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기업 소장은 지난해 가을 수원 ㄱ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장이 됐다. 투명한 아파트를 만들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남 소장은 2개월 만에 해임 위기에 놓이게 됐고, 남 소장은 피켓을 들게 됐다. (사진 제공 남기업)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배우 김부선 씨는 2014년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난방비 비리를 폭로했다. 어떤 가구는 한겨울 10만 원 이상씩 나오는 난방비를 전혀 내고 있지 있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김 씨는 관리소장, 입주자대표회장 등 아파트 자치회 사람들과 긴 싸움을 했다. 양측 간 폭행 논란부터 시작한 싸움은 법정 공방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김부선 씨를 '열사'라 불렀다.

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편화된 주거 형태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 주거 형태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23%에 불과했으나 2010년 59%까지 치솟았다. 인구 5분의 3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내는 '관리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매달 수십만 원의 관리비를 내면서도 말이다. 관리비를 집행하는 아파트 동대표와 입주자대표회장의 지위와 권한, 선출 방법은 법률과 대통령령으로 정해져 있고, 국토교통부와 선거관리위원회의 감독을 받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도 상당수다.

경찰청은 2013년 하반기 아파트 관리비 비리에 연루된 입주자대표회장과 관리소장 등 관계자가 399명이라고 발표했다. 서울시도 2013년 '아파트 관리비 비리 근절 선언'을 내놓을 만큼, 가구당 매달 수십만 원씩 내는 관리비는 그야말로 '애먼 돈'이다.

아파트 회장 된 '세월호 피켓' 아저씨, 회의록 공개했다 직무 정지

뜬금없이 아파트 얘기를 꺼낸 건, 지난해 9월부터 수원시 ㄱ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을 맡은 남기업 씨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는 국가의 부동산과 경제 정책을 연구하는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이다. 정부의 부동산⋅토지 정책이 빈부 격차를 초래하지는 않는지, 더불어 해결책과 대안을 연구해 제시하는 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기독교계를 포함해 여러 곳에서 토지 정의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강의도 자주 다니고 있다.

2014년 7월부터는 세월호 피켓을 몸에 걸고 다니기 시작했다. 집이 있는 수원에서 연구소가 있는 홍대입구역까지 전철을 타고 출퇴근할 때,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고 인양을 촉구하는 몸 피켓을 걸고 다닌다. 3,000명이 다니는 대형 교회의 집사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세월호 유가족들과 담임목사의 만남을 주선했다. 교인들과 함께 안산분향소에 방문해 예배하기도 했다. 올해는 유가족들을 교회 예배에 초청할 예정이다. 이른바 활동가형 학자인 셈이다.

▲ 남 소장은 기독교인으로서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피켓을 들기 시작했다. 벌써 1년 반이 됐다. 성균관대역 앞에서 정기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피켓을 들고, 매일 출퇴근 시간에는 몸에 피켓을 걸고 움직인다. 그가 '다른 종류'의 피켓을 들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사진 제공 남기업)

거시 정책, 그리고 세월호에 관심 많던 중년 남성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문제에도 뛰어들었다. 남기업 소장은 지난해 9월, ㄱ아파트 18대 입주자대표회장에 당선됐다. 그가 내건 공약은 '투명한 아파트를 만들겠습니다'였다. 남 씨가 사는 ㄱ아파트는 전 회장단인 17기와 16기 간 관리비 사용을 두고 법정 다툼을 하는 등 문제가 많은 상황이었다. 남 소장 주변 사람들은 기독인이 사회 깊숙한 곳에서 성경적 가치를 실현할 것이라며 그의 활동을 기대했다.

투명한 아파트를 위해 남기업 소장이 먼저 시작한 건 회의록 공개였다. 10월, 11월, 12월 입주자 대표 회의 내용을 아파트 홈페이지에 올렸다. 이전까지 ㄱ아파트는 회의 결과만 공고했을 뿐, 입주자 대표 회의록을 공개한 적은 없었다. 전 회장 체제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논의가 오가서 무슨 결과가 도출됐는지 공개한 것이다. 어느 동 복도 조명이 나갔으니 예산 얼마를 들여 고치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광고판을 달자는 내용이었다.

별안간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일부 사람들이 "회의록 공개는 왜 하느냐"며 반발한 것이다. 그들은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다 써 놓으니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한 사생활 침해 아니냐"며 남 소장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주로 전 기수인 17기 대표들이 중심이 됐다. 이들은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매일 업무 보고를 시킨 점 △회의록을 공개한 점 △아파트 공사 현장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 점 △부정선거로 당선된 점을 들어 남 소장을 해임하겠다고 했다. 남 소장이 당선된 지 불과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남기업 소장은 반대편이 제기한 문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꼬투리 잡기일 뿐, 왜 자신을 해임하려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그는 국토교통부가 전 기수를 대상으로 동대표 운영비를 조사한 결과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국토교통부는 올 1월, 전 기수들의 활동비 사용 내역에 대해 2,000만 원 규모의 관리비가 부적절하거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됐다며 환수 또는 시정 조치하라고 했다. 이 중 적지 않은 돈이 동대표들의 선물비나 식사비, 경조사비로 쓰였다. 자신들 문제가 드러날까 봐 모든 걸 공개하려 하는 남 소장을 끌어내리려는 것 아닌가 짐작했다.

수천 명이 사는 건물이다 보니 종종 큰돈 쓸 일이 생긴다. 외벽 공사나 방수 도색 공사라도 하려면 억 단위 비용이 발생한다. 업체 선정은 입주자 대표 회의 몫이다. 남 소장은 "이 자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큰돈을 챙길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16기 대표들과 17기 대표들 사이의 법적 분쟁도, 아파트 페인트 공사를 하며 한 업체에게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의혹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남기업 소장을 해임하려는 사람들보다 더 큰 산은 뭐가 뭔지 잘 모르는 '무관심'한 이웃들이다. 남 소장을 해임하려는 사람들은 아파트 관리소장과 한몸이 돼 경비원들을 동원해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았다. 주민들 중에는 경비원이 하라니까 그냥 서명해 준 사람도 있었고, 초등학생이 서명한 경우도 있다. 남 소장은 해임에 찬성한 가구를 일일이 돌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설명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 소장에게 '서명해 준 적 없는데 내가 서명한 것으로 돼 있다'고 확인서를 써 준 사람도 있었다. 가가호호 방문해 입주자들을 설득한 탓에 남 소장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가장 힘든 건 남 소장을 해임시키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직업이 없어, 매일 관리사무소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에 비해 남 소장은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입주자대표회장은 한 달에 30만 원의 활동비를 받고 일하는 봉사직이다. 남 소장은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갖고 아파트 운영을 투명하게 하려 했지만, 반발에 부딪혔고 해임 위기에 놓이게 됐다. 정기적으로 인문학 교양 강좌를 열고, 재건축 연한이 도래한 아파트를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이고 민주적으로 재건축할 수 있을지 고민하려던 남 소장의 꿈은 일단 '보류'됐다.

▲ 남기업 소장은 대규모 부동산 정책의 문제점 등 토지 정의 같은 '큰' 문제에 관심을 둬 왔다.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이 사는 아파트처럼 가장 작고, 기초적인 곳에도 여러 문제가 얽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작은 데서부터 정의를 실천하는 게 기독교인으로서 감당할 '소금'의 역할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제공 남기업)

길어질지 모르는 싸움 "기독교인들, 작은 데서부터 소금의 역할 해야죠"

남기업 소장은 자신을 해임하려는 사람들에 맞서 매일 아침 출근길, 피켓을 들고 주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해임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도 냈다. 법원은 그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 소장에 대한 해임 투표가 시작됐다.

해임 투표는 2월 12일까지다. 1,680세대 중 10% 이상이 참여하고 과반수가 동의하면 남 소장은 해임된다. 만약 해임되면, 해임 발의 서명을 위조하거나 대리한 점, 그리고 해임 이유라고 제시한 것을 문제 삼아 법원까지 갈 예정이다. 끝까지 싸워 잘못된 걸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것이다.

ㄱ아파트 곳곳에도 기독교인이 있다. 남기업 소장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 중 한 명인 관리소장은 교회 안수집사다. 동대표 중에는 70세 목사님도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할 말이 없는지 물었다. 남 소장은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자고 말을 많이 하잖아요. 이런 작은 일에서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관심 쏟는 동대표 5명만 있어도 아파트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어요. 사실 전부 이런 데 무관심하잖아요. 가장 작은 데, 내가 사는 곳에서부터 참여해서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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