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성서의 이해> / 김용옥 지음/통나무 펴냄/ 479쪽/ 1만 6000원.
서론

최근 EBS가 2007년 2월 6일부터 도올의 영어 원전 강독 인터넷 강좌(www.ebslang.co.kr)를 개설하였는데, 저자는 이를 위해서 두 권의 책을 저술하여 자신의 강의 교재로 삼았다. 첫 번째 책이 <기독교성서의 이해>이고 두 번째 책이 <요한복음강해>다. 그의 책은 두 권이지만, 그 내용을 세부적으로 분류한다면, ‘예수와 바울과 복음서저자와 요한’, ‘한국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 ‘요한복음강해’로 나눌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믿는 기독교는 무엇인가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개요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저자의 두 권의 책은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필자는 첫 권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의 <기독교성서의 이해>는 한 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기독교 역사(정경화 과정)에 나타난 예수 이해다. 저자는 기독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해하고 그 예수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특별히 성경의 형성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자신의 그 이해의 결정판인 요한복음을 강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저자의 <기독교성서의 이해>는 구약에 대한 언급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저자의 방법론과 해석에 대한 주된 비판은 ‘신앙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서의 혼돈’과 ‘열린 정경론에 대한 오해’에 주로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론들이 그의 책 속에 순서적으로 혹은 서로 잘 얽혀져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저자의 책은 산만한 감은 없지 않으나, 읽기가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반대중은 실제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거나 많은 점에서 무시된다는 점을 전제로 그러한 비밀들 혹은 진리를 알리는 ‘지혜의 교사’로 저자의 글은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저자의 예수관-예수는 누구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의 초두에 ‘예수의 이적’에 대한 주제가 다루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주제는 모든 신앙인들의 고민거리다. 무엇이 신화(神話)고 무엇이 역사(歷史)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는 신이었는지, 인간이었는지. 사실 이와 같은 논제는 아주 오래된 문제들이라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중간이다. 그는 역사와 신앙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예수를 다루고 있는 모든 신약성경이 역사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반드시 역사적일 필요가 없다거나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칼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 있는 듯하다. 신정통주의적 입장에서 진리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말씀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남긴다(15쪽). 그는 믿음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근거로 이적을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신앙적 예수와 결합시킨다(21쪽). 이적은 신앙적 예수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 핵심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교리와 교회를 복음과 예수에게서 분리해내려는 시도를 꾸준히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기독교성서의 이해>의 상당 부분을 정경론에 할애해서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경에서 배제된 예수상(像)이 어떠한가와 열린 정경으로 이해할 때(혹은 지금까지 배제된 비(非)정경들을 포함하여 볼 때) 구체적으로 어떤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는 점이다.

기독교 정경론

기독교의 정경론에 대한 중대한 전환은 고대의 사본들을 발견한 데서 비롯된다. 쿰란 문서(사해사본)와 나그 함마디 문서(영지주의)의 발견이 그 경우다.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과 쿰란사본과 맛소라 학자들이 전수한 히브리어사본 상에 완전히 일치하는 부분이 없다는 것은 당시에 ‘닫힌 정경’(즉 하나로 고정된)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고 주장한다. 나그 함마디 문서도 기독교 이해의 풍성함을 드러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서방 교회)중심의 편협성 때문에 결국 이 문서들이 외경으로 낙인찍혀서 기독교의 정경 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없었다. 이것은 단지 콥틱 기독교인들의 경향성을 반영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124). 이러한 편협성과 대조시키기 위해서 헬레니즘과 이집트의 개방성 혹은 배타성의 부재를 주장하며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 중심의 배타성에 대한 아쉬움을 논한다.

저자는 기독교 교회가 닫힌 정경론을 고집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요인이 크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선 기독교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공인되기 이전에 받은 박해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네로가 진정 기독교에 대해서 사악한 황제가 아니었던가? 결과적으로 네로가 로마의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사실이지만, 네로가 불을 지른 것도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이 심하게 박해받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더 정밀한 확인과 평가가 뒤따라야 할 문제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배경과 메시지에 이해의 일부가 수정되어야 한다. 물론 초대 교회 시대에 박해의 시기와 관련하여 후대의 순교와 핍박에 대한 전설과 이야기들이 많이 생산된 것이 앞서 언급한 극심한 박해와 순수한 신앙의 절개라는 과장된 신화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은 있다.

그 다음은 기독교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공인되게 된 배경과 그 후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관계는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해체와 갈등의 양상을 빚었고 이미 기독교는 체계화되고 약진하였다. 갈라진 로마제국을 통일하는 과정 속에서 콘스탄틴 황제는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예전에 페르시아 제국내의 모든 종교에 자유를 선포한 고레스의 칙령과 유사하다. 그는 324년에 독존의 대제가 되었고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특히 우대하여 몰수된 교회 재산을 돌려주었고 황제의 사유재산을 교회에 기증하였으며 성직자들에게 병역이나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이와 같은 황제와 기독교와의 밀월 관계는 단순히 진리의 승리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 콘스탄틴의 개인적인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의심과 그의 기독교 공인 이후의 삶 등을 살펴볼 때 특히 그러하다. 게다가 이때부터 기독교는 온갖 부와 권력이라는 특권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핍박받는 교회에서 핍박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79쪽).

다시 이야기는 기독론으로 돌아온다. 저자는 여기서 삼위일체 논쟁에 대한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이 그것이다.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신이면서 인간이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게다가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하나인가? 셋인가? 셋이라면 어떻게 하나인가? 저자는 교리에서의 존재론적 하나님과 성경에서의 관계론적 아버지(하나님)의 차이를 설명하며 삼위일체론 자체는 ‘비성서적인 논쟁’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필자는 헬라철학과 세계관 속에서는 그렇게밖에 설명될 수 없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마르시온과 도올의 차이점

이제 이야기를 바울의 기독교운동으로 돌이켜본다. 바울의 선교적 맥락은 당시의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얻을 수 있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격돌하게 된 것은 그들이 기독교를 유대주의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참된 기독교는 할례와 안식일 그리고 음식법등 유대주의의 표징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서 온다고 믿었다. 바울은 외면적인 것을 배척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의’라는 새로운 복음을 제시하였다. 물론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를 주는 복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복음 때문에 바울이 구약의 율법(의 본 뜻)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는 것은 수용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탈유대주의적 경향은 마르시온에 이르러 극치에 다다른다.

마르시온은 참된 기독교가 되려면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구약적 요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차별성에서 비롯된 입장은 단절과 부인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마르시온의 정경성에 대한 왜곡은 결국 기독교 교회가 정경에 대한 심각한 숙고를 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부터 정경론은 저자와 기존의 교회들과 학계들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인다. 입장 차이를 여기서 논의하지 않더라도 확연한 차이점은 드러난다. 즉 마르시온은 ‘배제의 정경론’을, 김용옥은 ‘추가의 정경론’을 주장한다. 저자는 고대사본들의 차이점이나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방대함은 심지어 ‘일부 서신의 정경성을 부인했던’ 루터 시대까지도 ‘열린 정경론’의 증거로 사용한다. 사실 바울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전용하여 정경의 수를 줄이려 한 마르시온이나 루터의 입장과 소위 외경과 위경들도 정경의 수에 더하려고 하는 김용옥의 ‘열린 정경론’은 전혀 다른 것이다. 게다가 구약의 기독교적 수용이 기독교의 권위의 입증차원에서 행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145쪽).

물론 마르시온과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리스트가 교회로 하여금 정경 문제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폭작용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김용옥 선생이 이야기하듯이 전적으로 음모론이나 권력투쟁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이전에는 열린 정경론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증거는 없다. 독자들에게 저자와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정경론에 대한 저술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 모두가 사도성의 측면에서 정경의 수를 제한 것이지만, 그 사도성이라는 잣대로 볼 때, 구약을 버리지 않고 포함한 일이나 나그 함마디 문서를 포함한 다양한 위경과 외경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만한 근거는 없다. 나그 함마디 문서들이 영지주의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필자가 연구한 바로 볼 때도, 그것들이 복음과 기독교 진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경적 본문 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문제 삼고 어떤 내용을 비밀스러운 지식으로 인도하는 형태를 갖는 (나그 함마디) 문서군들이 과연 정경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데는 의심이 간다. 물론 김용옥 선생이 지적하는 대로 불교의 정경 기준과 기독교의 정경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는 첨가의 정경이고 기독교는 배제의 정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기독교의 정경론은 대다수의 교회가 수용하는 책(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신약책), 일부 교회만 사용하고 있는 책, 그들이 정경성을 의심하는 책(히브리서·야고보서·베드로후서·유다서·요한계시록 등)으로 구분되었다. 히브리서는 저자 문제 때문에 야고보서는 행위적인 의(義) 때문에, 베드로서와 유다서는 비정경적 본문의 인용의 문제 때문에 구분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 신약책들의 지엽적인 문제로 인한 것을 ‘열린 정경론’이나 로마 교회에 의한 음모론이나 편협한 사고방식의 탓으로 돌린 것은 저자의 너무 과도한 해석과 의미부여라고 본다. 마르시온처럼 구약 율법의 하나님 자체가 신약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 구약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구약의 외적 준수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구약을 멸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와 구약의 이해도 마르시온과 같은 구약의 폐기론을 주장할 하등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예수와 신약성경이 철저하게 구약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예수, 바울, 공관 복음서, 그리고 요한복음

이제 저자는 자신이 요한복음을 강해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요한복음은 철학적이면서 신학적이다. 저자는 바울 서신이 정(正)이며 공관복음서가 반(反)이며 요한복음이 합(合)이라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사실 요한복음은 헬라철학적 기반이 없고 구약적 토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책이다. 물론 요한복음이 신학적으로 도식화되어있지만, 여전히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들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반드시 저자의 정반합이론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요한복음이 고도로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하는 신학화된 예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내용상 역사와 구약과는 무관한 신학화된 예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용옥 선생의 요한복음 해석의 장점은 요한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헬레니즘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관심은 선교지의 문화 수용와 접촉의 면에서도 상당히 큰 이슈이며 우리가 저자와 같은 철학자에게서 성경을 더 많이 배워야 할 필요를 보여준다.

결론적 평가

본서를 통하여 저자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에 대한 길고 장황한 변증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그의 기독교와 우리의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독교가 그의 기독교와 만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의 말처럼 진실과 편견 혹은 착각속의 기독교를 구분할 필요는 항상 존재한다고 본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에 대해 옥석을 가릴 준비가 되어야 하며 진리에 대한 탐구와 추구를 쉬지 말아야 한다. 저자의 기독교는 한쪽에서 비판하는 만큼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만큼 정당하고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성기문 / 말씀발전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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