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받고 있다. 나 역시 충격과 분노를 넘어 자괴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도대체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요한계시록 17장이 떠올랐다.

요한계시록 17:1에는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땅의 임금들도 그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7:3에 보면 특이한 표현이 나온다. 그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17:3에서는 여자라고 표현했지만 문맥을 보면 3절에 나온 여자는 1절에 나온 음녀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음녀가 짐승을 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먼저 음녀와 짐승이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계 17:4)다고 하였다. 여기서 음행은 우상숭배를 가리킨다. 또한 이 음녀는 "땅의 임금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계 17:5)이다. 결국 이 음녀는 온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거짓 종교, 혹은 타락한 사상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짐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계 17:3)다고 했다.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을 가리키고, 열 뿔은 열 왕을 가리킨다. 결국 이 짐승은 악한 마귀의 조종을 받는 악한 나라들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이 활동할 때는 로마제국이 이런 짐승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짐승은 로마제국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짐승은 시대마다 옷을 갈아입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무리 옷을 갈아입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결국 사탄의 조종을 받는 악한 세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음녀가 짐승을 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음녀가 온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거짓 종교, 혹은 타락한 사상을 가리킨다면 짐승은 강력한 국가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음녀가 짐승을 탔다는 것은 거짓 종교나 타락한 사상이 강력한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것을 가리킨다. 1세기에는 여신 숭배를 주장하는 거짓 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정치 세력인 로마제국과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런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이라는 잘못된 사상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독일이 손을 잡았을 때 온 유럽을 피로 물들이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천황 숭배라는 사이비 종교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 군국주의가 손을 잡았을 때, 온 아시아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사이비 종교나 타락한 사상이 강력한 국가 체제와 손을 잡으면 괴물이 되어 버린다. 급진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이슬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진다. 김일성 우상숭배와 같은 잘못된 사상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독재 권력을 얻으면 그 속에서 참혹한 범죄가 벌어진다.

타락한 자본주의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물질 중심의 천민자본주의가 한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를 잡으면 수없이 많은 국민들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이런 거짓 종교나 타락한 사상이 강력한 국가권력과 손을 잡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어떻게 이런 환상을 보게 되었는가? 요한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과 그의 하수인들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갔을 때이다. 광야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곳이다. 광야는 오직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지 않으면 먹을 것도 없는 곳이고, 반석에서 물을 주시지 않으면 마실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신앙의 위인들은 자주 광야로 갔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로 갔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전에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돈과 쾌락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취해서 사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영적인 비밀을 볼 수 없다. 악한 사탄과 그의 하수인들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보지 못한다. 오직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간 사람만 이런 영적인 실체를 통찰할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 광야로 간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야 한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 가운데 절대자를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광야는 단순히 고독한 장소가 아니다. 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다. 세상의 소리를 멀리하고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다. 요한과 같은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려면 정기적으로 광야로 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분과 고요히 대화할 수 있는 광야로 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이런 영적인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 상황인가?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비극은 사도 요한 같은 통찰력을 가진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이 우리 눈앞에 현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악한 현실을 통찰하여 시대를 깨울 선지자가 없다는 것이다. 음녀가 짐승을 타고 온갖 해괴한 짓을 일삼고 있는데도 많은 목회자들은 그 권력자들이 제공하는 달콤함에 취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돈과 쾌락과 명예의 우상에 빠지지 말도록 성도들을 권면해야 할 책임이 있는 목회자들이 도리어 이런 우상숭배에 앞장서고 있다. 목회자들이 교회 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다. 걸핏하면 목회자들의 성폭력 사건이 언론의 뉴스란을 도배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권력이 제공하는 달콤함에 빠져 온갖 명예를 차지하려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니 어찌 이런 분별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 자들이 어찌 권력자들을 비판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 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가 3:9-12)

안진섭 / 대전 새누리2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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