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연재하려 합니다.

1회
1) 성찬과 성찬 경험 - 하나님의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
2) 성찬 집례자의 자격과 성찬 참여 자격

2회
3) 성찬의 관행
4) 성찬의 의미
5) 성찬 경험이 있는가

이번 글은 1회입니다. - 필자 주

예배를 말할 때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은 성찬과 세례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예배에서 매우 중시된 것으로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7개의 성사 중 개신교가 유일하게 그 가치를 인정하여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가치라 함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시고(성찬) 또 인정하신 것(세례)이며, 다른 하나는 보이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설교가 듣는 말씀이라면 성찬과 세례는 보이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인데,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지만 볼 수 있도록 말씀하시기도 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관련해 예배에서 오감 모두를 사용하는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지각 방식(시각, 청각, 촉각, 미각)들은 이미 어느 정도 사용되고 있지만, 후각을 사용하는 의식은 없는 것 같다. 예배에서 후각이 어떤 의미 작용을 하는지와 관련해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무속이나 유교의 제사 의식에서 향을 사용하기 때문에 향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정교회나 가톨릭에서 향을 피우는 것은 오랜 예배 전통을 가지고 있고, 사실 기독교 전통에서도 향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는데, 예배에서의 후각 작용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삶으로서의 예배에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이다. 향기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임을 알리는 일은 삶의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교회 예배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사용하여 후각을 자극하는 것은 예배의 의미 작용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개신교에서 성찬은 세례와 함께 성례, 곧 거룩한 예식으로 여겨진다. 가톨릭은 성사(聖事)라 부르며, 세례, 성찬, 견진, 고해, 사제 서품, 결혼, 종부 등 7개를 성사로 지키고 있는 것과 달리 개신교는 두 개만을 성례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경에서 오직 세례와 성찬만을 인정하시고 또 직접 제정하신 것으로 기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비록 신앙에 의미 있는 일이라 해도 다 인위적으로 고안한 것으로 본다. 특히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의 입교를 위한 교육에 해당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과정으로 여겨지는 견진례(confirmation)는 비록 성례로 여기지는 않아도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성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신비의 의미를 갖는 '미스테리온'인데, 이것이 라틴어 sacramentum(사크라멘툼)으로 번역되면서 우리말로 '성례'(가톨릭은 '성사'), 곧 거룩한 예식으로 번역되었다. 세례와 성찬이 신비로 이해된 까닭은 감각적인 것과 의식 행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물과 포도주 그리고 빵을 매개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교회 행위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례를 이렇게 정의한다.

"성례란, 복음의 약속을 더욱 충만히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인 치시고자 하는 의도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바 눈에 보이는 거룩한 표와 인(印)인데, 복음의 약속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단 한 번의 제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정의하는 성례는, 성례를 통해 어떤 은혜가 전달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1) 성찬과 성찬 경험 - 하나님의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

성찬은 거룩한 음식을 말한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으로부터 특별히 구별된 것이다. 물론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영어 표현은 eucharist 혹은 communion이다. eucharist는 '좋다'는 의미의 eu와 '은혜'를 뜻하는 charis(카리스)의 합성어로 '좋은 은혜'란 의미가 들어 있고, communion은 '함께'란 의미의 com과 '강화하다'는 의미가 있는 munire의 합성어다. 함께 강화하다, 옹호하다, 튼튼하게 하다는 뜻을 갖는다. 성찬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성찬'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한자어 번역이지만, 애찬이나 다른 식사와 구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시기적으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그러니까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드신 만찬을 가리키고, 의식적으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반복하는 것인데, 특별히 모일 때마다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라는 말씀에 따라 지키게 되었다.

원래 성찬은 유월절 절기 때에 먹는 보통의 저녁 식사였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맞아 어린 양을 잡아서 먹었는데, 요시야 임금이 제사를 예루살렘 한 곳에 집중시키고 개혁을 단행한 후로(왕하 22-23장) 이 예식은 거주지가 아니라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거행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순례할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거주자들은 순례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함께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관습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결코 개인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인지했다는 것이다.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나눈 식사를 마지막 만찬으로 불렀고, 이것이 갖는 거룩한 의미 때문에 성찬, 곧 거룩한 음식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일 때마다 기념하여 행하라는 말씀에 따라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로 모일 때마다 성찬을 가졌다. 그러다 나중에는 보통의 식사와 구별하여 특별히 세례자만 참석하는 의식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성찬을 일상의 식사로부터 구별하게 만드는 요인은 식사 행위나 혹은 집례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저녁 식사 때에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예수님의 말씀, 곧 "모일 때마다 기념하여 행하라"는 말씀과 "이것은 나의 몸이고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는 말씀이 일상의 저녁 식사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지, 가톨릭이 주장하듯이 집례 행위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여서 함께 교제하며 식사를 나누었다는 데에 의의를 찾아서도 안 된다. 성찬은 내연에 있어서 더 이상 확장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 예수님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

재차 강조하여 말한다면 첫째, 성찬은 일상의 저녁 식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하는 의식이다. 일상을 거룩하게 경험하도록 한다. 둘째, 성찬을 성찬 되게 만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교역자의 집례 행위가 아니다. 셋째, 일상의 저녁 식사가 공동체와 관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면서 성찬으로 불렸는데,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듯이 여러 폐단이 생기면서 애찬, 곧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는 일과 성찬은 분리되었다. 그러니까 성찬은 공동체적인 애찬의 배경에서 이뤄지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거룩하게 여겨지는 식사이고, 공동체의 애찬을 종교적인 의식으로 제정된 형태이다.

2) 성찬 집례자의 자격과 성찬 참여 자격

여기서 성찬 집례자는 반드시 목사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생각해 보자. 교회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듣는 비판이고, 성직자 중심으로 교회 행위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성도들 사이에선 의문이 제기되기에 목회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하다.

성찬은 말씀 선포와 함께 이뤄지기 때문에 성찬 집례자는 다만 의식을 집행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연관해서 이해된다. 따라서 성찬 집례자의 자격은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와 연계해서 고려된다. 설교가 굳이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듯이, 성찬 집례자가 굳이 목사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비판적인 관점은 이런 생각에서 나온다.

성찬 집례자가 반드시 목사여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가톨릭과 달리 성찬의 효력은 집례자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말씀에 근거를 둔다.사실 성찬 집례자가 반드시 목사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교회법에 따른 것이지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전통에서도 집례의 권한을 특정인에게 위임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당시 성찬에 대한 오해가 있어 참석자를 세례자에 제한함으로 다소 특별한 소속감을 가질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집례자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이 쓴 성찬에 관한 기록에서, 집례자로서 교회의 책임 있는 지도자를 언급한 것이 유일한 것이고, 그것을 교회가 법적으로 수용하여 자격을 성직자에게 제한하였을 뿐이다. 그 후로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까지 성찬 집례자는 안수받은 목사이어야 한다. 저스틴이 말한 것을 꼭 안수받은 목사로 제한해야만 할까? 교회의 질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까지 성찬 집례를 목사에 제한해야만 할까? 교회의 책임 교역자면 되지 않을까?

반드시 목사가 집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종교개혁 이전에 사제에게 부여했던 권한과 역할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목사를 통해 수여되는 것인가? 만일 목사에게 과거 사제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목사가 집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회의 책임 교역자'라는 완화된 표현으로 바꾸는 것을 제안한다.

이것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다음의 질문도 함께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인 성찬 참여에 자격을 제한해야만 할까? 자격을 제한하는 관행은, 사실 교회가 박해를 받는 시기에 "아이를 먹는다"는 등의 갖가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성찬을 위한 모임을 예배 후에 따로 가졌을 때 참석자의 자격을 세례자로 제한한 것에서 유래한다. 현재는 교회법적인 규정에 따른다.

곧 성찬의 의미를 모른다는 이유로, 또 아직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찬 참여를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분리된 자리가 아니라 예배 중에 행하다 보니 소외감을 토로하는 성도들이 있다. 과거 세례자로 제한한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자격을 세례자로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인간이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성찬의 의미를 숙지하고 또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다고 고백하면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해도 참석할 수 있지 않을까?

성찬 집례자의 자격이나 성찬 참여의 자격에 대한 정당성은 다만 전통에 있을 뿐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명시되어 있듯이, 성찬의 오용과 남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님을 강조하여 말했다. 만일 아무나 성찬을 집례할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무질서해질 것이며, 구속사적인 상징 행위인 성찬을 아무 의미도 모르고 참여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주술적인 종교 행위로 전락할 뿐이다. 유아세례를 받았다 해도 16세가 되어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성찬의 오용을 막고 성찬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확실한 근거는 없고 또 신학적로도 정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어도, 예배 전통에 따라 성찬 집례자는 목사로, 성찬 참여 자격은 세례자로 제한할 뿐이다.

전통을 바꾸고 싶지 않다면 문제가 되고 있는 성찬 집례자나 성찬 참여자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곧 성찬 집례자는 특권을 가진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에 불과하다. 게다가 개혁주의 전통에서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재현하는 상징 행위로 이해한다. 물론 상징 행위만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믿고 기념하는 일로 실제로 성찬을 통해 은혜가 주어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찬을 집례한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제자를 섬기지 않았던가! 그러니 성직자로서 목회자의 특권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성찬 집례 자격과 성찬 참여 자격을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섬기는 자임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예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성찬의 효력은 성찬 집례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또한 성찬 참여 자격과 관련해서 개인적으로는 성찬의 의미도 배우고 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영접했어도 특별한 이유 때문에 세례를 미루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 놓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사가 오랫동안 부재하는 교회에선 예외적으로 책임 교역자가 성찬을 집례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수받은 목사가 부재한 지역에서 임시당회장이 일 년에 한 번 방문하는 기회에 성찬을 거행하도록 한다면 성찬을 강조하는 신학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순교자 저스틴이 언급한 것도 교회의 책임 있는 자였지 정확하게 안수받은 성직자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만일 성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시찰회에 속한 목사가 자주 순회하여 성찬식을 집례해야 하지 않을까? 강조하면서도 성찬을 받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문제다. 만일 형편상 그럴 수 없다면, 예외 규정을 두어 책임 교역자가 성찬을 집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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