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국토교통부와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경찰청으로 구성된 '국무조정실정부합동부패척결추진단'이 2016년 3월 공개한 전국 공동주택 실태 점검 결과 우리나라 아파트 10곳 중 7곳에 비리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관리비 횡령, 금품 수수 등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이쯤 되면 '비리가 만연해 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다.

그 와중에 잘못을 개선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싸움은 쉽지 않다. 지난 2월, 아파트 비리와 맞서고 있는 남기업 소장(토지+자유연구소)을 만났을 때, 남 소장은 자신을 쫓아내려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와 선거관리위원회의 부당한 행위를 고발했다. 기대 속에 입주자대표회장이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해임하려는 사람들과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시도는 집요했다. 3개월간의 길고 지리한 싸움은 지난 2월, 남 소장에 대한 '해임 투표'로 이어졌다. 긴 싸움이 시작됐다. 해임 반대표가 더 많이 나오자 투표 절차를 문제 삼아 재투표에 들어갔다. 3월 30일, 법원이 입주자대표회장의 업무를 방해하지 말라고 가처분 결정을 내리면서 남 소장은 회장 업무에 가까스로 복귀할 수 있었다.

▲ 하 목사는 준비한 서류를 책상에 늘어놓았다. 모두 아파트 일을 하며 모은 투쟁의 산물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아프리카 TV'로 공청회 생중계…감추려는 사람과 공개하려는 사람

투명한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또 한 명의 기독인을 4월 5일 만났다. 서울 잠실에서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하석범 목사(땅빛교회) 이야기다. 하 목사는 잠실 신천역 앞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선거관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5,500여 세대 2만여 명이 입주한 대단지 아파트다.

남기업 소장을 쫓아내기 위해 동대표와 선거관리위원회, 관리사무소가 합심했듯이, 하석범 목사를 쫓아내기 위해 여러 명의 동대표가 모였다. 하석범 목사가 선관위원장으로 들어와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다들 알아서 하던 문화를 뒤집어 놓고, 모든 걸 공개하라고 요구하니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하석범 목사 얘기를 듣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를 찾자 수북한 서류 더미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국토교통부와 송파구청의 공문, 검찰 약식명령 통지서, 아파트 관리 규약집, 정보공개 청구서 등 종류도 다양했다. 하석범 목사는 "법 공부 많이 했다"며 웃었다.

하 목사가 이 아파트에 산 지 8년이 됐다. 처음부터 아파트 문제에 관심을 둔 건 아니다. '공간과 도시'라는 주제로 목회자 모임을 하면서, 어떻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주민 몇몇이 하 목사에게 선거관리위원장을 제안했다. 입주자 중에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만 동대표를 할 수 있고, 세입자는 못 한다는 법이 있으니 대신 그런 제약이 없는 선거관리위원회 활동을 부탁한 것이다. 마침 아파트 재건축을 기점으로 조합장들이 온갖 비리에 연루되고, 1~3기 대표들도 소송에 휘말리는 등 혼란스런 상태였다. 하 목사는 일종의 '비상대책위원'격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가 가장 신경 쓴 건 '투명성'이다. 지난해 2월, 입주자대표회장과 감사 2명 선출 투표가 있었다. 5,000세대 65개 동의 대표를 뽑는 일이니만큼 작은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162개 시·군 가운데 인구가 2만 명 전후인 자치단체는 14곳이다(2015년 6월 기준). 인구수만 따지면 웬만한 군수만큼의 대표성을 띌 수 있는 자리다.

하석범 목사는 회장 선출을 위한 주민 공청회를 열었다. 누구나 자치회 대표의 공약을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아프리카 TV'로 공청회를 생중계했다. 아파트 입주자 카페에 공지를 올려 많은 사람이 공청회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하 목사는 "주민들이 후보자 공약이 얼마나 진실하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 주민 뜻이 잘 반영된 선거로 치러졌다"고 자평했다.

"X갑 떤다" 욕먹다

단지가 변화하려는 조짐을 보이던 찰나, '시련'도 함께 찾아왔다. 새로운 체제를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 목사에게 폭언을 일삼고 협박 전화와 문자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 목사는 온갖 협박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한 동대표는 공개 회의석상에서 하 목사에게 무슨 자격으로 선거관리위원장이 아파트 일에 간섭하느냐며 폭언을 퍼부었다. "X갑 떤다"는 말도 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은혜롭게 덮지는 않았다. 명예훼손과 모욕으로 그를 형사 고소했고, 그 동대표는 벌금 100만 원 약식명령을 받았다. 나중에 다른 동대표들 앞에서 하 목사에게 사과하고, 교회에도 몇 주 출석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였다. 하 목사는 그가 사과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주민들에게도 공개했다. 자치회에 만연한 언어폭력을 순화하는 계기가 됐다.

"과거에는 이런 볼썽사나운 일이 생기면 선관위원장이 사퇴했어요.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싶으니까, 험한 꼴 보지 말자 한 거죠. 근데 여기서 그만두면 주민 뜻과 전혀 무관하게 과거 방식대로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있으니 물러서지 않았어요. 나름 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혹시 이런 일이 기자들에게 취재 거리가 될지 모르겠다. 난방비 '0'원 아파트 사건으로 소위 열사 반열에 오른 '김부선'아파트와 흡사한 잠실 '*** 아파트' 이야기다. 말이 많고 탈도 많은 그 아파트에서 어쩌다 목...

하석범에 의해 게시 됨 2015년 3월 3일 화요일

▲ 1년 전 하 목사가 선관위 일을 시작할 때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일을 그는 지금까지 하고 있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한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해요. 규약에 위배되는 거 다 알면서도 하니 기가 막힌 거죠."

하석범 목사가 기가 막힌 건, 알면서도 불법을 자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러이러한 행위는 안 된다, 저것은 저렇게 해야 한다, 관리 규약에 다 써 있고, 주택법과 시행령에 나와 있지만 알면서 넘어가는 문제가 많다.

작년 추석에는 관리 주체 재계약을 앞두고 업체에서 동대표들에게 추석 기념이라며 와인과 배 상자 등을 돌렸다. 와인과 배가 무슨 대수냐 할 수 있지만, 45명이면 몇 백만 원이다. 아파트 규약에 의하면 이런 물품 제공은 해임 사유에 해당한다. 하 목사는 정보공개 신청을 했다. 하지 말라고 한 건 하지 말고, 잘못을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사과한 사람은 딱 한 명. 동대표 해임 사유에 해당하는 사건이지만, 해임을 요구하는 주체가 동대표인 까닭에 '셀프 해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더. 최근에는 관리비 400만 원이 부당하게 지출된 것을 잡아냈다. 동대표가 완전하게 선출되지 않아 '입주자대표회의'가 구성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간담회 형식으로 행사를 열었는데, 나중에 여기 참석한 사람들이 5만 원에서 10만 원씩 참가비를 청구했다. 총 400만 원이 지출됐다.

"정보공개를 요청해 파악해 보니 이렇게 청구하면 안 되는 거예요.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내놓으라고 요구했어요. 재미난 건 이분들이 원래는 내놓으려 하다가 갑자기 배 째라는 식으로 돌변했다는 거에요. 입주자대표회의와 선거관리위원회 사이의 자존심 싸움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면 별 일 아니죠. 몇 천만 원 사안도 아니고 작은 거잖아요. 하지만 이 문제는 소액 재판을 청구할 생각이에요. 돈을 받아서 주민들에게 돌려줄 거에요. 법규를 어기면서까지 주민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이제는 바로잡고 싶어요."

목회는 목회고, 일은 일? "저에겐 이게 목회입니다"

하석범 목사는 선거 때만 소액의 활동비가 나올 뿐 평상시는 무보수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일이 일종의 신앙고백이라고 믿는다.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거친 싸움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하 목사는 이 일이 또 하나의 목회라고 고백한다.

"이 아파트를 민주적인 마을로 만드는 것이 결국 제게는 신앙이고 목회에요. 교회 언어로 다가가지는 않지만, 제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고 온갖 압박과 폭언에 시달렸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서 이 일을 했어요."

입주자대표회장은 언제부턴가 하 목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하 목사는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하 목사를 만난 날 아침, 하 목사는 동대표 24명에게 회의 참가비를 반납하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앞으로 힘든 일들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의 임기는 2017년 2월까지고 한 번 더 연임할 수 있다. 하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또 하라면 또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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