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의 대주제 곧 기독교 신앙의 대주제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나오셔서 하신 첫 말씀이 무엇입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거였습니다. '하나님나라' 이게 성경의 대주제이고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하나님나라란 말이 무슨 뜻일까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는 지금 누구의 나라인가. 헌법 제1조 1, 2항에 무엇이라고 나옵니까?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우리들 국민의 나라이고, 모든 권력은 우리들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5,000년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나라였지요? 이걸 생각할 때 우리는 벅찬 감동과 감격과 자긍심과 더불어 설움과 고통과 고난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걸 이룩해 내기 위해서 얼마나 무수한 사람들이 얼마나 무량한 희생과 노력을 했던가를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의 주인은 우리들 국민들이고 나라의 권력은 우리들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다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소위 형식적 민주주의 가지고는 모자란 겁니다. 또 여기에 완성이란 게 없는 겁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국가라면 이런 질문을 계속해서 해 나가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이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나라는 누구의 나라가 됩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 곧 힘센 인간들의 세계가 되지요? 나라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고 개인 안에서 자기를 결정하는 인격의 주체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누구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나라란 말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창세기'가 무슨 책입니까? '출애굽기'의 선기록인가요? 혹은 창조론의 근거인가요? 거기 무슨 얘기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대리 통치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됐지요? 자기 야망의 왕국을 건설합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 인간은 도시를 건설했다 // 신은 망했다'(이갑수, <신은 망했다>) 이게 인류 문명의 시작 수메르 제국입니다.

물론 그보다 먼저 노아의 때에 대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왜 홍수로 심판한 겁니까? 네피림이라 불리던 거인족들의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창 6:11) 패괴란 타락이고 강포란 폭력을 말합니다. 땅위에 폭력과 학대와 학살이 만연돼 있었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사람 창조한 걸 후회하며 슬퍼했다고 그랬을까요(6:6) 그래서 대홍수로 다 쓸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살아남은 그들의 자손들이 또 뭘 합니까? 바벨탑을 쌓았지요? 하늘이 다시 홍수 같은 심판을 내려도 우리의 권세와 권력과 문명은 영원할 것이다. 그런 천리(天理)에 반역하는 탐욕의 결과 모든 민족의 언어가 혼란되어 민족들이 각처로 흩뿌려집니다.

하나님은 그 제국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불러내서 하나님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싹을 틔우셨고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를 건설하게 합니다. 그게 다른 제국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의 의의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한 인간 나라 곧 세상 제국들이 한 일이 뭡니까? 인간을 노예로 삼아 수탈하고 착취한 겁니다. 그 방식이 대규모 건축이었습니다. 어느 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죠? 강대한 권력을 갖게 되면 반드시 대토목 공사를 일으킵니다. 만리장성, 각 민족과 나라의 호화로운 궁전들, 사원들, 거대한 무덤들, 대규모 도시 건설. 그게 인간 문명의 위업입니다. 다 선주민들을 내쫓고 힘과 권세로 그 위에 세운 거지요?

가령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쌍뜨-뻬쩨르부르그는 본래 버려진 핀란드만(灣) 늪지대에 거대한 나무 기둥들을 촘촘히 박아 그 위에 세운 도시입니다. 역사가 까람진(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мзин, 1766~1826)은 그걸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시 건설에 동원돼 강제 노동으로 혹사당하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이 약 6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10만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했느냐? 늪지대에 그냥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뻬쩨르부르그라는 도시의 바닥에 수만 구의 시체들이 묻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성서는 시작부터 인간을 노예로 삼아 영원한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들의 꿈(야망)과 그들이 내세우는 우상, 그 욕망이라는 거짓 신에 대한 진짜 신 하나님의 투쟁 기록입니다. 그것은 주로 심판으로 나타나죠. 심판이 증명하는 것은 그것들이 가짜 신이고 거짓 신이라는 겁니다. 인간을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하는 구원의 신이 아니라 인간을 영구적으로 노예화하는 거짓 신이라는 겁니다. 진짜 신인 하나님은 어떤 신이라는 겁니까?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고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타락과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시는 신이라는 겁니다.

요즘 책 좀 읽었다고 하는 식자층에 안티기독교가 많지요? 그들이 주장하는 게 뭡니까? '구약성경', '창세기' 다 가짜라는 겁니다.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고대 문서나 고대 근동의 신화들 가운데 다 나오는 얘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대응합니까? '그건 다 세속적인 문서들이고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문서다' 이럽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안 되는 겁니다. 고대의 신화들과 성서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신화의 중심은 왕과 영웅이고 성서의 주인공은 신화의 그늘에서 고난받고 신음하는 민중이라는 점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죽음과 고통을 운명과 숙명으로 만들어 오로지 신적인 존재, 곧 왕을 통해서 그 굴레를 벗어날 구원을 의탁하는 겁니다. 왕, 왕비, 공주, 왕자, 고귀한 혈통의 시련, 왕가의 혈투, 왕의 결혼과 등극… 이런 얘기들입니다. 거기에 보통 인간 이상의 광휘로운 신성을 가탁하고 그걸 보면서 보통 인간들은 위엄을 느끼고 존경과 찬사와 복종과 충성을 거기에 맹세케 하는 겁니다. 이게 곧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입니다.

성서는 그러한 신화의 우상들을 거짓 신, 가짜 신으로 고발하고 진정한 신 정의로운 신은 신화의 굴레와 고통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가짜 신으로 만들지요? 기독교인들이 고통에서 신음하는 존재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인본주의자라고 공격하지요? 그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그러죠? 그러면 하나님의 방식은 뭘까요? 침묵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비판하기보다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분투하는 사람을 오히려 잘못된 신앙이라고 자기들의 신앙에 무슨 대단한 의미나 있는 양 호도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을 물어보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자기도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모르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다니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이 꿈을 가졌고 세 친구의 신앙심이 대단했다는 간증집이 아닙니다. 지상 제국들과 그들의 지배가 마치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곧 신의 뜻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유대왕국이 망했고 안 망했고의 문제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제발 꿈을 품은 다니엘과 불굴의 신앙을 가진 세 친구 좀 그만 우려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그런 설교하시는 분을 만나면 그런 유치한 설교는 그만두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건 성도들을 기망하고 하나님 말씀을 자기만큼이나 유치하게 만드는 짓입니다.

2.

구약성경은 한마디로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건설과 실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모델로서 건국된 이스라엘이 신정의 구현은커녕 삼류 세속 국가로 전락을 하게 된 겁니다. 그 양상이 무엇이었을까요? 역시 강포와 패괴, 곧 타락과 폭력입니다. 예언자들의 비판에는 항상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제적인 수탈과 권력자의 부정부패가 거론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심판을 받았다고들 하는데 우상숭배라는 것 역시 신학, 곧 부패한 시대정신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우상을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대조되는 일체의 우상을 '맘몬'(mammon) 곧 '돈'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24). 왜 돈이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고 맘몬이라는 잘 사용치도 않는 재물의 신을 거론하셨을까요? 돈을 섬기는 행태를 하나의 신앙, 곧 인격적인 신을 섬기는 신앙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고르반'조차 그들의 맘몬 신앙을 보여 준다고 비판하셨습니다(마 15:5, 6). 지금까지도 왜 십일조 같은 게 문제가 될까요? 내고 안내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내야 된다 말아야 된다'의 문제로 삼고 있는 그게 바로 맘모니즘인 겁니다. 저는 항상 교회의 성숙한 성도라면 최소한의 공동체 유지를 위한 필요가 어느 정도인지 자기의 분량을 스스로 짐작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지나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형편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어려운 사람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짐작이란 곧 성실한 살림을 사는 검소한 사람 정도의 상식이면 그만입니다. 그 외에 헌금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다 목적이 다른 데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돈의 신앙이 만들어 내는 게 타락이고 폭력이고, 그게 곧 사회를 망하게 하는 부패의 근원입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심판받을 때 등장하는 인물이 느브갓네살 왕입니다.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II, 기원전 630~562)은 오늘날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변에서 흥기한 신바빌로니아의 2대 국왕입니다. 그러나 느브갓네살은 유다를 멸망시켰지만 성경에선 그를 포악한 침략자로 묘사하질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집행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세속 국가 이스라엘을 무조건 찬양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아무리 자기들의 나라라 할지라도 하나님나라의 입장에서 그것을 평가하는 예언자들의 시각이 있는 겁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가끔 문제가 되곤 하는 '식민 사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식민 사관이라는 게 모순을 가졌습니다. 곧 과거 일제의 식민 지배나 민족 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제법 예언자적인 해석을 내리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현재 정부나 권력을 비판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예언자적 시각에 대해서는 한사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집권자를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마 21:22)'는 말씀만 알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는 말씀은 알지 못하고,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는 말씀만 알지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는 말씀은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집권자가 무슨 짓을 하든지 그런 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들의 잘못까지 우리의 잘못으로 알고 우리가 금식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침묵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논리인지 아마 그들 자신도 모를 겁니다.

느브갓네살은 44년간(BC 606~562) 바빌론 제국을 통치하면서 아시리아를 멸망시켰고, 두로를 정복했고,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켰고, 이집트와 싸웠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바빌론의 여러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다니엘은 그의 정복 과정에서 포로가 된 유대의 귀족으로 나중에 권력 서열 제3위인 제국의 최고 행정관까지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격동하는 시대를 하나님나라의 입장에서 예언적으로 바라보고 기술한 내용이 '다니엘서'입니다. 거기에 느브갓네살의 꿈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3.

느브갓네살 왕은 정복과 통치가 무르익은 어느 날 생생하게 기억나는 한 꿈을 꾸고 번뇌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다니엘을 불러 꿈의 해석을 묻습니다. 꿈에서 왕은 한 나무를 봤습니다. 이 거대하고 무성한 나무가 왕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금방 알 겁니다. 아마도 왕의 신하들이 이 꿈을 해석치 못한 이유는 감히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몰랐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곧이곧대로 해석해 줍니다. 곧 왕이 꿈에서 본 나무는 곧 의인화된 왕이라는 겁니다.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그러나 곧 이 나무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 내립니다.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소리 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 들어도 곧바로 의미를 알아차렸을 이 꿈을 느브갓네살이 스스로 해석치 못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진실을 깨닫기 어렵다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로써 자신의 외람된 입장을 밝혀 놓고 꿈을 직설적으로 풀이해 줍니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다니엘의 결론이 재미있습니다. "왕께서 이것을 깨달은 다음에야 왕에게 나라가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즉 왕이시여, 제 조언이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죄를 의로운 일로 씻어 내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당신의 죄악을 씻어 내시면 아마 당신의 평안이 연장될 것입니다." '만일 이런 일을 겪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혹시' 다니엘의 표현이 상당히 제미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느브갓네살이 자신의 죄를 씻는 방식입니다. 의로운 일, 곧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이게 뭡니까? 제국주의적 통치 방식을 수정하라는 겁니다.

느브갓네살은 과연 꿈꾼 대로 됩니다. 열두 달이 지난 어느 날 궁궐 옥상에의 동산을 거닐던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게 됩니다. "내 손으로 공들여 세운 위대한 바빌론, 이것이 바로 나의 영광을 말해 주는 내 왕국의 수도로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큰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이여, 너의 왕조는 끝났다. 너는 왕좌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어울려 살며 소처럼 풀을 뜯어먹을 것이다. 그렇게 일곱 해를 지낸 뒤에야 너는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것과 그분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느브갓네살은 즉시 그 말대로 정신이상이 되어 7년을 광야에서 짐승처럼 지내게 됩니다.

느브갓네살의 꿈 이야기가 다른 역사에 기록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말해 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다니엘의 해석이나 기록자의 의도도 분명합니다. 제왕적 망상은 정신장애로 이어지고, 정신이 없을 때 인간은 동물이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본래 동물로부터 발전한 존재임을 말하기도 하는 겁니다. 동물의 정신과 마음, 그걸 증명해 주는 게 꿈이기도 합니다.

4.

꿈은 수면을 방해합니다. 꿈이 수면을 방해한다는 것은 곧 무의식이 수면을 방해한다는 겁니다. 무의식의 무엇이 그렇게 하는 걸까요? 본래 무의식은 의식을 보호하듯 꿈은 수면을 보호하는 겁니다. 그러나 무의식이 의식을 보호하려고 할 때 더 이상 그런 보호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곧 괴로움이나 심리적 부담을 적당한 무의식의 보호 속에 억압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을 때 무의식은 꿈을 통해 그것을 보상적으로 내보여 줍니다. 수면을 방해하도록 강렬한 꿈을 통해 수면(잠, 망상)을 깨우는 겁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의식에도 목적과 지향이 있지만 무의식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은 결코 협조적이질 않고 무관심하고 무관합니다. 각자 자기의 사업에 몰두하는 겁니다. 느브갓네살의 예를 들자면 그의 내면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곧 그의 제왕으로서의 의식적 태도가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치달려 가는데 그것은 무의식의 원리상 오히려 그의 삶을 위협하는 겁니다. 제왕으로서의 그의 야망은 그의 삶의 적절치 않은 것으로 그의 존재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은 합목적적인 방어 수단으로 꿈을 사용해 경고하는 겁니다.

꿈의 기능에 관하여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보상적 기능과 예시적 기능으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보상은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자가 조정, 통합이라고 설명했고 예시적 기능은 의식의 활동을 앞질러 그 결과를 보임으로써 사전에 경고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꿈의 예시적 기능은 지금 현재 갈등을 해결하려는 무의식의 설계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꿈이 미래를 예언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예언하는 게 아니라 일어날 일들의 확률을 결합하는 또 다른 의식적 활동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일을 하는 걸까요? 무의식이란 그냥 자연의 일부일까요, 아니면 영혼의 존재 증명일까요?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1910)는 꿈이야말로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꿈을 미래의 예언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꿈꾸는 얘기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헛꿈을 꾸는 정신이야말로 미래를 품는 게 아니라 영혼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무지이고, 그 무지가 만들어 내는 신념에 찬 현실이야말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망상 곧 꿈이라는 겁니다.

느브갓네살의 꿈은 제왕의 뱃속에 제왕이 있는 게 아니라 동물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말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이 모두 대단하다고 숭배하는 사람, 심지어 세상이 다 자기를 대단하다고 칭송을 하니까 자기도 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그런 사람의 뱃속에도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 동물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대로 놔두면 머리는 치렁치렁 하늘 이슬에 젖고 손톱 발톱은 새 발톱처럼 길어지는 겁니다. 너무도 당연하죠? 곧 이 꿈은 느브갓네살이 지금 보이고 있는 높은 모습이 사실은 수준 이하의 상태일 뿐이라는 인격상의 불일치를 보여 줍니다. 이런 불균형은 낮은 사람에게서는 나타나질 않는 거지요? 높은 사람, 높아진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불균형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자긍심 넘치고 자존감 넘치는 일상적 태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환경 적응면에서는 유리하고 모범적인 것으로 각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인 능력을 넘어선 사람들이고 본래 자기 능력보다 현저히 출세한 사람들입니다. 곧 자기가 진짜 가진 것보다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여기에 불균형과 위태로움이 있는 거겠지요?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에서 이런 유의 인물들을 거론합니다. 출세란 게 무엇이냐. 단지 그 자리에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더 높은 직위를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의 업적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지의 핵심이 아닙니다. 곧 그들의 성과는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 만들어 낸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전에 없는 무엇을 창조해 낸 것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자기가 창조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개인에게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은 다 집단의 암시에 의해 마치 어떤 집적된 창고 같은 데서 개인들에게 지급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곧 어떤 사람의 출세는 집단이 그를 그렇게 밀어 올린 겁니다. 그것은 집단이 자기의 이익이나 미혹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그러한 지지 덕분에 그는 자기가 보유한 자산보다 사실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고 높은 단계까지 올라갑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 성공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내적인 면에선 전혀 성장한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졸부에게서 이런 모범적인 형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외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적으로 공허하고 가난하다는 뜻이 됩니다.

바로 이럴 때 느브갓네살의 꿈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무의식이 보내는 부정적인 보상이고 환원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 조정의 메시지이고 미래를 예측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예시적 기능입니다. 따라서 꿈은 그에게 미래를 상상하고 의욕과 용기를 주어 도약하게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를 평가절하하고 끌어내리고 파괴하고 죽이는 겁니다. 꿈은 그의 평화로운 잠을 훼방하고 그를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게 합니다. 곧 느브갓네살 왕이 꾼 무서운 꿈입니다. 그는 이 꿈을 꾸고 깨어서 다시 잠들지 못하고 번뇌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지는 설명이 필요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꿈이 반드시 나쁜 꿈은 아닙니다. 꿈이란 예언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꿈은 반대라니까' 하면서 무시해 버려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꿈의 느낌과 성찰이 우리의 태도에 가해질 때, 그것이 우리의 전체 인격을 타격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곧 자신을 성찰하고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꿈을 헛꿈으로 바꾸지 않고 그 메시지에 합당한 이해와 태도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찰이란 본래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모습과 기능이란 게 수시로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연의 변덕처럼 그것은 본질적으로 믿음의 대상이거나 믿을 수 있는 게 아닌 겁니다.

대개의 인간관계도 그렇지만 특별히 교회 생활에 대해 제가 가끔 말씀드리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끼리끼리 놀라'는 겁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하지 말자'라거나 '배타적으로 놀자'는 게 아닙니다. 서로 미워할 혐의를 만들지 말고 정중한 거리를 두어 경계와 예의를 지키고, 부질없는 시기 질투 경쟁 같은 데 관심을 쏟으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가능한 친근하고 즐거운 데에 몰두하라는 겁니다. 이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안입니다. 평안이란 안정과 고요를 말합니다. 평형상태, 균형 상태, 안정적이고 균일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도 않았는데도 큰일들을 벌이는지 우리는 이 점을 아주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음모를 꾸미고 원수가 되는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불안하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흥분하고 잠을 못 이루고 괴롭히고 괴로워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슬퍼하면서 우울에 떨어져 삶의 의욕을 잃는지…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바로 그러한 속음과 속임에 대한 벗어남의 비결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해방의 비책입니다. 어떤 해방이죠? 본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적 평안의 재선포입니다.

5.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는 제국들의 통치도 결국 한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심리적인 현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거기에는 자연과도 같이 평형을 맞추어 평화를 유지하려는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겁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잘난 사람도 없고 더 높은 사람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우쭐댈 이유도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평화로운 배려와 예의와 사랑과 즐거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국의 정신, 제왕의 정신은 느브갓네살의 혼미와 동물성 곧 미친 마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진짜 꿈이 말하는 존재의 위협을 알아듣지 못하고 헛된 꿈(망상)을 꾸게 합니다. 망상에 빠진 자들이 그 망상을 위대하고 원대하고 놀라운 꿈이라고 선전하는 겁니다.

한동안 한국교회가 꿈과 비전 얘기로 들썩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꿈 얘기를 통해 유명해진 어떤 목사님이 그 후 완전히 망가져 비전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꿈꾸는 사람이었고 잠꼬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 게 아닙니까? 다니엘은 말합니다. "그런즉 왕이시여, 당신의 죄를 의로운 일로 씻어 내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당신의 죄악을 씻어 내시면 아마 당신의 평안이 연장될 것입니다. 왕께서 이것을 깨달은 다음에야 왕의 나라가 다시 왕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왜 십자가 곧 자기 부인이 필요한가요? 자기 부인(성찰과 각성)이 안 된 상태에선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걸까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겁니다. 마치 전염병에 걸린 환자가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고 방황하는 친구가 방황하는 친구에게 조언해 주는 격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가장 신념에 찬 확신이 가장 위태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납법의 정당성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100년 동안 규정된 신학적 전제 위에서 연역적으로 사유하고 설교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적인 현실에 대하여 보상적이고 예시적인 차원의 해석이 못 되고 따라서 문제 해결도 못 되고 구원도 아닙니다. 무지가 무지를 이끌어 가고 있을 뿐입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곧 우리 교회 가운데 지금도 꿈에서 현실로 깨어나지 못하고 현실에서 잠든 채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꿈에서 무엇을 볼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요? 여러분은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계속 유지시킬 것인가요? 과연 신앙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 것일까요?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인생도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영적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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