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국가의 존립 가능성이 의심받고 있다. 판타지 소설이나 가상 역사소설의 상상력이 동원될 필요도 없다. 2016년 지금,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말 많고 탈 많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의미 자체가 근본적으로 의심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중심에는 박근혜 대통령이란 이미 우스꽝스런 상징이 되어 버린 꼭두각시 인형의 굿판과 그 굿판의 배후를 잠식한 맹신이란 감옥에 갇혀 버린 무뇌의 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괴물이 어떻게 자라났는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또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대한민국은 멈춰 섰다. 아니, 멈춰 서야만 한다. 이 사태 앞에서도 계속 굴러갈 거라고 믿는 작태의 반복을 더 이상 국가로 봐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들이 말한 것처럼 국민은 개, 돼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괴물의 탄생은 독재, 그리고 독재적 무의식을 등에 업은 종교, 이 두 가지 먹잇감에 취한 상태로 시작되었다. 총과 칼을 앞세운 독재의 망령은 정의와 질서 회복이란 명분으로 포장된 뒤 더 이상 망령이 아닌 실제로 엄존했다. 5·16 쿠데타에서부터 시작해 유신헌법에 이르기까지 독재는 안보와 질서 수호라는 명분 뒤에 숨어 총과 칼이란 무기를 마구잡이로 자행해 오며 그 망령의 우상을 실제의 통치 권력으로 둔갑시켰다. 실제로 20여 년 가까이 독재의 지속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러한 독재의 지속이 가능케 된 요인 중에는 망령의 무의식을 현실의 적당한 위무로 채워 나가던 경제성장과 종교 부흥의 모티브가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경제성장의 떡고물은 마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내라는 예수님을 향한 마귀의 유혹에 대한 반응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우주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러한 기운의 중심에는 우상으로서의 신이 존재했다. 독재의 망령에 취한 이들은, 눈에 뵈는 게 없는 괴물의 DNA는 그 우상의 신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영생교의 불로장생 신이든 상관없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독재의 아우라에서 '독재'란 두 낱말을 은폐하는 데 혈안이 되어 버린 게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된 것이다.

그 존재 이유로 한국 기독교가 생존해 왔다고 말하는 게 과연 지나친 비약일까. 최근 추문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국기 문란 사태의 주범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을 목사라 부르지 말라고 뒤늦게 발을 빼는 한국교회언론회의 주장처럼 정말 일부 사이비 광신도들의 난리 블루스로 치부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묻고 싶다. 그 일부 사이비 광신도들에게 눈이 멀어 버려 국민주권을 홀랑 다 갖다 바치고 그들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경제성장과 종교 부흥의 합심 기도를 올려 바치던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뭐란 말인가. 정말 그 누군가가 언급한 것처럼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다 끝내 제물이 되어 잡아먹히는 개, 돼지들이란 말인가. 과연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 일부 사이비 광신도의 촌극이라고 거리두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닐 거라 믿고 싶다.

눈먼 자들이 미쳐 날뛰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듯 눈먼 자들이 미쳐 날뛰는 굿판 역시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눈먼 자들의 광기의 칼춤을 넋을 놓고 지켜보던, 아니 오히려 표를 몰아 달라고 수많은 성도들을 현혹하고 호도하던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목사들의 우매함 역시 교회의 참모습은 분명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정교분리라는 이름의 계급장을 떼고 솔직한 맨얼굴로 국가와 종교, 독재와 신앙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해 볼 차례다.

국가와 종교

솔직히 말해 정교분리란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실현된 적도 거의 없었다. 20세기가 넘은 기독교 역사를 살펴봐도 정교분리의 역사는 제도적, 피상적 분리 의지의 지속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가 정치의 시녀 노릇을 하든, 정치가 종교의 불온한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힘의 도구로 쓰이든 둘의 관계는 대립과 순응의 코드로 뒤얽힌 필연적 공생 관계로 진화되어 왔던 것이다.

공동체의 양심이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제도 분리를 하는 접근, 종교와 정치의 이권 관계에 대한 상호 개입을 최소화시키는 작업이 이른바 근대화된 시민 의식이 일궈 낸 잠정적 평화 연대일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기 드물었던 참된 공동체 의식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필연적 공생 관계에 얽혀 있음을 오히려 철저히 긍정하고 그 공생 관계의 접점을 제도적, 의식적, 문화적으로 최소화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빛을 발해 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종교, 특별히 경제성장의 속도와 비례해 놀랄 정도의 양적 성장을 일궈 낸 한국 기독교는 여전히 강고한 종교 세력화의 한 축을 차지하면서 말로는 정교분리의 원칙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하며 실제로는 경제성장의 궁극적 그늘인 독재의 망령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음을 부정해선 안 된다. 총과 칼로 바른 말하는 이들을 탄압하고 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독재의 야만 앞에서 종교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그 독재의 망령이 본래 종교의 본질이었다고 믿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동화 과정에 기꺼이 헌신해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 주류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 동란을 겪은 이후, 독재 시대의 망령을 망령으로 규탄하지 않고 공산주의 정권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하는 필연적 선택 과정으로 설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학살의 방조다. 직간접적으로 독재를 용인하면서 겉으로는 포장된 자유민주주의를 슬그머니 받아들이는 이러한 행태가 정치 안에 숙주처럼 기생한 종교, 혹은 한국 기독교 주류의 맨얼굴이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후광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의 그늘에서 찾으려 하는 몇몇 무리들의 오만한 국기 문란 행위는 독재의 실제적 통치 기반은 사라졌지만 신자유주의로 인해 탈정치화된 민중의 정치적 환멸을 교묘히 이용해 국가의 사유화를 자연스런 결과로 받아들인 참극으로 발전되었다. 그렇게 국가가 사유화되던 와중 국민의 삶의 질은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공적 의식의 거세가 뒤따르고 말았다.

이러한 실타래의 근원에는 종교 상위이든, 정치 상위이든 정치와 종교를 위계의 상관관계로 받아들이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태된 우상숭배의 허위가 내재되어 있음을 피해선 안 된다. 더욱이 일제 식민지 시대와 분단의 아픔을 겪은 한국 사회의 취약한 한 본성으로 자리 잡은 독재와 신앙의 동일시를 외면하고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건 대증적 인식, 대증적 처방이란 결과만 반복할 뿐이다.

독재와 신앙

복수의 언론에서 밝힌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의 배후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무리의 배후에는 종교적 무의식에서 시작된 정치, 정무적 판단의 절대 의존의 고리로 사이비 종교, 혹은 신비주의와의 조탁이 상존해 왔음이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사이비 종교의 기생과 발전 과정이 어떻게 독재와 힘을 같이할 수 있었을까.

독재는 주류이며, 실재하는 힘이다. 반면 사이비 종교는 주류가 단죄할 만한 혹세무민과 저급한 샤먼의 옷을 입고 있다. 그렇기에 독재와 사이비 종교의 조합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무적 판단의 배후에 한 여자의 사적 전횡이 엄존해 왔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게 된다. 한기총이나 언론회, 한교연 등의 성명서를 통해 나타난 의중처럼 의지할 곳 없는 대통령이 잠시 마음이 흔들려 사이비 종교의 가르침에 심취했다는 말인가. 이 명제는 절반의 답과 절반의 오답, 모두 갖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작금의 사태는 비정상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어떤 비호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비상식의 극치다. 그런 맥락이라면 이 사태의 움직임이 비정상성으로서의 종교, 다시 말해 사이비 종교에 의해 국가권력이 놀아난 상황이 분명하므로 문제 근원에 대한 절반의 답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재의 망령이 사라지지 않았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민주적 절차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고 그에게 권력을 위임한 수많은 국민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세상이다. 우리의 종교, 우리의 교회는 사이비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안에 이단, 우리 안의 비정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핑계 불가의 한 징후이며, 그 징후의 중심엔 독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독재의 그늘에서 안식하려 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신앙이 존재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런 맥락에서 태생적으로 독재의 후광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그 스스로 신앙의 대상, 곧 우상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악무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눈먼 자들의 국가, 눈먼 자들의 교회

불행히도 오늘의 주류 교회는 정치의 시녀 노릇을 하던 종교란 이름의 괴물이 산출해 낸 비정상적 권력 행사에 대해 눈감고 귀 막으려 하고 있다. 현 사태에 대해 침묵하는 설교, 동시에 정치판을 비판하거나 정치인들을 향해 날선 비난을 가하는 설교조차도 눈먼 자들의 교회 범주에서 예외일 수 없다.

오늘의 교회는 눈먼 자들이 일궈 낸 사이비 광신도들의 굿판이 정치와 권력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 이상 국가일 수 없는 국가에 대해 철저히 눈먼 상태로 기능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독재와 왜곡된 신앙이 같은 이름이듯 종교적 무의식이 정치와 권력에게서 자행되는 온갖 폭력과 부조리를 맥 놓고 허용하게끔 방치한 교회 전체의 책임의식을 회피하려는 야비한 무의식에 불과해 보인다.

눈먼 자들의 국가를 살아가는 교회 역시 눈먼 자들의 교회다. 이 엄존한 교회 현실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지점은 그만큼 협소하지만 또 그만큼 또렷해 보인다. 바로 눈먼 자들의 교회 문을 박차고 걸어 나오는 것이다. 광야로, 광야로, 옛 선지자들이 말하던 외롭고 서글프지만, 그만큼 경이로운 신의 장엄이 펼쳐지는 광야로 걸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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