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가르침의 근본은 나를 찾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나를 찾으면 진리를 아는 사람이고 나를 못 찾으면 우매한 사람이다.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잘 사는 사람이고,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잘못 사는 사람이다.

대체로 우리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고 산다. 이 진리는 '나'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물은 모두 나를 위해 있고, 세상에 존재하는 게 나와 상관이 없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의미가 있기 위해 나와 관계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 '조치' 때문에 사물이나 자연이 파괴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남이 괴롬을 당하기도 한다. 나를 중심으로 도는 세상, 나를 장식하는 남. 이러한 이기심에 이미 상당히 오염된 우리는 이런 진리의 당연성에 마냥 취해 있다.

그러다 혹 '나'를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참지 못한다. 이는 인본주의 세상에서, 인문학이 최고의 진리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는 정설이다. 이런 '나'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은 어느 정도 진리일 수 있다.

하지만 상당 부분에서 비진리다. 달리 말하면 '나'를 '나' 되게 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바로 ‘나’다. 통상의 진리의 논리로 말하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으려면 '나'를 찾는 게 우선이다. 얼마나 못났는지부터 얼마나 무능한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잘났는지부터 얼마나 유능한지에 이르기까지.

그만큼이다. 거기까지만 하면 된다. 더 나가면 교만이다. 교만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패망의 앞잡이다. <에디스의 우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에디스는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가든 욱여쌈을 당한다. 서쪽으로 가려니 기골이 거대한 거인이 그를 가로막는다. 그의 이름은 에디스다. 그를 피하여 동쪽으로 가려고 하니 이번에는 막강한 군대를 지닌 나라가 가로막는다. 그 나라 이름도 에디스다.

하는 수 없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는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사자를 만난다. 다시 남쪽으로 가려 하지만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이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자의 이름도, 강의 이름도 에디스다.

결국 에디스를 동서남북에서 가로막고 못 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에디스다. 자신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렇다. 이 우화가 보여 주는 교훈은 진리다. '나'의 또 다른 자아가 나를 방해한다. 거대한 '나'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에게 '나'를 걷어치우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집착과 생각이 자신을 가로막는다. 끝없는 교만과 욕심이 자신을 지배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이런 '나'의 흉물다움을 피해 보려고 지식을 연마하고, 도를 닦고, 종교에 의지한다. 그러나 이런 각고의 수고들이 또 하나의 다른 '나'를 만들 때가 많다.

그 자리에 한 분을 두면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 욕심도 없이, 권세도 없이 그렇게 빛으로, 소금으로 살다간 그의 삶의 자취를 얹으면 어떨까. 종교가 아니라 신앙의 한 가운데 그분을 '나'의 자리에 앉으시게 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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