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원고에서 한국의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고통의 무게에 대해 쓰면서 글을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삶의 무게는 그 삶의 부피는 전혀 줄지 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어지럽고,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한숨과 저항의 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경제, 사회, 환경, 교육, 여러 분야로 총체적 난국이지만, 이 난국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미로 정치, 특히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지면의 한계상 오늘 다룰 민주주의 주제는 다음 원고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2016년 11월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주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주다. 모든 예상을 뒤엎고 도날드 트럼프(70세)가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선거 바로 다음 날부터 미국 전역에 거쳐 많는 시민들이, 특히 많은 젊은 세대 그룹들과 여성들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면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선거의 패배를 무기력한 한탄이 아니라 저항의 소리로 바꾸면서 이렇게 외쳤다.

"트럼프는 우리 대통령이 아니다", "트럼프가 공공연히 떠드는 여성 혐오, 백인 우월주의, 반이민, 반이슬람, 반외교정책으로 가득찬 미국은 우리가 믿고 꿈꾸는 미국이 아니다."

이렇게 거리로 나온 많은 이들에게 선거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꿈꾸는 미국, 인권과 약자, 여성, 종교, 이민, 이주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을 향한 투쟁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시위는 그동안 노력해서 성취해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포함한 미국 시민 인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의 역사적 진보가 역행되고 있는 현실을 그냥 앉아서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해 새로 선출된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71세)는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마약 거래를 했다고 의심이 되는 시민들을 공정한 사법절차 없이 마구 죽이고 있다. 히틀러처럼 자신도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다고 공적 선포를 하고 있다.1)

도저히 정상적인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적법하게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말도 행위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인 악행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전쟁 이후 약 40년간 군사독재 불식을 위해 그토록 많은 투쟁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드디어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는다고 믿으며 21세기를 열었다. 그러나 짧은 10년이었다.

두 번의 정권 교체 이후 신자유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군사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세력의 힘으로(아니 우매한 대중의 선택과 비판적 사고의 결여, 이 부분을 다음 원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2007년 이명박을 경제 대통령이라는 환상으로 만들어 당선시켰다.

이명박과 그를 지지한 보수 정권은 지난 5년 동안 인권, 경제만을 망친 것이 아니라 환경(4대강 사업)까지 파괴시키고, 서민, 약자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 5년간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른바 독재가 양산한 삶의 쓴맛을 덜 봐서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는걸까? 한국은 다시 2012년 12월 대선에서 독재자의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선거의 결과 전후로 한국에선 새로운 영어-한글 퓨전 용어가 퍼져나갔다: "멘붕(mental 붕괴)."

2016년 11월 8일 트럼프의 당선 소식으로 많은 미국인들, 그리고 그 선거를 지켜봤던 전세계는 일종의 "멘붕"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캐나다에선 그렇다. 최종 확정 결과가 워낙 늦게 발표되어, 많은 사람들이 잠을 설쳤다. 11월 9일 이른 아침 발표된 선거 결과를 지켜보고 출근해 멍해 있는 학교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 난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멘붕" 용어를 설명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정치적 결과가 미치는 멍 때리는 정신 상태에 동감한 것이다.

지난 4년 동안 박근혜 정권하에 한국의 상황은 이명박 정권때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아니 그때 저지른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삶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 말했다. 그래서 이런 죽음 같은 삶을 설명하는 또다른 퓨전용어가 탄생했다: "헬조선."2)

멘붕에 비해 훨씬 자조적이고 잔인하고, 강한 혐오가 담겨 있는 표현이라 사실 조금 섬뜩하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지옥 같은 한국의 상황을 표현하기보다, 지옥이 되어라 하는 자폭과 자신 혐오가 강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런 헬조선의 현실도 부족한가? 최근 또다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최순실 파일"의 공개 사건이다. 이로 1987년 6·10 항쟁처럼, 1960년 4·19 항쟁처럼 전 국민들이 분노하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로드리오 두테르테, 박근혜, 이 대통령의 당선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당선이다. 제정신이 있는 자라면, 최소한의 이성적, 비판적 교육을 받은 자라면, 민주주의와 최소한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들을 대통령이 될 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당선된 것이다. 그것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정권이 탄생되어서, 이른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들의 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오늘 이런 비정상적인 정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멘붕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해, 아니, 이런 지옥, 죽음 같은 상황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는 민중들과 시민들의 폭력을 끊어 내기 위해, 요즘 미국, 한국, 필리핀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로 표현한 학자의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니퍼 왈쉬는 2016년 CBC - Massey Lectures강의를 맡도록 영광의 선택를 받은 정치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이다.3) CBC - Massey Lectures는 캐나다 공영방송(CBC)과 토론토대학 소속 Massey College 그리고 House of Anansie 출판사의 합작품으로, 매년 캐나다인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을 한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예술가, 문학가 등이 선택되어 자신들의 관심 주제를 심도 깊게 발표하는 행사이다. 1961년부터 이 강의는 매년 지속되어 왔다. 5일동안 5번 강의가 매일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이 되며, 전국을 돌면서 강의가 행해지고, 강의내용은 책으로 출판이 되어 두루 읽힌다. 이른바 CBC - Massey Lectures는 공신력있는 캐나다의 지적 운동의 양산지라 할 수 있다.4)

제니퍼 왈쉬는 현재 이탈리아 플로랑스에 있는 유럽대학 국제관계학과 석좌 교수이자, 최근까지 UN 자문위원으로 국제분쟁 문제를 깊이 관여해 온 학자이다. 왈쉬의 CBC Massey 강의 제목은 '역사의 회귀: 21세기 분쟁, 이주, 그리고 지정학'5)이다.

왈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른바 냉전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그 사건을 보면서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해석한 미국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인용하면서 강의를 열었다.6) 여기서 후쿠야마가 말하는 종말은 곧, 자본주의-공산주의의 대결의 끝을 의미했다. 동시에,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지칭했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진보한다는 낙관주의를 과감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후쿠야마의 에세이가 발표되고 25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선언한 종말은커녕 그 종말의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 이 점이 왈쉬 강의의 핵심 테제이다. 죽었다고 믿었던 역사가 좀비처럼 귀신이 되어 다시 현재에 나타난 것이다. 난 왈쉬가 주장하는 역사의 회귀를 좀비로 표현하고 싶다.

이런 좀비의 정체성은 죽음, 죽임이다. 좀비의 유일한 타켓은 살인이고, 억압이고, 정복이다. 좀비는 생존을 위해 가족까지도 죽여야 하는 존재이다. 2010년 방영 이후 아직까지 방영되면서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TV 드라마, Walking Dead7)가 이 죽임의 현현인 좀비현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왈쉬는 적법한 절차 없이 공권력에 의해 벌어지는 살인(앞서 예를 든 필리핀 포함), 소수 인종, 소수 종교인들을 향한 증오와 학살, 전대미문의 기아 상황(자연재해, 환경 재해 포함), 전대미문의 피난민 사태, 그리고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의 발원지이자 그러므로 본보기가 되어야 할 국가들(유럽, 미국) 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 불균등, 배타적 외교정책, 백인우 월주의, 수국주의, 인종차별의 현실을 자세하게 예로 들면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아니, 비민주주의적인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꾸로 가고 있는 민주주의는 소위 "고대시대, 중세시대 행해진 야만적인" 행위가 민주주의라는 근대주의 (모던니즘) 옷을 입고 재등장한 것과 유사하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 전제주의의 행태라는 것이다.

왈쉬는 우리가 방심하면, 즉, 깨어 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바로 거꾸로 간다고, 추악한 역사로 회귀한다고 조언한다. 왈쉬는 캐나다인으로서 유럽에 살면서, 또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두루 두루 살핀 오랜 경험과 토대를 기반으로 어떻게 역사가 좀비로의 회귀를 거듭해 왔는지 보여 준다.

동시에, 그 회귀를 막고자 한 인간들의 노력, 분투, 그리고 승리까지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역사는 한 번 진보하면 바뀌지 않는 딱딱한 돌덩이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행위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유리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니, 흐르는 물처럼 상황에 민감하고, 그래서 쓰나미처럼 우리 삶을 송두리째 가져갈 수도 있고,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목마른 우리 삶을 살려 내는 움직이는 제도이다.

동시에, 우리의 바르고 꾸준한 노력으로 더 성숙하게 유지, 지속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깨지지 않게 그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노력하고, 투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격려를 하면서 강의를 마친다.

왈쉬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대선을 거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가 얼마나 역사를 가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뼈저리게 배웠다. 상황이 어렵고, 계란에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의미한 노력으로 보여도, 이것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다. 그 길이, 소중한 인권을 지키고, 약자, 소수자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단순한 이념도 아니고, 부질없는 믿음도 아니다. 이 길은 꿈틀꿈틀 살아 있는 심장과 같은 운동이자 끊임없은 개혁되고 지속되어야 하는 여정이다. 힘들고 지치고 온 세계 기운이 흐트러진 오늘, 그 운동의 한 예를 나누면서 소고를 마친다. 

캐나다는 이번 해가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제 선거가 있는 해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Saskatoon에서도 시장을 뽑고 시의회 의원들을 뽑는 선거가 10월 26일에 있었다. 새로운 물결,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기아 문제, 인종 문제, 원주민 문제, 환경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진보적인 후보 찰리 클락(Charlie Clark)이 있었다.

그러나 클락은 선거 당일까지 여론조사에서 계속 3위(후보자 4명 중)에 머물렀다. 즉 여론에 따르면 그가 당선되리라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그를 지지하고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이들은 쉼 없이 뛰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거운동을 했다.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소중한 노력과 한 사람 한사람의 투표로 시 선거 역사상 전대미문한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찰리 클락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8)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대학 실천신학 교수

각주

5) Jennifer Walsh, <The Return of History: Conflict, Migration, and Geopolitic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oronto: Anansie Press, 2016).
6)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New York: Avon Books, 1992). 1989년 에세이 'The end of History'는 저널 <The National Interest>에 기재되었고, 본 책에 다시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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