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어느 행사 자리에서 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Barack Hussein Obama II)라는 이름 때문에 무슬림으로 오해받고, 미국이 아닌 케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비난받던 미국 흑인 대통령은 "오늘 (나의) 출생 비디오를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후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The Lion King, 1994)' 한 장면을 틀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개코원숭이가 갓 태어난 새끼 사자 심바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오바마는 왜 이 비디오를 틀었을까. 자신의 출생 의혹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그 행사에 참석한 트럼프를 엿 먹이기 위한 연출이었다. 연출은 대성공이었다. 오바마에 우호적인 언론들은, 이 사건을 오바마의 지적 우월성, 유머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 준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트럼프가 그 자리에서 매우 씁쓸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매우 씁쓸한 조크다. 오바마가 심바처럼 아프리카 태생인 것은 맞지만 오바마는 검은 곱슬머리의 흑인이고, 심바는 황금빛 갈기를 지닌 사자이기 때문이다. 사자의 황금빛 갈기는 '블론드 헤어'로 상징되는 백인 우월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과거에는 게르만 우월주의에서 지금은 앵글로색슨 우월주의로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5년 뒤, 트럼프는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오바마는 물러나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야말로 블론드 헤어를 가진 진짜 사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성 우월주의,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로 비난받던 디즈니의 '주술'이 현실에 제대로 먹혀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왔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성, 과학, 세속이라는 또 다른 주술에 걸린 현대인들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주술사가 국정을 통치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수 있다.

'라이온 킹'에 담긴 백인 우월주의

그럼 '라이온 킹' 내용을 살펴보자. 줄거리를 정리하면 이렇다.

블론드 헤어, 순수 혈통의 사자 무파사가 통치하던 아프리카 초원에 경사가 생긴다. 아들 심바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은 심바의 삼촌이자 검은 갈기, 눈에 깊은 상처가 난 스카가 하이에나를 사주해 무파사를 죽음으로 이끌었기 때문. 더 비극적인 사실은, 심바가 아버지 무파사의 죽음을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멀리 떠나 방황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바는 결국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피의 순수성'을 깨달아 다시 초원으로 돌아와 검은 사자와 하이에나를 물리치고 세상의 왕이 된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대단히 지엽적인 것일지 모르지만, 아프리카 초원 초식동물들에게는 검은 사자와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히는 것과 블론드 헤어의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를 느끼고 있는 걸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끝에 가서 하겠다.

지금 중요한 의문은 이것이다. 왜 하필 블론드 헤어에 대항한 세력이 상처 입은 검은 사자와 하이에나인가. 황금빛 갈기의 사자가 백인의 은유인 것처럼, 검은 갈기의 상처 입은 사자는 미국 흑인의 은유인 것처럼 보인다. 검은색이라는 상징이 그렇고 상처가 그렇다.

상처가 의미하는 것은 백인들에 의해 아메키카 대륙에 노예로 끌려와 착취당하고 차별당하고 세뇌당하다 죽임을 당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다. 1968 혁명 당시 행동에 나섰지만 경찰에 의해, 암살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다. 그 트라우마는 보상받고 치유받아야 할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디즈니는 그 상처를 정상에 대비되는 '비정상'으로, 왜곡되고 비뚤어진 인격으로 표현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에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더럽고 비열하며 떼로 몰려 다니고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도맡아 한다. 그런데 이것은 - 백인의 눈으로 볼 때 - 미국 어느 뒷골목에서 볼 수 있는 장면으로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마약을 거래하며 킥킥대고 다니는 히스패닉에 대한 묘사다. 실제로 극 중에서 하이에나들은 히스패닉 억양을 쓴다. 블론드 헤어의 왕국을 분노한 검은 사자가 더럽고 비열한 하이에나들을 사주해서 빼앗았다는 말이다. 전형적인 인종주의로 보인다.

그러나 디즈니의 '주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카는 연단에 서서 연설을 하고, 이후 하이에나가 사열하는 장면을 보자. 연설하는 스카의 모습은 소련의 레닌, 스탈린을 연상케 한다. 연단 앞에서 하이에나들이 행진하는 모습은 소련의 행진 모습과 같다. 디즈니는 이 장면을 통해 당시 미국의 적이던 소련의 크렘린 붉은 광장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신의 클라이맥스에는 뾰족한 산꼭대기에 걸쳐진 밤하늘의 초승달을 롱 테이크로 잡다가 마지막에는 커다랗게 클로즈업한다. 망치와 낫은 소련의 국기다. 교묘한 무슬림 혐오가 끼어든다. 밤의 초승달은 이슬람의 상징이다.

'라이온 킹'의 교훈은 소수 인종, 좌파, 무슬림은 황금빛 갈기를 지닌 사자들의 적이라는 메시지로 비춰진다. 그러나 디즈니의 주술 중 가장 악랄한 것은 따로 있다. 심바는 아버지 무파사를 죽였다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비춰지는 대목이다.

심바는 그 뒤 방황을 하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심바는 흑색 맷돼지, 미어캣과 친구가 된다. 초식동물과 친구가 된 것이다. 사자인데도 심바는 고기를 안 먹고 대신 벌레를 먹는다. 이는 아버지 세대의 애국주의, 인종주의,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 가족주의에 맞서 저항했던 1968 혁명 당시 백인 청년들 모습처럼 보인다. 당시 심바의 갈기는 방황하는 히피의 장발을 닮았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다. 심바의 갈기 색깔도 블론드보다는 브라운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변한다. 그의 갈기 색깔은 확실한 금발이 된다. 갈기에 권위와 힘의 아우라가 에워싼다. 디즈니가 피부 색깔을 갖고 장난 치는 것은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알라딘(Aladdin, 1992)'에서도 처음에 알라딘은 피부는 갈색이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색은 옅어져 마지막에는 흰색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좀 더 살펴보면 이 장면은 아버지에 저항해 방황하던 1968년 백인 청년들이 하나둘 돌아온다는 것을 말한다. 돌아온 탕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신보수주의', 노골적으로 말하면, 파시즘의 주창자가 되어서 돌아온다. 이 같은 서사 구조는 1980년대 할리우드의 주요 주제다. 아버지의 귀환, 아버지로 빙의하는 아들 등 말이다.

좌절된 혁명들

우리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아들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친 살해(patricide)'를 완벽하게 수행해야 한다. '상징의 영역'에서 말이다. 아들은 그래야만 온전한 남자가 되고, 온전한 성인이 된다. 그러지 못하면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거세 공포로 온전한 성인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실제로 아버지를 살해하면 존속살해범이 된다. 이것 또한 온전한 성인이 되지 못한 병리적 현상이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모계제를 대신해 등장한 가부장제에서 가부장은 아버지면서 왕이면서 착취자이면서 사제다. 아들은 이에 종속적인 존재다. 그런데 시민 문명은 혈연, 부족, 신분, 종교, 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탄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요구하게 된다. 시민들, 시민 문명은 부친 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제대로 설 수 없다.

1968년 미국의 젊은이들은 '부친 살해'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다시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주류가 된 미국은 현재 급격하게 파시즘의 길로 갔고, 이것은 트럼프의 당선으로 나타났다. 이제 세계시민 문명에는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었다.

그들은 왜 부친 살해를 수행하지 못했을까. 권위주의, 금욕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섹스, 마약, 폭력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파멸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불이 붙었던 68 혁명은 어떻게 끝을 맺었다. 미국의 경우 사랑과 평화를 상징했던 우드락 페스티벌이 폭력, 윤간, 마약으로 끝나면서 쇠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독일의 경우 적군파, 일본의 경우 전공투의 극좌 테러리즘이 발흥하면서 쇠퇴의 길을 가게 된다.

역사적으로 혁명은 이런 예가 매우 많다. 프랑스혁명을 봐도 단두대에서 왕의 목을 자르고, 나아가, 같은 혁명가들, 같은 시민들의 목을 자른 파리의 혁명 세력과 시민들은 이후 양심에 의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테르미도르의반동이라는 보수의 회귀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 그중 적지 않는 수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혁명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교장의 머리에 고깔을 씌우고 목에 팻말을 걸고, 광기에 찬 인민재판과 자아비판을 하고, 제트기 타기 자세라는 굴욕적인 자세를 강요했으며, 심지어 따귀를 때리고 침을 뱉던 홍위병들은 어떻게 되었나. 아드레날린으로 가득 찬 혁명의 공기가 진정된 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후 무능한 세대가 되어 개혁 개방 이후 나타난 중국의 보수화, 배금주의화, 속물화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들이 파시스트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라이온 킹'은 과거 1등 시민으로서, 흑인을 노예로 부렸지만 지금은 흑인 또한 시민이 되었다. 나아가 흑인도 사회로 진출해 성공하게 됐다. 오늘날 미국 모습이다. 값싼 노동력 때문에 대규모로 미국으로 이민 왔지만 가난에 못 이겨 범죄자가 되어 공포의 대상이 된 히스패닉. 그 수가 많아져 선거를 하게 되면 백인을 물리치고 히스패닉의 나라가 될 오늘날 미국에 대한 하층 백인들의 좌절감과 분노, 광기의 표현이 미국 파시즘에 굴복하는 것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백인 우월주의 앞에서 백인들은 행복할까. 그렇지도 않다. 단순노동자나 실업자, 청년에 불과한 하층 백인들의 경우 백인 우월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 자기네들 또한 자신보다 약한 초식동물들을 마음껏 잡아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 사자가 최고 포식자로 있는 먹이사슬 속에서는 개, 고양이 같은 약한 육식동물들 또한 사자의 밥일 뿐이다. 단지 피부색이 같다는 이유로 봐주지 않는다.

문제는 초식동물들이다. 이들은 미국으로 이주 온 소수 인종들로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부자가 되기 위해,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하여 중동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곳으로 갔다. 그러나 디즈니 등의 주술에 마비된 이들은 자신의 총에 죽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 친구, 동포라는 사실은 잊는다. 그리고 그들 또한 사자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이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의 경우를 보자. 오늘날 우리는 주체사상과 레닌주의에 심취해 극렬하게 운동하던 1980년대 대학생들이 오늘날 '뉴라이트'가 되어 파시즘 정권에 부역하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결국 이명박, 박근혜를 대통령을 만든 사람은 바로 우리들, 대한민국 시민 아니던가.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사람의 죽음 앞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이것이 오늘날 '헬조선'의 모습 아닌가.

그렇다면 시민들은 전 세계적으로 발흥하는 파시즘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다시금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혁명에서 필요한 것은 우애(fraternity)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와 평등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가치이지만, 이것의 의미를 시민들은 알지 못했다.

박애가 없는 자유는 자본만의 자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며 파괴할 자유를 의미한다. 박애가 없는 평등은 모두가 획일적이고 평균적인 '인민'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박애가 없는 혁명은 폭력을 낳았고 결국 그것은 혁명을 반동화시켰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민혁명은 기독교 정신과 결합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 미제라블'의 신부의 사랑, 장 발장의 사랑이 떠오르는 밤이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고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 하나

저 너머 장벽 지나서 오래 누릴 세상
자 우리가 싸우자 자유가 기다린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고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너의 생명 다 바쳐서 깃발 세워 전진하라
살아도 죽어서도 앞을 향해 전진하라
전 순교자의 피로써 조국을 물들이리라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신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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