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이 동성애에 대해 신앙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국진 목사님의 반론 글('무섭냐고요? 동성애는 하나님 앞 죄악일 뿐입니다')은 그런 의미에서 보수적인 신앙의 입장을 대표할 순 없지만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저의 글은 '해석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입니다. 어떤 신앙적 입장이냐에 따라서 과정과 답변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고요. 저 역시 목회자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목사님의 글에 응답하겠습니다.

1.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해서 모든 걸 용인할 순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저 역시 고대부터 존재했던 것들을 다 용인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탐욕이나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도둑질" 등은 무엇보다 자신을 상처 입히고 이웃에게 큰 고통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는 그런 범주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동성애는 (목사님도 일부 인정했듯이) '사회적인 해악'이 있는 질병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사자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고통을 겪습니다. 물론 동성애자를 가족으로 두고 있는 분들 중엔 그로 인해 힘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동성애가 죄이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인 편견과 잘못된 통념으로 인한 것입니다. 마치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그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사회적 시선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처럼요.

2. 왜 사랑하라는 명령만 문자적으로 지키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목사님은 제게 "그대는 왜 사랑하라는 명령은 문자적으로 지키"냐고 물으셨습니다. 전 문자적으로 사랑을 지키지 않습니다. 제게 사랑은 문자가 아닌 정신이고 행위이고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현재 저에게 사랑은 살아갈 의미를 제공하고 그로 인해 즐겁고 행복하고 가치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명령이기 때문에 의무감을 갖고 지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게 사랑은 보편적인 가치와 공감과 존중을 끌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문자적인 해석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은 목사님도 아시겠지만 개신교의 이중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한테 유리할 것 같으면 문자를 들이밀고, 불리할 것 같으면 슬그머니 뒤로 감추면서 그 의미를 보라고 하는 것이 비겁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성경을 해석할 때 문자가 갖는 의미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여전히 그 문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사용하면서 유독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다른 해석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신앙적 양심보다는 동성애가 불편하고 불쾌하고 감정적으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목사님은 기존의 보수적인 목사님들보다는 유연하게 성경을 바라보시는 분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단호하십니다. 저와 목사님은 같은 성경을 읽어도 동성애에 대해서 이처럼 입장이 다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석학적”문제이기 때문에 대화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 주제를 가지고 논한다면 논지가 산으로 가겠죠. 이 문제는 기회가 되면 따로 정리해 보거나 또는 목사님과 만나서 대화를 해 보고 싶네요.

3. 동성애는 해악이 없지만 죄는 죄라는 말씀에 대하여

앞서도 언급은 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다원화된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는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그런 신앙고백은 개인적 입장에서 존중합니다. 제가 먼젓번 글에도 썼듯이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신념이나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입장에선 그들이 모두 교회에 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하시겠지만 그거야 말로 전체주의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민주적인 삶은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회적으로 해악이 없다면 존중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말씀하실 수 있고 그 가치를 소개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가치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 가치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성애자들은 별나고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고 친구이며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배제하고 비난하고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4. 제 입장에 맞는 연구 결과만 채용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하여

목사님의 말씀처럼 과학도 하나의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과학자가 아무리 중립적이라고 해도 당사자의 세계관이나 의견이 반영될 것입니다. 전 제 "입장에만 맞는 연구 결과를 채용"한 게 아니라 동성애와 관련한 현대 뇌과학의 견해를 소개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다른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논증(사실 동성애는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을 하려면 그에 맞는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제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동성애와 관련해서 과학에서 제시한 설명들은 동성애가 죄라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 개신교인들이 과학을 지나치게 '당파적'으로 해석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판단에서인지 과학을 자꾸만 종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뭔가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물론 과학이 만능도 아니고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현대 과학이 이루어 낸 성과들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고 외면하면서 색깔을 입히는 건 그 만큼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 중에 분명히 해로운 것도 있겠죠. 사이코패스가 그럴 것이고, 우리 안에 미움이나 시기심이나 폭력성 등도 반갑지 않은 인간의 성품일 것입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런 것들은 명백히 문제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관계를 위태롭게 해서 결국 자신을 몰락의 길로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인간 안에 있는 부정적이라고 말하는 성품들도 하나의 해석만으론 설명을 할 수 없지만요. 아무튼 그런 요소들은 해로운 기능이 있기 때문에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 다듬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표현하고 처리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훈련이나 교육의 문제도 아니고 결단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님은 이성애자이신 것 같은데 이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걸 막을 수 있습니까? 교육이나 훈련으로 다스려지십니까? 그런 감정이 어색하고 이상하고 불편하신가요? 물론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다른 이성에게 끌려도 그 마음을 따라가는 건 위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애쓰지요. 그러나 사랑의 마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죠. 동성애자분들은 사랑의 대상이 이성이 아닌 동성일 뿐입니다. 그 사랑은 불륜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사랑의 흐름입니다. 그것을 일부러 틀어막고 자신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파괴하고 존중하지 않는 것이죠. 불행한 일이죠, 목사님은 그들이 불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자신의 성적 지향을 외면하면서 죄의식을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가라고요, 누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나요. 그들은 목사님이나 저와 같이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일 뿐입니다.

5. 퀴어 축제 퍼포먼스를 바바리맨의 행위와 동급으로 보신 것에 대하여

목사님은 "바바리맨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면서 상대방을 향해 성적인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와 퀴어 축제의 노출 퍼포먼스를 동급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부적절한 비유이고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바바리맨의 행위는 명백한 성추행이고 범죄입니다. 어떻게 범죄적 행위와 퀴어 축제의 퍼포먼스를 한데 묶어서 범죄자 취급하십니까? 그 퍼포먼스는 현행법으로도 범죄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목사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분들에겐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일 수는 있습니다. 복장도 이상해 보이고 남잔지 여잔지 헷갈리고 노출도 심해 보여서 보기가 민망하시겠죠. 너무나 낯설고 기이해 보이는 모습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생각이 드시겠죠.

그런데 왜 그들이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그들이 무슨 노출증이 있어서 형형색색의 의상과 노출을 통해서 축제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노출은 자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죠. 우리 사회에서 배제되고 외면받고 조롱받는 몸이 바로 우리의 몸이지만 그 몸을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으로 저는 보입니다. 노출 퍼포먼스는 인간의 저항의 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노출을 통해서 자연의 아픔을 말하는 것처럼 노출은 인간이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하나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충격을 줘서 관심을 받으려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전 그런 모습을 보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더 변태스러워 보입니다. 몸은 성적인 면도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창조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퀴어 축제의 다양한 몸의 향연은 몸의 풍부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저항의 의미 못지않게 활기로운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고 느낄 수 없는 감수성이 아쉬운 거지 그 몸을 보고 불쾌하고 더럽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일 따름입니다.

5. 글을 마치며

목사님은 사람을 볼 때 죄부터 보시나요? 사람은 안 보이고 죄부터 본다면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닌 증오이며 혐오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지만 사랑으로 품겠다는 말씀은 듣기에 따라선 기존의 '미움'과 '박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개신교인들보다는 유연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분들은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무슨 시혜를 베풀 듯이 손을 내미는 그런 식의 위선은 거부합니다.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에 대해 이해와 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사랑을 내세우는 건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죄인라고 말하고, 그렇지만 사랑하겠다고, 사랑한다고, 너희들을 품겠다고 하는 건 너무나 큰 상처입니다.

"내가 너를 고쳐 줄 게", "너는 반드시 돌아와야 해", "내가 도울 게"가 아닌, '죄를 뒤집어 쓴 죄인'이 아닌,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그런 한 사람'으로 그들을 보셨으면 합니다. 목사님, 그들을 사랑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면 편견이나 선입견은 잠시 내려놓고 그들을 느껴 보세요, 그곳엔 죄인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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