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게 혁명이다." - 조지 오웰

성경에서 말한 "지혜"(wisdom)는 품성이나 한 인격의 존재 목적이나 삶의 행실과 관련된다. 그런데 "지식"(knowledge)은 교육이나 경험을 통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객관적 정보나 기술적 이해력으로 지적인 체계를 가리킨다. 지식의 한계는 현실에 전적으로 일치할 수 없는 사실들의 축적이라는 데 있다.

지혜는 모든 사실을 현실에 응용하고 적용하는 능력이다. 명철은 사실들을 평가하고, 분별하고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며, 지혜의 틀을 갖추는 데 필수 요건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적 영역인 개인의 신앙, 대사회적 관계에서나 공적인 영역에서의 올바른 성경적 관점은 중요한 지침이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단 2:21)

잠언에서 강조하는 지혜는 이상적인 도덕성이나 선과 악의 분별, 올바른 사리 판단, 종교적 품성에서 드러나는 실용적인 현명함을 말한다. 성경은 수많은 논리로 교회 공동체, 정치사회적 리더들의 도덕성과 정의, 정치적 자유와 정의, 경제적 정의와 평등, 경제적 양극화 해소와 사회 안전망에 대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경은 좌우를 뛰어넘는 대안적인 체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기본적 지향과 가치만 실천해도 사회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To do what is right and just is more acceptable to the LORD than sacrifice) (잠 21:3)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계시하셨다. 죄는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 다만 율법이라는 기준이나 규범이 없었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가치 기준이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와 행동 양식에 관한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사람을 돌보시고 심판하시는 분(시 103:6)이다. 의로우시고,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 공의를 비추시는 분(습 3:5)이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

성경이 구분하는 '정의', '의', '공의'

성경은 '정의'와 '의', 그리고 '공의'를 구분한다. 미묘한 차이 같으나 각각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개념이다. 성경에서 정의는 법적인 공평보다는 더 포괄적 개념으로 쓰인다.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국가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약자나 소외자를 불법이나 악한 자로부터 보호하며 권력을 공정하게 행사하는 것, 공정한 사법기관의 간섭이나 개입이 적절히 작용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정의는, 하나님의 도덕법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상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올바른 결정을 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정의'(正義)는 올바른 도리(렘 33:15; 암 5:24; 시 33:5)를 말한다. 신학적으로는 서로 연결된 용법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이며, 죄 때문에 잃어버린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 33:15)

일반적인 '의'(義)는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윤리적인 성질, 윤리적인 표준에 일치하는지 여부에 그 기준이 한정되어 있다. 사회 또는 집단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인 차원이다. 성경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며 사회규범과는 구별된다. 법적이며 언약적인 차원이다. 사회적 약자(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보고 인자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세상의 상대적 정의를 초월하는 절대적 정의를 말씀하고 있다.

'의'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합당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의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는 이웃 사람에의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구약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의와 구원', '하나님의 의와 심판'에 관한 부분 외에 '예수님을 통해 인간에게 전이되는 하나님의 의'(로마서, 갈라디아서 등)가 등장한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 3:25; 행 13:38; 롬 4:3).

'공의(公義)'는 공명정대함과 의로움을 말한다. 공의는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한 행동과 관련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는 하나님의 규범과 도덕적 기준에 따라 옳은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공의'는 여러 가지 단어로 언급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의 공의란 그분의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 37:28).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 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 29:4; 렘5:1; 합 1:4; 습 3:5), 사람마다 이것을 행해야 한다(렘 7:5; 암 5:15; 미 6:8).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사 61:8)한다고 성경에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할 때에 이스라엘은 번영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시 10:18-22). 그러나 죄가 만연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그 존재 의미가 상실된다. 그 영광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 기반을 잃게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상 절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까닭에 악과 불의와 함께 거하실 수 없다. 그분의 언약에 잘 드러나 있다. 즉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을,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징계와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신 28:1-68).

'정의'와 '의', 그리고 '공의'를 지키고 행하는 자의 복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를 행하는 중요한 수단이 심판이다. 이 심판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현재의 성도들 행위에 대한 심판이나 징계와 종말론적인 마지막 날의 최후 심판이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와 용서의 은총을 예비해 두신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심판으로 인한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경우도 있다. 다윗 왕이 위대한 이유는 이러한 징계와 심판을 받을 때에도 모든 것을 자기 책임과 잘못으로 돌렸고 하나님의 성령, 영광이 떠남을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악과 불의에는 심판과 형벌을, 의와 선에는 축복과 상급을 주신다고 한다. 이를 율법 구원론이나 행위 구원론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은혜와 '구원'의 문제와는 별도로 행위규범과 신앙 윤리에 관한 문제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가 신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로 표현되었다.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 '샤-파트'에서 파생됐다.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의롭게 된다"(justification)는 뜻을 가진 헬라어 '디카이오수네'에는 본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 있다. 헬라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dikaiosune)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주로 쓰인 말이다.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와 같은 의미로 쓰인 말이다.

영어 성경에는 'justice' 혹은 'righteousness'로 표현한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로 번역했다. 그런데 본래 뜻과는 다른 헬라 문화의 산물이다. 헬라 철학자인 플라톤은 이 '디카이오수네'라는 단어를 'justice'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레떼'(덕)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동방 히브리 사람들에게 '디카이오수네'라는 개념은 그러한 '인간의 덕스러움과 선한 의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사람이나 사물의 상태를 가리킨다. '나'가 된 의, 의가 된 나, 인식과 실존인 존재적 정체성 개념의 의,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지위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무를 완전히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때의 표현이다.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 백성들로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대속하신 구속의 은혜로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권리를 말한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말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의'뿐만 아니라 경건한 행위를 지칭할 때도 쓰이고 있다(마 55:20).

하나님의 뜻에 반한 사회는 성경 진리로 변혁돼야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정의'와 '의', 그리고 '공의'를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 이는 크리스천들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자 그 목적이다. 사회적 현상이나 문제점에 대한, 더 근원적인 차원의 대안이다. 오늘날 사회문제, 불평등과 분배, 복지와 사회보장제도는 이차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의로움이란 하나님 성품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의에 도전하는 정의의 사자(암 5:24; 사 61:8; 시 146:6-9)로서 신실하고 정직한 태도와 실천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가치 체계다.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사 10:1-2)

국가적·사회적으로도 정의가 무너지고, 역사적 진보가 가로막히고, 지식인마저 패한 세상에는 문화나 예술가가 결국에는 나서서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게 된다. 운동경기에서 몸싸움이 안 되니 아웃복싱, 전투에서 전면전이 안 먹히니 게릴라전을 한다는 뜻이다.

시, 소설, 영화, 연극, 그림 등이다. 저항 문화이다. 다만 지식 엘리트는 거들뿐이다.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은 이에 편승하고 굴복과 좌절로 음주 문화가 확산되거나 상실감이나 회의감은 고조된다. 중독이나 타락한 문화의 범람, 성적 일탈이나 방종, 풍자나 해학, 아니면 냉소나 무관심으로 흐르기도 한다.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 두 극단의 모순은 확대 심화, 재생산되고 우리의 삶에 투영된다. SNS에서도 드러난다.

이때 대부분의 그릇된 교회는 방관이나 묵인, 이를 용인한다. 그리고 위로하며 모든 모순을 수용하기를 바란다. 선지자, 예언자적 역할이란 성경이나 신학적 지식에 불과할 때가 많다. 오히려 사회적 문제에 도피처로 작용하고, 악을 방기하거나 강화할 우려도 있고 결과적으로 이를 용인하게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한 사회는 성경 말씀으로 변혁되어져야 한다.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06:3)

황준배 / 목사·<카리스마적 리더십> 저자 (http://cafe.naver.com/jun7729191.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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