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요람 하조니는 구약성서가 어떤 책인지 질문하며 글을 시작한다. 성경이 아닌 '구약성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사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자신감 있게 설명하겠다는 의도가 잠재적으로 깔려 있다.

그가 말하는 유대인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직접 복의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스라엘, 이집트 노예에서 끌어내 한 민족을 이루게 하고 지켜야 할 율법을 돌판에 새겨 주며 가나안으로 들여보낸 이스라엘, 무정부의 혼란 안에는 두기 싫으면서도 이중적 적법성으로 끝까지 개입하려는 제한적 국가 이스라엘…. 분열한 것도 모자라 바닥까지 타락한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진리를 찾고 돌아오라고 끝까지 다그치는 이스라엘을 향한 구약성서 속 시선과 손길은 무시할 수가 없으며 부럽기까지 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어 구원을 이룬 것처럼 이방 민족에게도 언약 체결과 구원의 가능성은 동일하게 열려 있다. 바로 여기에 구약성서를 통해 보편적 담론을 찾고 철학해야 할 근거가 있다.

하조니는 구약성서 대부분이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이 생겨나기 500년 전에 쓰였으며,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학자들이 하나님 말씀과 인간 이성의 판단을 뚜렷이 이분법적으로 구분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구약성서란 인간의 자연적 정신 능력에 근거해 진리와 선을 발견하려 노력하는 개인이나 민족을 돕기 위해 쓰인 이성적 저서, 철학책이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내러티브로서 창세기부터 열왕기까지 단일 서술 구조를 선지서와 성문서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성서적 역사가 목적하는 바(역사서에서는 도덕적, 정치적 문제, 예언서에서는 진리와 선을 깨닫는 어려움과 관련한 심리학적, 인식론적 문제)를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 요람 하조니 지음 / 김구원 옮김 / 홍성사 펴냄 / 436쪽 / 3만 3,000원

구약성서
어떻게 접근할까

저자는 성서가 우리에게 양치기의 윤리학, 더 넓게 주변인의 윤리학을 가르친다고 전한다. 성서에서 양치기로 살아온 아벨, 아브라함, 야곱, 그리고 모세는 땅의 저주를 극복하고 하나님에게 반항하면서까지 자신과 후손을 위해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한다. 하나님에게 일관되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벌어질 일을 예측해 제도와 정치보다 선행하는 윤리적 선택을 하고, 도덕적 합법성을 따른다.

하나님도 가인이나 요셉처럼 삶에 순응해 저주와 명령에도 복종하는 인간보다 끊임없이 가치판단을 하는 능동적 인간을 선호한다. 자유로운 주변인 개체에서 한 민족으로 확대될 때 발생하는 무질서와 혼란은 통제되기 어렵고, 집단은 지속적으로 동일한 도덕적 선택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도권 안에서나 발생하는 악행을 저지른다(기브아 사건).

하나님은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도록 허락한다. 이 역시 백성들 간의 합의가 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국가 형성에 대한 백성의 열망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 옳고 그름에 대한 독립적 기준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선포한 기준은 왕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국경의 제한이었다. 이것이 가장 올바른 정치 표본이다. 구약성서는 이처럼 제한적 통일국가의 덕목을 지지하며, 이를 무정부적 혼란이나 전제 국가보다 옳게 여긴다. 솔로몬과 그 아들 르호보암이 이 덕목을 무시하고 형제들 위에 군림하려 했을 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뉜 후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결과로 그 제안을 지지한다. 사실 이스라엘 멸망 원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정치 리더십의 내재적 문제와 동일하다.

하조니는 예레미야의 설교들로 인식론과 진리 문제에 접근한다. 예레미야는 토라를 그릇되게 이해해 선포하는 지도자들을 나무란다. 뒤틀린 지성(슈리룻 레브)으로 인간은 거짓된 말, 생각(디브레이 쉐케르)을 사실로 받아들여 정의와 공평을 실현하지 못한다. 이 태도는 자연법,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행위다. 창조 세계에서 인간만이 지닌 본성이기에 대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면 꾸준히 의심하고 의도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실재의 참된 본성은 점진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쳐 인간 지성에게 그 존재를 알릴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역시 하나님이 부여한 정신 능력을 통해서다. 이렇게 진리는 경험으로 습득할 수 있다.

하조니는 히브리어 '다바르'로 진리와 실재의 문제에 더 가까이 접근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진리란 '발언된 것의 특질'이라는 의견에 반박한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진리란 '대상 그 자체의 특질'이라는 주장이다. 대상 자체가 진리여야 참진리이며 이러한 진리란 신뢰성, 꾸준함, 신실함을 특질으로 지닌다.

말의 진위성 역시 대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발언된 말은 대상에 의존한다. 따라서 참된 사물에 대한 발언이 진리이다. 이제 저자는 대상의 진리와 말의 진리를 연결하며 '다바르'를 설명한다. 성서 저자들은 말과 대상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고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서적 진리 개념에 의하면, '다바르'란 서로 독립된 말이나 대상 자체가 아니다. 오늘날 어떤 대상에 대해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 즉 해석된 대상이다. 그러기에 '다바르'의 진리는 시간과 환경이 변해도 신실하게 그 상태가 유지될 때 참이라 불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가 교리를 통한 절대적 믿음을 주장하며 그 당시 예루살렘을 신앙의 도시, 아테네를 이성의 도시로 나눈 것에 반발한다. 앞서 꾸준히 주장한 성서 속 철학을 근거로 예루살렘을 맹목적 신앙의 도시로 격하시킨 테르툴리아누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는 주후 2세기 카르타고에 국한할 뿐이고, 예루살렘은 카르타고에서 독립해 그 자체로 오랜 역사를 지닌 합리적 지성을 추구한 도시라고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루살렘은 오히려 아테네에 가깝다. 성서 저자들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 속에서 발견될 것이지만, 그 과정은 쉽지는 않기에 참된 지혜를 발견하길 평생 추구해야 한다.

그의 흥미로운 제안에도, 여전히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 여러 유수한 철학자의 저서와 사상을 받아들여 사색하고, 사회와 구성원을 돌보듯 구약성서로 이성적 사고를 총동원하여 철학을 하자는 것은 매우 훌륭한 생각이다. 그의 논지대로 구약성서 속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온전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면, 구약성서를 통한 철학 행위는 언약 안에 속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결국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란, 단지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자연법을 따르는 윤리적인 삶을 고수하고 경험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분명 구원과 연결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이 구원이겠지만, 더 구체적인 정의와 그 구원이 영생을 포함하는지 궁금하다.

둘째, 하조니는 믿음과 계시를 소극적 의미로 제한해 설명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우리의 고백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하나님과 같은 대전제이자 정체성의 첫 단계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으로 히브리인이 탄생했다. 만일 그가 거부했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시작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수학의 명제처럼 예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시작이다. 구약 모든 사건에 대한 '믿음'에서 멈춘다면 유대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이후부터 서술하기 시작할 뿐이다. 동시에 이 믿음이라는 것은 저자 주장대로 절대적으로 믿는 무조건적인 순간만이 아닌, 신뢰 관계 안에서 이루어 가는 역동적 삶이다. 이는 오히려 오랜 세월에 걸쳐, 심지어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이해인 '다바르'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할 때가 더 많다.

셋째, 저자는 구약성서를 두고 이성과 계시라는 개념 자체를 날카롭게 양분해 사용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에 대한 해석은 없는 순수한 이성의 산물로서 성서를 보기에 철학이 가능하다는 것인지, 성서 속 계시들을 우리 이성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는 것인지 명확히 알고 싶다.

성서의 인간적 특질에 대한 이성적 연구는 당연히 성서를 계시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데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되며, 이를 위한 역사적, 문학적, 장르적 연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도 큰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것을 삶 속의 구체적 문제에 적용할 때 정말 계시의 영역을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저자는 구약성서가 가르치려는 바를 더 온전히 깨닫기 위해, 구약성서를 이성적 작품으로 접근하길 제안한다. 또한 구약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원한다면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포기한 후 성서적 형이상학의 이성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동시에 향후 성서적 형이상학에 근거한 새로운 계시 개념을 형성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고자 할 때 보는 책이지, 인류가 무엇을 발견해 왔는지 궁금해서 보는 책은 아니다. 구약성서가 서양의 철학적 사고에 어떤 역할을 했든 그렇지 않든 그것도 목적이 아닌 그저 결과론적인 부분이다.

적대감과 절박감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그의 주장에 반박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사도들은 예수가 실존했다는 법정적 증거로서만 신약성서를 저술하지 않았다. 바울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하며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윤리적 행위를 명확히 제시한다. 야고보의 서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규범을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끌어 가기 위해 보편타당하게 적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성과 계시를 구분해 사용한 그들의 사고 전제를 나무랄 수 없다. 창세기에서 열왕기까지의 저자가 그 당시 고대 근동 관습에 따라 역사서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했던 것처럼, 주후 1~2세기 문화를 파악한 후 신약성서를 읽고 이해하면 된다. 한 가지 더 항변하자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신약성서를 증거로 들이밀며 재판관 위치에 서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증인일 뿐이다. 재판관은 항상 하나님이고, 우리는 과거에 그런 재판관 앞에 있던 죄인이었음을 매일같이 고백한다. 단지 재판관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그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죄인석에 있는 피조 세계가 회복되길 함께 기다린다. 저자가 이방인이 구약성서로 철학하길 권유하는 것처럼, 우리도 아직 죄인석에 있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에 이르길 소망하고 변증한다.

책을 읽어 나가는 동안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우선 이방 강국들인 이집트, 블레셋, 바빌로니아 등과 이스라엘의 대립 상황을 묘사할 때마다 느껴진 저자의 미묘한 적대감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 원인을 정치철학으로 논한다. 저자는 이집트로부터의 저항과 혁명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본다. 가나안 정착 초기의 무정부적 자유 상태도 긍정한다.

그러나 질서 없이 큰 타락으로 추락한 야만의 이스라엘이 왕정을 성립해야 했을 때 그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규범은 주변국과 달리 말, 아내, 금을 절제하는 왕의 율법이었다. 급기야 백성과 왕이 정의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양치기들의 특징, 즉 왕의 율법을 상실한 순간 왕국이 망했다고 주장한다. 무정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면, 구약성서가 제시하는 유일한 제도적 대안은 제한적 통일국가다.

이때 꾸준히 대조되는 주변 강국들을 향한 저자의 정서는 마치 한일전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대다수 한국인이 일본을 바라보는 정서와 비슷했다. 18세기 말 유럽의 역사와 사상에서 유대적인 모든 것을 유해하거나 불필요하게 치부하는 계몽주의자들을 언급할 때도 이와 같은 적대감을 느꼈다. 이 역시 20세기 중반 가장 큰 인류의 비극과 무관한 감정일지 궁금하다. 만일 저자의 감정이 그렇다면 그 감정이 더 예리하고 세밀하게 실렸을 것이다. 구약성서가 그들의 뼈와 살을 그대로 담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감정은 절박감이었다. 저자는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는 예레미야 선지자 주장을 전한다. 선지자는 진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범죄라고 명시한다. 이를 왕, 선지자와 같은 지도자의 책임으로 국한할 수 없고 각 개인이 스스로 질문하고 조사해야 하며, 예루살렘 시민 중 단 한 명이라도 진리를 부지런히 구하면 예루살렘을 구원할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유대인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이 스룹바벨 성전 재건을 끝으로 멈췄다고 생각하기에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 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정치적 메시아에 머무를지라도 그 열망은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을 만큼 절실해 보인다. 말라기 선지자 예언 이후 진행되지 않는 언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발버둥 치며, 성서의 행간에서까지 의미를 집요하게 파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구약성서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이 혹시 우리를 상대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직 메시아를 기다리는 한 유대인 학자와 같은 절박감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도 역시 이미 왔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나라를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리는 다시 올 메시아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세상으로 오는 중인지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토라를 자연법으로 이해하는 예레미야의 사상이 인간 지성의 완악함에 대한 치유책도 제공할 것이란 저자의 기대감은 희망을 준다. 인간 지성의 완악함이 저질러 놓은 테러와 전쟁, 빈곤, 기아, 자연재해, 환경오염 등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무섭고 안타까운 일이 비일비재하다. 잘살 것 같다는 교만 뒤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나약한 인간성이 매번 비춰진다. 대한민국의 세대와 계층 차이는 사회, 정치, 경제 곳곳에서 분열을 일으킨다. 점점 사회에 존경할 어른들이 사라지고, 나라와 민족을 품는 젊은이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이 참으로 유익한 것에서 이탈할 때의 결과는 인간의 지성으로 인지되지 않는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목격한다. 그렇다고 개인의 잘못을 따지며 탓하기에는 한계가 보인다. 구조적 문제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며 함께 노력하는 올바른 연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예루살렘이 회복될 때처럼 말이다.

사람들에게 바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알려 주고, 사람들이 모이게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러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 지성의 회복, 최선을 다하는 이성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찰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예수의 맹목적 죽음은 역동적으로 부활했기에 진리다.

구약을 통한 철학 행위가 언약 백성의 도입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이 생각을 바울의 이신칭의 문제까지도 확장하여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항상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칭의가 아닌 성화와 구원의 관계이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하나님이 동일하게 요구한 윤리와 진리 추구의 진중함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하여 고민할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이해가 참된 것이라고 증명되도록 종말론적 '다바르'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모든 민족의 제사장인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자랑하고자 구약성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질문을 교회와 복음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도록 우리 스스로도 해 볼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이민희 / 전도사, <크리스찬북뉴스> 우대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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