 전파한다.

오히려 기모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겹겹으로 된 복장 때문에 (일본 여성들은) 평생 그 자유를 속박당해야만 했다"(杉本正年, <동양 복장사 논고>, 22쪽)는 스기모토의 지적일 것이다. 가부장적 남성 권력이 여성을 억압해 온 과정에서 기모노가 오히려 폐쇄적 복식 문화로 완성돼 왔음을 직시하여, 어떻게 하면 여성을, 그리고 기모노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하게 할 수 있을까에 관심해야 한다.

기모노 착용 훈련. 기모노는 혼자서 입고 벗을 수 없다. 사진 제공 홍이표

옷이란 기본적으로 몸을 보호하고, 체온을 유지시키며, 인체와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도구이지, 섹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럴 경우 에덴동산에서처럼 옷은 무용한 것이 된다. 각 나라, 민족이 서로 다른 언어와 습관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모노를 바라보는 우리의 왜곡된 시선은 '일본어는 음란한 언어, 섹스를 위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느 외국인이 한글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결국 '인종차별, 민족 차별'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일본의 기모노를 보고 그러한 상상을 하는 한국인들의 음란한 사고방식이, 기모노는 섹스를 위한 옷이라는 무례한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근본 문제는 오히려 한국인의 마음과 시선에 있다. 일본에서 겨우 3~4년 활동한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전문 지식으로 가장하여,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일본 선교 필요성의 근거로 예의 '기모노론'을 펼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끔찍하다.

언더우드 집안은 오얏나무 아래서…

기모노 왜곡과 더불어 한국의 여러 블로거와 유튜버는 일본인의 '성씨'姓氏에 대해서도 동일한 왜곡을 일삼는다. 내전이 일상이었던 전국시대 당시 아비의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이 수없이 태어나게 된 결과, 지금의 일본 성씨가 생겨났다는 낭설이다. 이름 짓기가 곤란해진 나머지 이름 모를 남자와 섹스를 행한 장소를 따서 '성씨'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성씨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기노시타木下: 나무 아래서.
야마모토山本: 산속에서 만난 남자의 씨.
다케다竹田: 대나무 밭에서 작업을 한 아이.
오오타케大竹: 큰 대나무 아래서.
오오타太田: 콩밭에서.
모리시타森下: 숲 아래에서.
모리나카森中: 숲 속에서.

(중략)

"밭 전 자가 많은 것은 논에서는 그 짓을 할 수 없어 주로 밭에서 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는, 글의 마지막 문장이 잘 웅변해 주고 있다. 일본에서 '전'은 한국과 달리 '논'田んぼ(탄보)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한자이다. 오히려 '밭'은 '하타케'라고 쓰기 때문이다. 한자의 용법이 한국과 전혀 다르다. (우리가 쓰는 '공부'工夫라는 말을 일본에서는 '뱅쿄'勉強라고 쓰며, 일본에서 공부工夫라는 말은 오히려 '궁리, 고민'이란 뜻으로 쓰인다. 한일 간에 다른 의미로 쓰는 한자 용례는 수없이 많다.)

저런 근거 없는 주장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는 이들의 '상상 조작'의 결과이다. 위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일본인들은 논두렁 물속에서 남녀가 뒹굴며 아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된다. 실로 자의적인 추측과 모욕적인 무례함, 음란함에 기초한 발상이다

장소를 의미하는 일본의 성씨가 많은 이유는, 메이지유신의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이름 없던 평민들이 '본적 의무화 제도'로 인해 성명姓名을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는 곳의 지형지물을 보고 성씨를 급조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유독 장소를 의미하는 표현들이 눈에 많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성씨'에 대해서까지 모욕을 일삼는 것은, 과거 우리가 일본인에게 당했던 '창씨개명'의 폭력성과 결코 다를 바 없는 만행이 되고 만다.

저런 왜곡된 시선을 영미인들의 이름들에 그대로 적용해 보자. 아래의 성씨들을 모두 성행위 시간 및 장소를 연상하며 읽어 보자는 것이다.

오로라(Aurora): '새벽 동틀 녘'에.
베일리(Bailey): '성벽으로 둘러싸인 안뜰'에서.
벡(Beck): '시냇물, 강변'에서.
버그(Berg): '산'에서. (독일어)
카멜(Carmel): '정원'에서. (히브리어)
덴버(Denver): '푸른 계곡'에서.
더글라스(Douglas): '검은 언덕'에서.
에덴(Eden): '평원'에서. (히브리어)
플로리아(Floria): '꽃이 만발한 언덕'에서.
포레스트(Forrest): '숲'에서.
갈리(Gali): '저수지'에서. (히브리어)
쟈스민(Jasmine): '상록수 아래'에서.
리(Lee): '초원'에서.
레드포드(Redford): '붉은 강 건너편'에서.
리오(Rio): '강변'에서. (스페인어)
록키(Rocky): '바위산'에서.
샐리(Sally): '소풍'에서.
실버스터(Sylvester): '숲'에서.
테라(Terra): '광야, 대지'에서. (라틴어)
언더우드(Underwood): '나무 밑, 숲 속'에서.

우리의 굴절된 시선을 영미권 이름에도 적용해 보면, 인천 상륙작전을 이끈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도 '검은 언덕'에서 생겨난 인물이 되며, 1908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주도한 미장로회의 리(Lee) 선교사는 '초원'에서 행한 성행위를 통해 태어난 자손이 되며, 한국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조상들은 '나무 밑, 혹은 숲 속'에서 모두 2세들을 만든 셈이 된다. 언더우드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풀어 쓰면, 그대로 '키노시타'木下나, '모리시타'森下가 된다. 일본에서 가장 흔한 두 성씨가 바로 영어로는 '언더우드'(Underwood)가 되는 것이다.

탄고미야즈교회 식탁에 놓인 오비(왼쪽). 사카네 교우가 직접 만든 오비를 보여 주고 있다(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2003년에 연세대 캠퍼스 내의 '언더우드家기념관' 건립 준비를 위해, 언더우드 3세인 원일한元一漢 박사를 모시며 반년 동안 사담私談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원 박사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 '원 씨'元氏가 아니라 '이 씨'李氏가 맞아요!"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했다.

"이라는 한자는 나무 밑에 아이가 있다고 풀이할 수 있지요. 영어로 표현하면 'under wood'가 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 씨는 모두 언더우드(underwood)인 것입니다."[I joke with my Korean friends that the Lees are all Underwoods. The Chinese character (李) for Lee is tree (木) over a child (子) - obviously 'under wood.] (원일한,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연세대출판부, 2002, 9쪽, Korea in War, Revolution and Peace : The Recollections of Horace G. Underwood, Yonsei University Press, 2001., xi.)

필자가 확인한 인터넷상의 한 블로거는, 일본 전국시대에 허용된 강간 및 섹스 창궐 때문에 생겨난 이름(성씨) 중 1위가 바로 '키노시타'木下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나무 밑, 나무 아래"를 영어로 하면 언더우드(Underwood)가 되고, 한국과 중국에 오면 '이 씨'李氏가 된다. 조선왕조 500년 이 씨들, 그리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 아무개까지… 조선 건국 이래 600년간 한국은 오얏나무 아래에서 섹스를 하며 생긴 후손들이 통치를 해 온 셈이 된다. 박 씨朴氏들도 후박나무 아래의 집안이라 하고, 김 씨金氏들은 돈으로 성을 사고판 결과로 유래한 자식들이라고 외국에서 우기면 어찌 답할 것인가. 이웃 나라의 전통 복식과 그 이름자까지 모욕하는, 저 근거 없는 망발은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필자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수많은 성 추문과 추행, 성폭행과 간음, 성희롱 발언들을 들으며 늘 기모노를 떠올린다. 일본은 음란의 영에 사로잡혔다며 그들을 회개시켜야 한다고 외치기 전에,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가부장적인 언어폭력 및 음란에 대한 일부 목회자와 정·재계 크리스천들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음란물의 최대 사용국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생산과 공급은 곧 소비자가 존재하므로 지속된다. 그러면 일본의 성적 타락을 선교의 명분으로 삼으며 회개를 촉구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성적 문란과 타락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랜 전통 가운데 형성된 일본인의 자부심이 '기모노'이다. 또한 한 벌에 최저 500~600만 원에서 비싼 것은 1000만 원 이상 호가하여 가보로 물려주는 옷이 '기모노'이다. 그런 옷을 천박하게 폄훼하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 간다는 것은 버겁고 힘든 일이다.

이곳 일본인들은 한국 개신교 선교사인 필자를, 성적 문란함으로 국제적 망신을 사고 구속됐던 JMS의 교주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기독교복음선교회'基督教福音宣教会와 '섭리'摂理, 한때는 '예수교대한감리회 애천교회'라는 단체 이름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기모노를 모욕하는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나는 JMS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어찌 항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든 오해와 편견은 그렇게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탄고미야즈교회 십자가와 성서를 뒷받침하고 있는 기모노의 오비. 사진 제공 홍이표

탄고미야즈교회의 오비

작년까지 필자는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의 탄고미야즈교회丹後宮津教会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동해와 닿아 있는 그 지역은 예로부터 조선과 교역이 활발했고, 미야코(수도)인 교토京都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었다. 교토로부터 미야즈만으로 흘러나오는 유라가와由良川를 역류하여 옛 고려인과 조선인들도 일본의 도읍을 찾았다. 자연히 미야즈는 교토 '니시진오리'西陣織り와 함께, 일본 전통의 의상 기모노 원단과 오비의 명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 교회에 3대째 출석 중인 사카네坂根 부부는, 50년 평생을 미야즈 요사노쵸与謝野町에서 기모노의 허리띠인 오비おび, 帯를 생산해 온 장인 커플이다. 하루는 직접 제작한 오비 한 장을 가져와 현관의 접수 데스크와 친교 테이블을 장식했다. 그 일을 계기로, 교회 창립 125주년을 기념하여 강대상 십자가 주변을 오비로 장식하자고 제안했다. 사카네 부부는 아끼는 작품을 교회에 흔쾌히 기증했고, 아름다운 금색 오비는 십자가와 함께 교회의 자랑이 되었다. 탄고미야즈교회의 십자가와 오비는 그렇게 아름다운 동행을 시작했다.

기모노와 한복을 입은 한 하나님의 자녀들. 일본 전도대 집회에서 기모노와 한복을 입은 신자들이 함께 예배하는 모습. 사진 제공 홍이표
셔우드 홀 박사의 제자들. 맨 앞줄 한복을 입은 여자 신학생 옆에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이 앉아 있다. 셔우드 홀 박사 부부는 한국 최초의 결핵 병원을 세웠고, 크리스마스실 운동을 창안했다. 서태원, 장낙도 목사 등이 보인다. 사진 제공 홍이표
지난해 기모노를 입고 예배에 출석한 후지타 교우와 함께한 필자. 사진 제공 홍이표

매년 1월 두 번째 월요일 '성인成人의 날'이 되면 거리는 온통 원색의 기모노를 차려입은 스무 살 앳된 여성들로 가득하다. 2014년 그날(1월 13일), 오사카 이쿠노구의 츠루하시를 찾은 적이 있는데, 치마저고리(한복)를 입은 우리 교포 여학생들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기모노와 한복의 평화로운 조화에 묘한 감동을 느꼈다.

그날 일본기독교단 오사카교구에서 강연회가 있었다. 주제는 '한국에서 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 인종차별을 넘어서기 위한 제언'이었다. 문득 '기모노'를 향해 우리가 '헤이트 스피치'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나 자문해 보았다. 한국에서 기모노는 여전히 참으로 괴롭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윤복희, '여러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홍이표 목사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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