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연재하려 합니다.

1회
1) 성찬과 성찬 경험 - 하나님의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
2) 성찬 집례자의 자격과 성찬 참여 자격

2회
3) 성찬의 관행
4) 성찬의 의미
5) 성찬 경험이 있는가

이번 글은 2회입니다. - 필자 주

3) 성찬의 몇 가지 관행들에 관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한 성찬 관행(고전11:17-34)은 애찬과 성찬이 특별한 구별 없이 행해지던 시기에 일어났다. 고린도교회의 성찬 관행과 관련해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재차 환기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먼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정리하면 이렇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원래 유월절 식사이고, 성찬은 이것을 기반으로 제정된 것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베푸신 모범에 따라 애찬을 나누면서 성찬을 행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의 애찬이 서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애찬에서는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포도주도 일상처럼 마셨다. 부자라서 일을 할 필요가 없거나 일찍 일이 끝난 사람은 먼저 애찬을 마칠 수 있었고,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만 하는 사람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애찬을 나눌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지고 온 음식이 없어서 먼저 애찬을 시작한 사람들이 음식을 남겨 놓지 않고 다 먹어 버렸다면 굶어야 했다. 애찬을 일찍 마친 사람 중에는 포도주를 많이 마셔 취해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간단히 말해, 고린도교회 애찬은 일상의 거룩함을 경험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서로 함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가 주목하여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이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성찬의 의미를 되새겨 줄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였다. 이 내용은 복음서에 나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울은 마지막 만찬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주께 받은 것"(고전11:23)이라고 하면서 성찬의 진정성과 권위를 강조하였다. 성찬과 관련한 전통이 당시에 교회 전통으로 굳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편지에서 핵심은 성찬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찬 행위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성찬이 비록 애찬 형태로 이뤄지더라도 함부로 참여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한 성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혹은 자기 멋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 성찬의 공동체적인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린도교회 성도 중 아픈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이 그 원인을 애찬의 남용에서 찾은 점이다. 바울이 이런 사실을 언급한 것은 성찬이 비록 의식으로 거행되는 저녁 식사지만, 하나님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경건하게 지켜져야 하며, 그 효력이 우리 일상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분병과 분잔 관행에 대해 생각해 보자. 관행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비교적 규모가 큰 교회는 먼저 집례자의 기도와 분병·분잔 후 장로가 회중석을 돌아다니면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 일어서서 받든 앉아서 받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중소 규모 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식이다. 집례자가 서 있는 곳으로 나와서 받는 것이다.

굳이 무엇이 옳은 방식인지를 물을 수 없지만, 개혁교회 전통에 근거한 예식에 따르면 앞으로 나와서 받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다만 사람이 많기에 시간 관계상 장로들이 회중석을 순회하며 나눠 줄 뿐이다.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일어난 부작용이다. 할 수 있는 한 분병과 분잔은 앞으로 나와서 받으면 좋을 것 같다. 숫자가 많아 어렵다면 할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의 온전성을 판단할 때 전통적으로 성찬이 바르게 집행되고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는 것을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 성찬을 온전히 거행하기 위해서라면 교회 규모를 과감하게 줄이는 결단도 생각해 볼 만하다. 전통을 중시하여 집례자와 참여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마다하면서, 분병과 분잔 전통을 편의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정당할까? 교회 행위가 일관되지 못하면 성도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

한편, 성찬 경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 먼저 성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성찬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 보자.

4) 성찬의 의미

앞서 성찬의 제정과 관행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성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성찬은 원래 복음서에 기록된 것이다. 마 26:17-29, 막 14:12-26, 눅 22:7-23에 나와 있다. 바울도 복음서 전통에 근거해서 성찬에 대해 말했다. 복음서에서 전해지는 성찬과 의미는 그만큼 중요하다.

첫째, 복음서 본문에서 성찬은 종말론적인 지평을 갖는다. 마 26:29(막 14:25, 눅 22:18)에 보면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라고 나온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면서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둘째, 성찬의 순간에 가룟 유다의 배반 행위가 드러났다. 이것은 성찬 전에 죄를 회개하는 일과 성찬 참여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이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화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단순히 포도주와 빵이 아니라, 그것이 거룩한 효과를 갖는다는 점을 환기한 것이다.

성찬의 순간에 우리 죄는 하나님 앞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 전에 회개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 시기에 모양은 달라도 성찬 전 일주일 동안 매일 한 끼 혹은 3일이나 하루 정도를 금식으로 회개하면서 경건한 시간을 보냈다.

셋째, 성찬은 예수님 죽음이 구원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단순히 먹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선포라는 것인지, 아니면 성찬을 집례하면서 선포 행위를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문맥상으로는 집례 행위가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는 행위 자체가 선포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일 때마다 이것을 기념하여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의식을 행하는 것은 구원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위 자체로 구원을 선포하는 일이니 참으로 신비하다.

참고로 이와 관련해 언급할 점은 성찬 집례자가 스스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가톨릭에서 사제적인 의미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더 이상 사제의 의미와 전통을 계승하지 않는 개신교 관점에서 볼 때는 옳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타인이 건네주는 떡을 받고 잔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베푸는 자가 집례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 성찬이 갖는 선포의 의미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에게 선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넷째,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성찬의 공동체성이다. 사실 이것은 바울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다. 원래 유월절 음식 자체가 공동체적이다. 다시 말해 유월절 절기 음식을 먹을 때 가장은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한 후에 참여한 사람 모두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것은 유월절 음식이 원래부터 공동체성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바울은 유월절 음식에서 이 점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구원을 위해 중심이 되어 있는 데 비해, 고린도전서에는 공동체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고, 모두가 함께하는 식사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성찬을 단지 의식적인 행위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강조하였다. 특히 성찬이 의식 차원을 넘어 일상에 미치는 효과도 강조하였다.

다섯째, 바울이 전하는 성찬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성찬 자체가 예수의 죽으심을 전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여 과거의 사건을 상기한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 곧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셨고, 그럼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다시 한 번 듣고 또 확인하게 된다.

성찬 참여 자체는 과거 종말을 선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현재화하는 것이며, 우리가 회개한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가 지은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성경의 의미에 따르면, 성찬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마태복음 18장 '용서가 철회된 종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죄 용서를 스스로 철회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화해하는 의식을 행하는 게 좋겠다.

5) 성찬 경험

성찬 경험이란 복음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난 의미를 바로 알고 성찬에 참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사건, 곧 신앙 경험이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성찬을 행하는 것으로만 의미를 두는 성도가 많다. 성찬의 신학적인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고, 성찬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찬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단지 주술적인 종교 행위로 여기게 만드는 요인이다.

성찬 경험은 종말을 선취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기하여 현재화하는 것이다. 죄인으로서 경험임과 동시에 죄 용서에 대한 경험이고, 함께함 곧 성도의 공동체성에 대한 경험이며, 구원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경험이고, 종말론적인 기대감을 갖는 경험이다. 이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갖고 성찬에 참여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성찬 경험의 대표적인 사례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찬은 자신들과 동행한 사람이 바로 부활의 예수님임을 알아보는 계기로 작용한다. 성찬만이 아니라 말씀을 풀어 주는 일도 있었지만, 이것을 바탕으로 함께 나눈 성찬의 순간에 그들은 눈이 밝아져 예수님임을 알아보게 되었다.

성찬은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 이에 비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찬 경험에서의 부정적인 사례를 전해 준다. 곧 바울은 성도 가운데 일부가 성찬에 참여하기 전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심으로 몸에 병을 얻었음을 환기한다. 성찬은 은혜의 시간이면서 심판의 시간이다. 예수께서 심판자로 성찬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는 말씀을 마지막 만찬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본다면, 성찬은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는 은혜를 의미한다. 회개할 것이 많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토록 우리와 만찬을 나누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회개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것은 이미 첫 만찬에서 드러난 사실인데, 가룟 유다의 악한 생각은 만찬 중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성찬 경험은 성찬에 관한 이론에 좌우된다. 가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사제의 축사에 의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이론)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루터는 공재설, 곧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함께 임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원화시킨다 하여 루터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다만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성찬 예식은 상징 행위일 뿐이다. 칼뱅은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상징 및 기념설을 종합하여 성령임재설과 기념설을 주장하였다. 곧 빵과 포도주에 성령이 임재하며,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 하였다. 오늘날 루터파 외 대부분 개신교는 성령임재설을 바탕으로 성찬 예식을 거행한다.

성례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가 가시화된 형태라고 이해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보이지 않는 은혜를 가시화한 것을 가리켜 성례라고 했다. 또한 듣는 말씀에 비해서 성찬을 보는 말씀으로도 이해한다. 보고 감각적으로 경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사건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죄 용서를 가시화시키는 예식이고, 성찬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성도의 유기적인 공동체성을 가시화시키는 예식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