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難民 문제로 고국 땅이 시끄럽다. 문득 작년까지 2년 동안 필자가 활동한 교토 북부의 탄고미야즈교회丹後宮津教会에서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교회에는 1920년대부터 30년 넘게 그 교회를 지킨 타츠 츠네토요達常豊 목사의 손자 부부가 지금도 다니고 있다. 한국인 목사를 처음 경험하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몇 달을 보냈던 그들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안심이 되었는지 타츠 목사가 남긴 자서전 <나의 전도의 생애>를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보니, 한국인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신 게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이 교회가 조선 사람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더라고요."

시골 가리방がり版(등사판)으로 인쇄한 70년대 갱지更紙의 투박한 책 한 권에서는 아련한 옛날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이내 손자 타츠 마사시達正志 상은 제9장 '반도의 사람들'半島の人々을 펼쳐 보인다.

타츠 츠네토요 목사 자서전 표지. 사진 제공 홍이표
회고록 본문. 제9장 '반도의 사람들'. 사진 제공 홍이표

"九.반도의 사람들半島の人々

태평양전쟁 중에는 점점 교회에 오는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신도들조차 세간의 풍조에 두려워하여, 교회로부터 멀어져 버렸고,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자신의 이름은 당분간 교회 명부에서 삭제해 달라고 신청해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어느 주일에는 목사 가족만으로 예배를 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조선朝鮮에서 온 형제들의 여러 가족이 예배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두 명의 노파가 있었는데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젊은 부인에게 '훌륭한 노인들이네요!'라고 하자,

'일본어 찬송가나 설교를 못 알아들어도, 주일예배를 지키는 것은 신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신앙을 보고 재차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동시에 그에 비하면 일본인 신자들의 패기 없음에 대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배 중에 어떤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이 예배에 출석하기 때문에, 일본 분들이 싫어해서 그분들이 출석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그러면 우리가 예배 참석을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대해 나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나라나 인종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 안에서 어떤 사람이든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예배 참석을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을 싫어하는 잘못된 신자가 있었다면, 그 심판은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그 여성은, '그러면, 지금부터 사양 않고 기꺼이 출석하겠습니다'라며 매우 기뻐하며 대답했다. 어느 한 형제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선생님뿐입니다'라고 말해 주어서 참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達常豊、『自叙伝-我が伝道の生涯』、宮津:日本キリスト教団丹後宮津教会、1972年、p.43.)

진무덴노神武天皇가 일본을 세운 지 2600년이 되었다고 주장된 1940년은, 중일전쟁 이후 군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살벌한 공포정치하에서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은 적국으로 몰렸고, 기독교 교회에 나오는 것은 '비국민'非國民 취급을 받게 됨을 의미했다. 불이익과 배제가 두려웠던 일본인 교인들은 대부분 탄고미야즈교회를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 미야즈 지역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조선인 가족들만 출석하며 교회를 지킨 것이다. 1951년에 제정된 UN '난민難民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1조는 '난민'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인종, 종교, 민족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현대적 의미의 '난민'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미야즈까지 흘러들어 온 망국의 백성 조선 사람들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난민難民임에 틀림없다. 위의 규정 이외에도 오늘날의 난민에는 극심한 기아飢餓나 식민지 상태 등으로부터 피신해 온 경제적 이주민도 넓게 포함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1910년 이후의 강제 병합 시기는 1592년부터 6년간 이어진 '임진왜란'과 같은 '난리'이기 때문에 '경술왜란'庚戌倭亂이라 불러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난리 통에 먹고 살길을 찾아 떠돌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 밖의 낯선 땅 일본에서 '신앙의자유'라는 기본권인 주일예배마저 눈치 보며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때 타츠 목사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나라나 인종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 안에서 어떤 사람이든 형제 자매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며 기독교인이 '난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나라'(국적)와 '인종'(민족)의 구별을 내세우며 사람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반기독교적이요, 반신앙적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의 일화도 있다.

조선인 교우들과의 벚꽃 놀이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타츠 목사. 사진 제공 홍이표

"어느 해 봄, 벚꽃놀이 모임을 겸하여서 수원지水源地의 유원지에서 친목회를 하려 하니, 나도 출석해 주면 좋겠다는, 조선 형제들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기꺼이 참석하여서, 벚꽃 아래에서 짚방석을 깔아 놓고 앉아 회식을 했습니다. 그곳을 인근의 상업학교 교사가, 클래스의 학생들을 인솔하여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그 교사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목사님은 조선 사람들과 단란하게 회식을 하시고 계셨습니다만, 정말 감복하여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저 같으면 그런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겁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똑같이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가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 교사는 한층 더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미야츠교회宮津教会를 향해 사람들이, '조선인 교회다'朝鮮人教会だ라고 뒤에서 깔보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達常豊、『自叙伝-我が伝道の生涯』、p.44.)

심지어 타츠 목사는 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풍을 즐기는 명소에서 조선인 교우들과 즐거운 친교 시간을 보냈다. 치마저고리의 한복을 입은 어눌한 일본 말을 쓰는 이방인들과의 만찬과 코이노니아. 그 모습을 바라본 지역민들에게는 편견과 오해가 가득했다. 그 지역에서는 소위 지식인 혹은 교양인에 속했던 당시의 고등학교 교사는 타츠 목사의 용기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조선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놀랍던 그 시절. 그야말로 '난민'이었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지금 제주도에 상륙한 예멘 난민들과 그 처지에 있어서 무엇이 다른 걸까. 제주의 한 기독교 목사가 예멘 사람 수십 명을 교회로 초대해 그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여 주었다는 기사를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70~80년 전 일본 땅의 한 이름 없는 목사는 난민이었던 우리의 선조들을 진심으로 돌보아 주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똑같이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가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이라던 타츠 목사의 일갈은, '이슬람 혐오'라는 편견과 오해에 갇혀 먼 곳에서 온 난민들을 차갑게 대하는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 회고록을 읽자 한국의 후손으로서 이 교회에 부임한 것은 놀라운 주의 섭리처럼 느껴졌다. 몇 달 뒤에는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교인들의 집을 방문해 사진 앨범을 열람했다. 타츠 교우의 집에 가서 낡은 할아버지 목사님의 앨범을 펼쳐 보았다. 수많은 사진을 보다가 필자는 탄성과 함께 환희를 느꼈다. 회고록에 나온 수원지 벚꽃 놀이 때의 장면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던 것이다. 흐드러진 벚꽃 가지 아래 하얀 저고리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조선의 아낙들, 소녀들이 지친 일상에서 잠시 위안을 얻는다. 식솔을 거느린 조선 남정네들의 표정에선 천금 같은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들 속에 타츠 목사가 서 있다.

이 사진 옆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성도들이 운집한 한 예배당 사진이 있다. '진지동성서교회'眞池洞聖書敎會라는 간판이다. 아마도 평남 용강군 지운면池雲面 진지동眞池洞에 있던 교회가 아닐까 싶다. 탄고미야즈교회에 출석한 교인들 중 이 교회 출신이 타츠 목사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골 마을에서 80년 전 '난민'으로서 먼저 이 땅을 밟았던 선조들의 흔적을 대하는 기분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조선인 교우의 고향 교회 사진. 사진 제공 홍이표

타츠 목사는 원래 일본 제국을 위해 일하던 경찰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눅 16:13)는 마음으로 경찰직을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인'만을 위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도 전도하지 않던 땅, 미야즈로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조선의 '난민'들을 만났고 그들을 돌보았다. 훗날 그는 장례식조차 거행할 수 없는 조선인들의 마지막을 지켜 주었다. 그의 묘소 주변에는 그가 거두었던 무명의 조선인 여러 명도 함께 묻혀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참 역사다. 일본의 신앙인으로서 조선의 신앙인들 앞에서 느낀 부끄러움도 가감 없이 회고록에 기록한 타츠 목사의 자세… 유한한 인간의 한계와 죄악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기록한 성경이 '진리'를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작은 시골 교회의 역사가 이러할진대, 고국의 역사는 한동안 왜곡되고 난도질되어 만신창이가 되어 갈 뻔했다. 참회와 반성이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모두가 떠났지만 조선인 '난민'들만 덩그러니 남아 주일을 지켰던 이 교회에, 지금은 조선인 목사가 와서 교우들과 다시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결국 저 본향을 떠나와 잠시 이 세상에 '난민'으로 온 존재들임을 깨닫기 위해 신은 이 질긴 인연을 다시 이어 붙이신 건 아닐까. 그리고 '난민'의 추억을 망각한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이 한 장의 사진을 다시 보여 주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일본 제국을 위해 일하는 경찰이었던 타츠 목사. 사진 제공 홍이표
경찰 재직 시절. 맨 오른쪽 세 번째 줄에 있는 사람이 타츠 목사. 사진 제공 홍이표
경찰직을 버리고 전도자가 된 타츠 목사 소개문. 사진 제공 홍이표

'나그네'의 삶, '난민'의 삶

새문안교회와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일하시는 일본기독교단 소속 일본인 목사님이 계신다. 그분은 한국에 오신 뒤 '나그네'落雲海라는 새로운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그분은 과거 일본인이 조선 땅을 지배하며 수많은 조선인을 나그네, 곧 '디아스포라(Diaspora) 난민'으로 만들어 버린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한국에 왔고, 자신도 그러한 '나그네'의 삶을 살기 위해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성경 전체는 '나그네', 곧 '난민'들의 대하드라마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도 신이 허락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나그네' 곧 '난민'이 되었다. 창세기 4장 14절의 가인도 동생 아벨을 죽인 뒤 도망하며 만나는 자마다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떠돌이 난민의 신세가 되었다.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은 대부분 양치기, 유목민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 다시 온 세상으로 흩어진 인간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달라진 문화와 습관으로 서로를 타자화해 갔다. 이윽고 성경의 유대 민족은 모세와 함께 출애굽을 한 이후에도 광야에서 40년간 난민으로 떠돌았으며, BC 586년에 바빌론의 포로가 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난민'으로 살아왔다. 늘 떠돌아다니는 양치기에 관심하였던 예수도, 헤롯 왕의 영아 학살과 폭정으로부터 피난했던 난민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신은 그러한 난민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향하여 "크게 번성하게 하여,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실 것"(창 17:2-5)이라고 축복하였다. 이곳저곳 떠돌다 죽어 없어져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그런 나그네의 삶에, 신은 처음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다. 이렇게 신께서도 주목하는 말 '나그네'를 일본어 성경은 여러 다른 표현으로 옮기고 있어서,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볼까 한다.

(1) 재류 이국인在留異国人

먼저 일본의 신개역新改譯 성경은 '나그네'라는 말을 많은 경우가 "재류 이국인" 곧 '외국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먼저 예를 들어 출애굽기出エジプト記 23장 9절은 '난민'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최근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 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あなたは在留異国人をしいたげ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は、かつてエジプトの国で在留異国人であったので、在留異国人の心をあなたがた自身がよく知っているからである。」

너희가 과거에 난민이었던 것을 잊지 말고, 지금 너희 땅에 들어온 '이방 나그네'(외국 난민)를 압제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신명기申命記 10장 19절은 '나그네'(외국 난민)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주문한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在留異国人を愛しなさい。あなたがたもエジプトの国で在留異国人であったからである。」

이처럼 일본어 성서는 '재류 이국인'(이 땅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으로 번역하여, 수많은 사연을 통해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외국인을 따뜻한 배려로 섬기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동성애나 여성 차별 문제 등에 대해서는 문자주의적으로 여러 성서 구절을 금과옥조로 인용하는 이들도 이 성구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2) 기류자寄留者

한편 신공동역新共同訳 성서는 위의 같은 구절의 '나그네'를 '기류자寄留者(키류샤)'로 번역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あなたは寄留者を虐げてはならない。あなたたちは寄留者の氣持を知っている。あなたたちは、エジプトの國で寄留者であったからである。」 (출애굽기出エジプト記 23: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あなたたちは寄留者を愛しなさい。あなたたちもエジプトの国で寄留者であった。」(신명기申命記 10:19)

한국인에게는 낯선 '기류자'라는 말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 땅으로 오게 된 '재일 한국-조선인'(재일 코리안)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평생을 도쿄 지역에서 재일 한국인들을 위해 활동하다 10년 전(2008)에 소천하신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이인하李仁夏 목사님은, 재일 동포들이 일본에서 차별받는 삶이 지속되더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이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임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한 재일 동포의 삶과 신학을 성경에 나오는 출애굽 사건과 비교하며 논한 것이, 1979년에 신교출판사新教出版社에서 <기류민의 외침寄留の民の叫び>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10년 뒤인 1998년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기류민의 신학: 일본인들이 말하는 '재일 조선인'의 사회와 역사적 맥락에서>(양현혜 옮김)으로 소개되었다.

"기류寄留"라는 말은 "다른 지방이나 남의 집에 일시적으로 머물러 사는 것"을 뜻한다. 즉,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재류 이국인在留異国人이라는 말이 좀 더 넓어진 의미인 셈이다. 위의 두 성구는 재류 이국인在留異国人과 기류자寄留者들을 "압제하지 말고 사랑하라!"(しいたげてはならない。愛しなさい。)고 가르치고 있다. 누구든 고향을 떠나는 순간 똑같은 입장이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과연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이 성경 말씀 앞에서 어떤 자세를 보이고 있을까.

<기류자의 신학> 일본어판과 한국어판 표지. 사진 제공 홍이표

(3) 여행자旅人

세 번째로 일본어 신공동역新共同訳 성경은 '나그네'를 '여행자旅人(타비비토)'라는 좀 더 부드럽고 여유로운 표현으로도 쓰고 있다. 신약성서 히브리서ヘブライ人への手紙 13장 2절부터 3절을 보자.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旅人をもてなす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ることで、ある人たちは、氣づかずに天使たちをもてなしました。自分も一緖に捕らわれているつもりで、牢に捕らわれている人たちを思いやり、また、自分も體を持って生きているのですから、虐待されている人たちのことを思いやりなさい。」

하나님께서는 남루한 나그네의 모습일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모습을 보길 바라신다는 말이다. 또한 쉽게 차별받고 억압받을 수 있는 소수자(minority)의 삶과 실존을 함께 기억하길 원하신다는 메시지다.

이어서 7절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러 준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あなたがたに神の言葉を語った指導者たちのことを、思い出しなさい。彼らの生涯の終わりをしっかり見て、その信仰を見倣いなさい。)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준 지도자들은 누구인가. 사도들과 예언자들, 선교사와 목사, 이름 없이 헌신한 수많은 전도부인과 권서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복음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사도의 힘겨운 전도 여행은 '디아스포라 난민'을 자처한 삶이었다. '나그네'의 일본어 성서 번역어인 '재류 이국인'在留異國人이요, '기류자'寄留者요, '여행자'旅人의 삶이었다.

성경은 인간이 한곳에 정착하면 안주하고 게을러져, 결국 재물을 쌓아 두고 권력을 탐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그네, 곧 난민의 삶이 끝나는 순간 인간은 탐욕으로 부패하게 됨을 다윗의 인생이 잘 보여 준다.

거울 속 '난민'의 자화상 응시하자

최근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출신 난민들에 대해 한국인의 53.4%가 난민 수용을 반대하였다(7월 4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유럽 지중해 연안에서 고통받는 난민의 모습이나, 부모와 생이별한 멕시코 이민자의 어린아이를 보며 비판하던 한국인들이 자국 땅에 들어온 난민들에겐 싸늘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인종차별주의적인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들 가운데 테러범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며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기도 한다. 이러한 배타적 분위기는 이슬람포비아, 여성 및 성소수자 혐오 풍조와 함께 더욱 확산될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일본 땅에서 고통받던 우리의 선조들이 불과 70~80년 전에 그러한 취급을 받았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뿌렸고, 방화와 강간을 자행한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다. 그 결과, 일본 경찰과 민간의 자경단은 6000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2016년 4월 19일 발생한 큐슈 구마모토 대지진 당시, 인터넷상에는 한국인이 우물과 수돗물에 독을 퍼트렸다는 판박이 악소문이 돌았으며, 지금도 재일 교포들을 향한 우익의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은 끊이지 않는다. 여전히 '난민' 취급을 당하는 동포를 바로 곁에 두고, 그와 같은 폭력을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온 해외 난민에게 똑같이 행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거짓 보도와 경찰 및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사진 제공 홍이표

작년까지 북한과의 전쟁 임박설로 모두가 공포에 떨었다. 급한 불을 끄고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긴장과 불안은 여전하다. 70년 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거짓 방송으로 국민을 난리통에 남겨 두고, 자신과 일부 지배층 5~6만 명은 비밀리에 일본 야마구치현으로 피신하도록 하는 이른바 '비상조치 계획서(EMERGANCY MEASURES PLAN)'라는 '일본 난민 캠프' 계획을 세웠다(2015년 6월 24일 KBS 보도: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당시 '일본 망명' 계획서 확인」, <경향신문>, 2015년 6월 25일 자). 이 같은 일이 오늘 당장 재현될 리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7월 1일,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는 '한국의 끝나지 않는 인종차별(South Korea’s Enduring Racism)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그 글은 "민주주의와 경제 번창이라는 한국이 이룬 모든 성공에 비해 연민과 인도주의적 감각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북한과 전쟁이 날 경우 다른 나라들이 한국 난민을 어떻게 처우해 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끝맺고 있다. 이찬수 교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목사)는 이러한 모습, 특히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내로남불의 난민론'이라고 지적했다.

"전쟁 통에 살기 어려워 낯설디 낯선 곳으로 목숨 걸고 온 난민을 내쫓으라고 청원하는 이가 더 많다니, 슬프다. (중략) 어쩌다 우리는 그렇게 비인간적인 지경으로 몰리게 되었을까. 우리가 피난민이었던 시절이 불과 반세기 조금 전이다." (이찬수, "'내로남불'의 난민론", 발자국통신, 인권연대, 2018년 7월 6일)

우리도 여기저기 떠돌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 곧 난민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 삶은 신께서 오히려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나눔'이다. 나그네는 1년 동안 먹을 음식을 비축해 둘 필요가 없기에 남은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심지어 자신이 타고 다니는 낙타와 말, 양들에게도 물과 음식을 나누어 준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수가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땅에 우리가 세운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도 여전히 신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일 어디서 잠잘지, 어디로 향할지 몰라도 늘 행복하고 감사하는 '나그네'의 삶처럼 살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난 낯선 '난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게 된다.

앞에 소개한 타츠 목사는 "만약 여러분(조선의 난민들)을 싫어하는 잘못된 신자가 있었다면, 그 심판은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라고 엄중히 말했다. 그리고 성경은 곳곳에서 '난민'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행동 요령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이사야 16:3, 개역개정)."

"목마른 피난민들에게 마실 물을 주어라. 데마 땅에 사는 사람들아, 아라비아의 피난민들에게 먹거리를 가져다주어라(이사야 21:14, 새번역)."

"아로엘의 주민들아, 한길에 나와 서서 살피며, 도망치는 피난민들에게 무슨 변이 났느냐고 물어보아라(예레미야 48:19, 공동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마태복음 22:37-39, 새번역)."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야고보서 2:8, 새번역)."

홍이표 목사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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