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이전의 평화박물관은 없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이 글은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평박)와 <한겨레>·<경향신문>과 같이 소위 '진보'로 분류되는 곳들 이야기다.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포함된다. 기득권 세력에 맞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글은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편집회의에서 몇 번 이야기가 나왔지만 애써 시큰둥했다. "우리는 진보", "진보는 우리 편"이라는 진영 논리 때문은 아니었다. '신중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겠지', '조금 기다리면 상세하게 다루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7월 13일 열린 반헌법행위자열전(반헌법) 편찬 사업 1주년 기자회견이었다. 정확히는 기자회견장 앞에서 진행된 평박 사무처 활동가들의 시위를 제대로 다루지 않은 '진보 언론'들 때문이다. 좋은 스팟에서 사진은 열나게 찍어 놓고 말이다.

데이터로 얘기하자. <한겨레>는 기사 하나를 썼는데, 다섯 문단 중 맨 마지막 "한편~"으로 시작하는 문단만 활동가들의 시위를 다뤘다. <오마이뉴스>도 비슷하다. <경향신문>·<민중의소리>는 아예 다루지 않았다. 주간지 <한겨레21>은 1121호에 두 페이지를 할애해, 활동가들을 외면하는 한홍구 교수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다.

아, 하나 더 있다. <한겨레>는 '뉴스룸 토크'라는 코너에서 평박 활동가들의 시위를 다뤘다. 고경태 신문부문장이 현장을 취재한 방준호 기자와 인터뷰하는 형식이었다. 인터뷰는 한홍구 교수와 했으면 좋았을 걸. 앙꼬 없는 찐빵 같은 기사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현장에서 한홍구 교수에게 평박 활동가들의 시위에 대해 물어본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 한홍구 교수에게 평박 사태를 물어본 기자는 없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평박 사태에서 진보 언론들이 보여 준 태도는 실망 그 자체였다. 평박의 실질적 운영자인 한홍구 교수와 사무처 활동가들의 갈등은 지난 5월 초 평박 홈페이지에 '공개'됐다. 시민단체와 평화 운동 진영에서 영향력과 상징성이 있는 평박이었기에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금세 소문이 퍼졌다. 언론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를 다룬 언론사는 많지 않았다. 5월 11일 <경향신문> 1개, 12일 <연합뉴스> 1개가 다였다. 당사자들을 직접 취재한 게 아니라 평박 홈페이지에 올라온 성명서만 보고 쓴 기사였다. <시사IN>은 사태가 공개된 후 한참 지난 6월 28일, 취재가 아닌 기고를 통해 이 문제를 다뤘다.

그나마 양쪽을 취재해서 기사를 낸 곳은 <한겨레21>이 유일했다. <한겨레21>은 5월 16일 '평화 없는 평화박물관'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한 기사를 썼다. 하지만 논조는 기계적 중립을 택했다. 평박과 관련한 사람들 입장을 그대로 싣고 판단을 독자에게 넘겼다.

진보 언론의 무관심은 일반 사회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던 <뉴스앤조이>가 뒤늦게 취재를 시작한 이유기도 하다. <뉴스앤조이>는 양쪽 입장을 충분히 듣고 사안을 나눠 3개의 기사를 썼다. CMS 회원 관리 부분은 해석을 놓고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렸지만, 사태가 진행되는 방식을 볼 때 한홍구 교수와 운영진 문제가 컸다.

이후 평박 사태는 활동가들에게 더욱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됐다. 당장 월급이 삭감됐다. 반면 한홍구 교수는 크게 피해 입을 일이 없었다. 운영자의 갑질, 노동자의 권리 등을 자주 이야기하던 진보 언론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뉴스앤조이>는 활동가들 월급 삭감이 한홍구 교수 갑질 의혹을 더욱 짙게 한다는 내용으로 기사를 썼다.

침묵하는 건 언론뿐만이 아니었다. 진보 시민단체들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이름난 사회 활동가 중 평박 사태와 한홍구 교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송필경 선생이 페이스북에서 개인적으로 평박 사태를 이야기했다. 송필경 선생은 의사로서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했고 평박 초창기부터 후원해 온 사람이다. 그는 한홍구 교수와 막역한 사이였지만 글 몇 개로 등을 지게 되었다.

한번은 송필경 선생과 평박 관계자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는 "시민단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 한홍구 교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사람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문제의식이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단체든 개인이든 전혀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 활동가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뉴스앤조이 구권효

'같은 편'의 침묵 속에 한홍구 교수는 당당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반헌법 사업 1주년 기자회견에서 99명의 1차 집중 검토 대상을 발표했고, 언론들은 이를 실어 날랐다. 물론 반헌법 사업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해서 한홍구 교수의 반민주적 행태가 작은 일로 포장되지는 않는다.

한홍구 교수는 5월 16일 <한겨레21> 보도 후, 이사장 이해동 목사와 함께 한겨레신문사 사장을 1시간 반 동안 만나 항의했다고 한다. 기계적 중립 입장에서 쓴 기사도 그가 보기엔 자신에게 아주 불리한 편향 보도였다. 한홍구 교수는 자신을 1이라도 비판한 언론 보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에게는 아예 "당신 같은 사람은 기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보수 진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최근 청와대홍보수석이었던 이정현 의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해 보도에 개입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분노했다. '뉴스타파'의 보도가 편향적이라며 인터뷰 자체를 거부한 나경원 의원을 보며 손가락질했다. 권력자들을 까발리는 언론사를 우리는 옳다고 여겼다. 언론이라면 성역 없이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박 사태와 관련해서는 왜 이럴까. 저들이 가진 권력에 비하면 진보 지식인이 가진 권력은 한 줌에 지나지 않아서인가. 그래서 한홍구 교수에게 묻지 않는 건가. 한 줌 권력이라면 마구잡이로 휘둘러도 되는 것인가.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평박의 갈등이 세상에 드러난 지 세 달째다. 이렇게 시간만 지난다면 결론은 뻔하다. 월급도 못 받는 활동가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반면 한홍구 교수는 갑질이 아니라 반헌법 사업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다. 활동가들도 안다. 아니, 한홍구 교수를 비롯해 평박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진보'는 앞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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