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0년대의 시인들 중에 김영승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반성'이라는 제목으로 희극적이면서도 의미 깊은 연작시를 써서 인기를 끌고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그중에 제가 가끔 인용하게 되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반성 71

건너 테이블엔 두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목에 힘을 준 채 나직이 말하고 있었고 한 사나이는 숙연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 하나를 놓고 폭력을 주고받은 선후배 간이었다. 야 인마, 영국 수상까지 지낸 윈스턴 처칠이 왜 그 수많은 유태인을 죽였나? 선배는 그렇게 말했고 후배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뚝배기 속의 순대와 돼지 허파를 젓가락으로 뒤척이며 그 여자를 생각했다. 영국과 독일과 윈스턴 처칠과 히틀러가 순대와 돼지 허파처럼 섞였어도 먹을 만하면 그냥 먹어 버리는 그 여자의 식성을 생각했다. 두리뭉실 배고프면 먹어 버리는 우리네를 생각했다. 맛있게 잘 먹고 또 소주를 마시고 있는 배고픈 나를 생각했다.

▲ 그리스도께서는 비유로 현실을 환기시키곤 했습니다. 비유가 원천 봉쇄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비유를 보고 비유를 깨닫고 비유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의 핵심은 "야 인마, 영국 수상까지 지낸 윈스턴 처칠이 왜 그 수많은 유태인을 죽였나?"라는 선배의 질문과 그에 대하여 "예,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후배의 서문동답 (?) 내지는 우문우답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는 겁니다. 제대로 된 게 없는 이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여자 하나를 놓고 폭력을 주고받는 현실로 나타납니다. 여자가 무슨 물건도 아닌 담에야 이런 일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선배의 질문입니다. 그냥 처칠도 아니고 '영국 수상까지 지낸 윈스턴 처칠'입니다. 그렇게까지 정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 다음 전혀 엉뚱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이어 가는 겁니다. 영국 수상까지 지낸 윈스턴 처칠이 '왜 그 수많은 유태인을 죽였나?' 잠시 이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후배는 '예,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후배 역시 유태인들을 학살한 괴물이 처칠이 아니라 히틀러라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고, 너무나도 잘 알지만 분위기상 감히 그런 말을 못하고 '개떡 같은 질문에 찰떡 같은 대답'을 한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해야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알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알면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침묵하고 모른 척 용인한다는 것이야말로 반성을 요하는 중대한 진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진실이란,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 전체의 진실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인생이 만들어가는 삶의 진실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시가 오늘 주제인 비유(παραβολή)에 관해 설명하는 데 적절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가 그대로 하나의 전체적인 비유이기도 합니다. 비유의 효과는 보다 근본적인 방식의 현실 환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 이야기된 단편적 에피소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파문을 일으킵니다. 즉 파문과 동요가 비유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듣고 아무런 파문도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비유 자체가 아무런 파문도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유가 잘못됐거나, 듣는 사람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했거나 하는 둘 중 하나에 해당되는 문제일 겁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실제 있었던 일화로 제가 그 교회에 다니던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교인들이 자신의 뜻에 반대하거나 의견 조정이 안 될 때 당회든 제직회든 무슨 모임이든 구성원들을 주일날 예배 시작 직전에 소집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면서 시간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기 전에 그간의 갈등을 끝내야겠다. 믿는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지금부터 간단하게 말씀 한 구절을 보고 기도하겠노라고 엄숙히 선언을 합니다. 그 다음 성경 몇 장 몇 절을 펼치라고 명령을 하는 겁니다. 또 누군가를 지목해 읽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목을 받은 사람은 당황스럽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얼떨결에 마지못해 찾은 구절을 읽겠지요? 읽고 나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목사님이 한마디 하는 겁니다. "이제 아셨지요?"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곧바로 "그럼 시간이 없으니까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회개와 반성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인지, 자기가 전부 다 대신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도로써 타인들이 해야 할 회개와 반성과 결단까지를 다 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다음입니다. 그 얘기를 저에게 들려준 사람이 이렇게 말해 주었던 겁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날 읽은 성경 말씀과 우리들 사이의 문제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왜 목사님께서 그 구절을 펼쳐 읽도록 하셨는지,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는 아닙니다. 현실의 한 일화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맥락이 실종된 목사님의 성경 구절이 어떻게 성도들을 제압하는 무기로 작동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을 '암시'라는 말로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그의 정신 치료 기법을 설명하는 글에서 '암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암시란 쉽게 말해 의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환자에게 암시해서 환자가 그 암시에 부응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사용하는 암시의 기법은 단기적으론 매우 효과가 크다는 겁니다. 의사들이 암시의 유혹을 많이 받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기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암시에 의한 치료는 위험한 것이라고 칼 융은 단호히 반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암시는 환자 자신의 독립적인 자유와 직관의 가능성과 능력을 현저하게 파괴해 버려서 나중에는 그를 더 위태롭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것은 환자를 현실과 연결시켜 주고 회복시켜 주는 게 아니라 오로지 의사 자신에 대한 기대와 의존을 높이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 의사는 점점 무책임해지고 자기 편의적으로 환자를 다루게 되고, 환자는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암시에 관한 칼 융의 설명은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가 놓인 목회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바가 있다 하겠습니다.

2.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8-10)

하나님이 이사야를 불러 소명을 주시는 장면인데 주목을 끄는 것은 예언자로서 이사야가 펼쳐야 할 소명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렇게 말해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라고 말해라. 그래서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왜 내가 이렇게 하는지 아느냐.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말의 방식, 말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사야의 선포 방식과 하나님 명령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복음서'에 오면 이사야의 이러한 선포 방식은 예수의 복음 선포의 형식에 그대로 인용되고 적용됩니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마 13:34)'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막 4:34)'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록해 놓은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해야겠지요? 그들은 왜 자기들과 함께 계실 때 해석해 주셨다는 내용은 정작 기록치 않고 아직 해석되지 않은 날것 상태의 비유를 기록해 놓은 걸까요? 아마 복음서에 기록된 횟수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빈번히 사용하셨을 것이라 짐작됩니다만, 실제로 예수는 자신의 복음 특히 복음을 설명하는 비유에 관해 여러 번 이사야의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막 4:11-12)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눅 8:10)

다음 본문에는 좀 더 그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0-15)

결론을 서둘러 말하자면 일종의 반어(反語, Irony)지요? 뜻을 강조하기 위해 '비꼼' 같은 방식의 말투를 쓰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이 백성은 부패한 상태에 있다.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까지 강조를 해 준다고 해도 이놈의 백성은 도무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절)'라는 말씀은 반어가 아닌 서술문으로서 반어법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신 대목이라고 할 겁니다.

왜 직접 말하지 않고 비유로 말하는가? 거기에는 비유의 속성, 비유의 효과, 비유의 작용 과정에 대한 성찰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비유가 환기시키려는 현실은 비유라는 방식과 불가피하게 관련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심각히 뒤틀려 있기 때문입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환경이나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부패한 상태에서는 무엇을 말한다 해도 즉시로 그 부패에 함몰되어 버린다 이 말입니다. 때문에 뭔가를 직접 이야기해 주기보다 그 부패가 어떤 상태인지를 먼저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곧 이사야의 반어처럼 즉시로 알아듣기 어려운 비유로써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청중의 상태를 깨닫게 해 주려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을 해 준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기록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만일 그 해석까지 기록해 놓았다면 오해만 더 커졌을 테니까요.

이것은 가령 이런 비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말 중에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이 있지 않습니까. 진리의 선생이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니까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 자신을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는 식입니다. 혹은 이걸 가지고 설교를 하는 거지요. '여러분,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둘째, 셋째…'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어야지만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대개는 오해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짜로 알아들은 사람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이 첫 번에 벌써 알아듣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겐 구체적이고 부가적인 설명은 자기를 무시하는 잔소리가 됩니다. 그건 사람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이고, 타인의 자기 결정권을 함부로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지시하는 내용이란 사실 온통 자기가 원하는 것들일 뿐이죠.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처럼 역설하는 말쟁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청중은 조삼모사(朝三暮四)냐 조사모삼(朝四暮三)이냐에만 신경을 쓰지 이 상황의 진실을 통찰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제시해 주어야만 알아들은 것처럼 여기는 청중은 사실은 못 알아들은 겁니다. 이미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 겁니다. 그가 진정 어른이 되고 어른 대접을 받으려면 그 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기껏해야 남이 시킨 남의 일을 자기 일로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물론 어른이 된다는 것보다는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러 있는 편이 속 편한 측면이 적지 않지요. 그러나 그것이 지혜로운 길이라 여겨 일부러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대부분은 권위 있는 타인을 추종하는 편이 편안하고 대세를 따라 타인들의 인정에서 소속감과 안전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이 소망은 항상 두 가지 선물을 받게 됩니다. 채찍과 당근, 율법과 은혜. 그 사이에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의 취약함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빙자하여 성도들의 순종과 복종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을 양산해 냈습니다. 개신교도를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반항하는 사람들)라 부르지만 사실 한국교회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할까요?

이건 사실 기독교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사회 전체가 합리성이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자유 평등 정의 진실 같은 말을 금기시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근본적으로 뒤틀린 환경, 부패한 의식 상태에서 그것을 일깨워 주는 말하기 방식이 비유입니다. 깨닫는 사람은 첫 번에 무슨 말인지 깨달을 것이요, 못 깨닫는 사람은 그동안 뭔가 가졌다고 여기던 그것까지 헷갈려 빼앗기게 되는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성도들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무엇이 잘못인지, 그게 어떻게 자기에게까지 소급되고 적용되어 그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건지를 밝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의로운 척 교회나 세상이 잘못됐다고 개탄을 하면서 여전히 거기에 속해 있거나 머물러 있습니다. 매주 설교를 통해 뭔가를 새로 얻어도 시원찮을 텐데, 매주 뭔가(적어도 시간)를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있는 것조차 빼앗기고 있는 자기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자신이 회의하는 교회에 헌금을 하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참여를 하겠지요? 그것을 자기는 나름대로의 실천이고 주님을 위한 봉사라 편리하게 생각할 겁니다. 이게 소위 현재 대형 교회 프레임에 갇힌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자기모순입니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이 비유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 됩니다. 가장 충성스러운 신념가가 실상은 가장 안티의 기여자가 되는 셈입니다. 어떤 구체적인 사례로써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저의 이 말 역시 어떤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오해를 사거나 적대자를 낳거나 잘못된 판단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의 이 말을 알아들은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겁니다. 다시 말하면 비유라는 방식은 항상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 이전의 성찰이나 인식, 태도, 자세, 관점과 먼저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진정한 행동이 출발합니다.

그러나 비유로 환기시키는 그리스도의 방식을 거부하는 세상은, 비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암시를 선호합니다. 그것은 마치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예술영화가 대중들에게 거부되고, 모든 것을 영상 속에서 다 처리해 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잘 팔리고 먹히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관객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영화가 다 알아서 해주듯이, 만능이 된 설교자가 전능한 방식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는 판단과 무엇을 해야 한다는 지침까지 일일이 암시해 주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하느냐'겠지요? 그러면 다시 청중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이 딱 거기까지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식입니다.

이와 같이 암시는 언제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론적 성찰이나 직관, 태도, 자세, 관점 같은 것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거나 차단하고 단절시킵니다. 이때 '비유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할 줄 모른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비유라는 형식의 이유와 불가피성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자면 즉물적 욕망, 프로이트 식의 끝없는 소망 충족, 아들러 식의 권력의 의지만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에 암시를 사용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접했을 때 영적(본질적이고 근원적인)인 인식의 변화와 자각이 일어났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비록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인식상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복음이 말씀하는 비유에 값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서의 비유를 전체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해 버리는 데 있습니다. 비유를 아주 해체시켜 버립니다. 어떻게요? 즉각적인 자기 멋대로의 소망과 권력의지에 입각해 '이건 이거, 저건 저거'를 말하는 것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유권해석(authoritative interpretation, 有權解釋)이란 게 뭡니까? 국가기관이 권력에 의지해서 내리는 공권적이고 강제적인 해석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내리면 누구라도 그것을 아니라고 부정하고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의 설교라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한다는 가장 중요한 측면에서 일종의 그 교회 안의 유권해석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대개 어떤 사회적 사건이 터졌을 때 유명하다고 하는 설교자들이 내놓는 설교들을 들어 보면 곧바로 그들이 그 사건에 관해 내리는 유권해석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세월호 사건에 관하여 '침묵하고 회개하며 기도하라'는 설교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성도들에게 이 현실(비유)이 주는 동요와 파문을 차단하고 그 대신 이렇게 결론 내리라는 암시를 제공하는 설교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찌 그렇게 성서와 복음이라는 전체적 비유의 원관념을 현실마다 곧바로 일관되게 꿰뚫고 있는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그들의 태도를 보면 언제나 자기들은 이 모든 말씀이 가리키는 모든 실상의 완성태를 즉시로 이미 다 완전히 알고 있는 듯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데 자기들은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이렇게 하라는 말씀, 저건 저렇게 하라는 말씀'. 이런 식으로 첫째, 둘째, 셋째… 일목요연하고 일사불란한 유권해석을 내립니다.

가끔 어떤 설교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주님의 뜻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철없는 교인들이 불쌍하다고 울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 말에 따를 것을 촉구하는 선포의 방식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게 한 다음 가령 금번 교회가 주님을 위하여 제2성전을 지으려고 하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참해 달라고 촉구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청중들은 어찌 되는 걸까요? 이러한 행태들은 암시일까요 비유일까요? 그것으로 과연 현실을 환시키는 복음이라는 이 비유의 목적은 달성될 수 있는 것일까요?

3.

지난주에 보궐선거가 끝났습니다. 선거 결과를 두고 많은 말들이 분분한 데, 가장 보편적이고 많이 공유되는 얘기는 어떻게 이런 결과가 가능한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특정 정파를 지지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선거 직전까지 벌어지고 있던 현실들을 생각할 때 현 집권 새누리당은 도저히 선거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또 사실 말할 것 같으면 세월호 사건이나 성완종 리스트 하나만 가지고도 유럽의 선진 국가였다면 벌써 국민소환이나 도편추방이 아니라 사법 처리를 당해도 마땅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현실에서는 여전히 승리를 하는 겁니다. 제 딸의 친구인 여학생이 저에게 이렇게 묻는 데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욕하면서 새누리당을 찍는 거죠?" "글쎄…."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그럴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결론은 이것은 어쨌든 우리를 짓누르는 거대한 암시라는 겁니다. 이 암시는 샘이 깊은 물처럼 뿌리 깊은 나무처럼 아주 오래된 것으로 여하한 현실을 환기시켜 주고 진실을 일깨워 주려는 일체의 비유(징조, 사건, 현실)를 아예 알아듣지 못하게 단절시키고 차단시킵니다. 곧 어떠한 성찰도 깨우침도 그에 따르는 행동도 원천 봉쇄를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정말 대단한 암시의 상징성을 지닌 말이라 할 것입니다. 이 암시는 일체의 비유(사건) 속에서 우리의 인격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암시를 줍니다. 고작 정세 분석이나 하고 대세와 여론의 추이에 따라 왈가왈부하는 게 전부입니다. 가령 왜 사람들은 세월호 같은 사건을 통해서도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 걸까요.

그 암시의 핵심 단어를 말하라 한다면 저는 현재는 '종북'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기원이 오래된 이 무시무시한 암시는 거의 모든 국민을 알아서 기게 만들어 왔습니다. 언제까지 얼마나 오래 갈지 장담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누구도 이런 상황이 건강하고 밝은 미래를 위해 유익하다고 여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폭력성이 맥락에 닿느냐 닿지 않느냐의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왜 영국 수상까지 지낸 윈스턴 처칠이 유태인을 죽였나?' 하면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해야 하는 식입니다. 아무 구절이나 펼쳐 읽고 '이제 알아들었습니까?' 하면 왜 그 구절인지는 몰라도 '아멘' 해야 하는 식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월호 문제에 종북을 운운하거나 그런 암시를 성경 해석에 이용하는 경우를 본다면 그런 교회나 목회자로부터 단호히 떠나야 합니다. 그들은 가장 나쁜 암시를 사용하는 선생들입니다. 현실이 봉쇄돼 있기 때문에 비유로 말하는 것인데 현실은 지금 비유조차 차벽 같은 암시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리고 봉쇄된 문(門)들이 열릴까, 곧 부활의 무덤들이 열릴까 두려워 지키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가 원천 봉쇄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비유를 보고 비유를 깨닫고 비유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현실이라는 비유의 의미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현실의 비유성에 대하여 자각해야만 할 때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눅 12: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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