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김기덕이 감독한 영화 '악어', 켄트 하루프가 쓴 소설 <축복>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뒤로 가기를 눌러 주세요. - 편집자 주

 

<축복> / 켄트 하루프 지음 /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472쪽 / 1만 5,800원

1. 얼마 전 어느 예능에서 "오늘 죽기 딱 좋은 날이네"이라는 영화 '신세계' 대사를 소재 삼아 재미를 유발해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 대사를 생각하면 나는 20여 년 전 개봉한 조엘 슈마허 감독의 '유혹의 선' 도입부에서 주연을 맡은 키퍼 서덜랜드가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군"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더 강렬하게 떠오른다.

'신세계'에서 이중구 역을 맡은 박성웅이 했던 말에 '타자에 의한 죽음'을 앞둔 체념이 담겼다면, '유혹의 선'에서 키퍼 서덜랜드가 했던 말은 자의에 의한 죽음(엄밀하게는 임사 체험을 위한 불법 실험)을 염두에 두고 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다. 그저 죽기 좋은 날이 아니라 죽음을 맞을 준비와 정리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가 지식인의 지질함을 보여 준다면 김기덕 감독 데뷔작 '악어'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이의 지질한 악함을 보여 준다. 그래도 '악어' 주인공을 맡은 조재현은 마지막 장면에서 나름대로 선한 마음과 책임 의식을 보여 주는 듯하다(그는 자신이 망가뜨린 여인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한강 물속에서 수갑을 차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한강대교 밑이라고 설정해 만든 수중 장면 세트는 영화 내용과 달리 무척 아름답다. 영화는 그렇게 나름대로 아름다운 엔딩을 그린다. 그때 주인공은 점점 숨이 막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탈출하려고 하는데 결국 실패한다. 이렇게 남자 주인공이 죽어 가는 가운데 보여 주는 지질함의 극치는 감독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만 죽음 앞에서 지질하고 두려운 것일까.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진정 죽음을 차분히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리고 당신은?

2. 죽음을 맞는 일은 쉽지 않다. 앞서 말했듯,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정리하는 일도 간단하지 않다. 특히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나 자신이 맺어 온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관계는 한 번의 만남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내가 정리하려 해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상대방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켄트 하루프의 <축복>(문학동네)은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오랜 세월 철물점을 운영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노인 '대드'가 어느 날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담담히 그렸다. 그 과정에서 평생 동행했던 아내, 한동안 떨어져 살았던 딸의 귀향이 있고 아들과의 관계도 드러난다. 특히 아들은 동성애자인 까닭에 아버지와 충돌해 가출하고 수십 년 떨어져 지내며 소식마저 끊긴 상황이었다. 소설 말미까지 그 아들을 찾는 과정이 나온다. 대드가 직간접적으로 맺고 있었던 이웃들과의 관계도 그려진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듯한 삶을 살아가지만 누구 하나 순탄하지 않다. 작가는 어떤 사람이든지 쉽게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그 상처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해서 또다시 상처받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하고, 올바른 일을 하지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어떤 이는 죽거나 어떤 이는 떠난다. 이 같은 이야기들이 전통 소설 기법으로 하나하나 엮어져 있다.

나의 원칙이 옳다고 해도 그것만 고수하는 것이 삶에 있어서 정답은 아니다. 어떤 때는 상대적일 수 있다. 그렇게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상대 기준 속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거나 소화될 가능성이 없어 삶이 붕괴되고 관계가 단절되기도 한다.

홀트 마을 목사 라일은 대다수 교인의 반발을 감수하면서도 반전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담은 설교를 한다. 라일은 그가 하고 싶은 설교를 하지만 파장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도 주저앉아 버리고 가정도 무너진다. 대드는 과거부터 오랫동안 적지 않은 돈을 횡령하던 직원을 원칙대로 엄격하게 처리하고 그와의 관계도 끊는다. 하지만 마을을 기반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직원은 자살하고 그 가족은 마을을 떠나 비참한 생활을 한다.

대드의 아들도 동성애 때문에 학교에서 상처를 입고 아버지에게 (한 번뿐이지만) 매를 맞는다. 결국 마을을 떠난 대드의 아들은 수십 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대드는 아들을 찾으려 애쓰지만 결국 소설 마지막까지 그의 귀향은 이뤄지지 않는다.

다른 이웃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러 상처와 해결이 안 된 문제들을 보여 준다. 이 소설은 비록 제목처럼 '축복'같지 않은 현실이지만 나름대로 치유와 상처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보여 준다. 여러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그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도 보여 준다.

특히 죽음을 앞둔 대드가 몇 번에 환각을 경험하면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과 죽음을 택했던 직원의 아내와 대화하면서 화해하는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아들과 만날 때는 대드의 부모도 등장해서 아들에게 행사했던 대드의 폭력과 이에 대한 아들의 반응이 대드의 아버지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비록 현실에서 대드가 이들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희망을 보여 주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죽고,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당장 죽음을 앞두더라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나 정리가 되지 않은 인간관계가 있을 수 있다.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청산하고 정리할 대차대조표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 장부에는 대변(貸邊)도 있고 차변(借邊)도 있을 것이다. 그 항목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수백 수천의 다양한 사건과 인간관계 문제가 남아 있을 것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어떤 때는 수익으로, 어떤 때는 손실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중 갚아야 할 부채도 있고 마지막을 좀 더 밝게 만들어 줄 수익도 있으리라.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풀 수 없는 인간관계도 있겠다. 그것은 결국 그것대로 내려놓아야 하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소설은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드 엔딩도 아니다. 그저 노력할 뿐이고 죽을 뿐이다. 소설 말미, 결국 대드는 죽는다. 아내 메리는, 대드 옆에서 남편의 죽음 준비를 도왔고 그것을 위해 채비를 했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준비가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인간은 죽음을 두 번 맞지 못한다. 처음 맞이하기에 서툴고 미진하다. 우리 인생과 인간관계도 처음이기도 실수할 수밖에 없고 서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정리하고 수습해 나가는 노력을 하느냐 문제일 게다. 결론이 안 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울부짖던 메리는 한참 지난 후 딸 로레인에게 말한다.

"이제 준비가 된 것 같구나. 넌 어떠냐?"

"저도 준비가 됐어요, 엄마."

다 정리하고 죽음을 맞을 수는 없다. 해 왔던 자리에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순간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지금까지 기록한 인생의 장부를 채워야 한다. 갑자기 장부가 정리되더라도 정리된 대로 주 앞에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오늘, '죽기 좋은 날'로 살아가자.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문양호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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