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 사이에서는 '목사가 주를 위해서 충성하면 그 가족들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돌봐 주신다'는 신화가 있다. 그래서 그간 목사들은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도 교회 일에만 매달려도 하나님이 가정을 지켜 주실 것이라 믿으며 목회에만 매진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이야기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박윤선 목사, 그는 조국 교회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신학에 대한 학문적 기반이 일천하던 일제시대 때 미국 유학을 통해 조국 교회에 개혁파 신학을 보급한 인물이며, 20세기에 박형룡과 더불어 한국 장로교에 쌍벽을 이루는 신학자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평생의 역작 <박윤선 주석>은 지금까지도 조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사랑받는 주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전히 그의 후학들은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업적을 칭송해 마지않는다. 물론 그가 남긴 신학적 유산은 조국 교회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외적으로 나타난 그의 업적은 찬란하기 그지없지만 이 책을 통해 나타난 그의 가정사는 너무나 처참하다. 그간 우리가 알고 있던 신앙적 상식이라면 일생 동안 신학교에서, 교회에서 열정을 다 바친 목사이기에 하나님이 그의 가정쯤은 챙겨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불행하게도 그의 자식들 중 대부분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망과 아픔을 간직한 채 신앙을 떠나 살았다(말년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누구보다 주를 위해 열심히 충성했건만 어째서 그의 자식들은 그 아버지 못지않은 신앙은커녕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까? 아무리 주를 위해 충성을 다해도 목사가 자기 가정을 잘 돌보지 않으면 하나님이라고 해서 대신 그 가정의 아버지 역할을 담당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가정은 뒷전인 채 주의 일을 한다고 목회에만 전념하는 목사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여전히 조국 교회 안에서는 목회를 위해서는 목사의 가정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정보다 교회를 우선시해야 좋은 목사라고 생각한다. 밤이라도 교인이 전화하면 달려가야 하고, 언제라도 목사의 집은 열려 있어야 한다. 언젠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 바로 옆에 살림집을 얻었던 목사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교인들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는다며 푸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목사들조차 가정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좋은 목사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런 형편이니 과거의 조국 교회는 오죽했으랴.

교회 내의 인식이 그러하니 목사는 자기 가정을 돌보고 싶어도 그럴 환경이 주어지지 않고, 가정을 챙기려면 다른 교인들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러는 사이 점점 가정은 뒷전이 되어 가고, 목사 사모들과 자녀들은 가장의 부재 속에 불만이 쌓여 간다. 특히 자녀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며 정서적으로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박윤선 목사의 경우는 좀 더 특별하다. 그는 자기 가정을 돌보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책을 쓴 박혜란 목사는 책을 통해 내내 박윤선 목사에 대해서 아버지로서의 무책임함을 지적한다. 아버지는 늘 신학교 일로 바빴고, 집에 오면 책을 읽거나 글만 쓰고 어린 자녀들과 놀아 주기는커녕 떠들거나 소란스러우면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가 아내와 사별한 이후 자식들을 고아원으로 보낼 생각까지 했다는 지점에서는 아연실색케 한다. 가정보다 교회를 우선시하는 교회 분위기와 맞물려 '주의 일이 방해받으면 안 된다'는 논리로 그런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겪었던 가정 내에서의 정신적 내상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어머니를 일찍이 여의고 아버지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박 목사 가정의 아이들은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그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 온전한 가정을 경험하지 못했던 자녀들은 온전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저자의 오빠들은 이혼을 경험했고, 큰 오빠의 경우 두 번이나 이혼을 했다. 책을 쓴 저자조차도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결혼 생활이 평탄치 않았음을 고백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정신적 상처가 일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힌 것이다.

나이 칠십의 백발이 되어서도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책을 보니까 왠지 가수 임 모 씨와 배우 최 모 씨가 생각난다. 임 모 씨와 최 모 씨는 비슷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둘 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보인다. 때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다가도 어떤 상황이 닥치면 무섭게 돌변하기도 한다. 심리 상태가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타입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의 아버지는 당대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임 모 씨의 아버지는 최고의 아나운서였고, 최 모 씨의 아버지는 최고의 영화배우였다. 그런데 이 두 아버지들은 어린 시절 자식들을 버렸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자란 두 사람은 세상에서 주목받는 가수와 연기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행보를 보면 그 어린 시절 상처가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다. 그러니 어릴 적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한국 신학계의 거장으로 모두가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조차 알고 보면 가정사 속에 인간적인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저자가 가정에서 발견한 몇 가지 사실로 박윤선 목사의 신학과 신앙 전체를 평가하려고 드는 데서는 흔쾌히 동의하기 어렵다. 책에 따르면 그는 기도와 말씀 읽기, 신학교 일 등은 영적인 것으로, 가정에서 가사를 돕고, 자녀들과 놀아 주는 것은 육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개혁 신앙에서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을 크게 경계한다. 그런데 개혁 신앙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창한 인물로서 과연 박윤선 목사가 이렇게 이원론적 신앙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의 주장이 맞다면 개혁 신앙을 한국교회에 보급했던 박윤선 목사가 일상에서는 전혀 개혁 신앙적이지 않고 성과 속으로 구분 짓는 이원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정사에 소홀했던 것만 가지고 그의 삶 전체를 이원론에 빠져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도 허물 많은 한 인간일 뿐이요, 아직 남존여비 사상이 심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고 치자. 문제는 장성한 자녀들이 냉랭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모임을 마련했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을 정죄하고 과거 일들에 대해 변명하기 급급했다는 사실이다. 자녀들이 바란 것은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였다. 그러나 한 평생 목사로 살아온 그는 아버지를 원했던 자식들에게도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목사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떠날 때까지 자식들과 온전한 화해를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그것은 자식들에게도 영원히 풀지 못한 숙제를 안겨 준 셈이다.

박혜란 목사는 책 후반부에 아버지가 남긴 신앙은 율법주의에 매몰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주일에 버스도 못 타게 하는 등 당시의 신앙생활은 율법주의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의 신앙 전체를 율법주의 틀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박혜란 지음 / 아가페북스 펴냄 / 288쪽 / 1만 3,000원

저자는 아버지처럼 조국 교회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지사충성하여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마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주인을 모시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실 이 부분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사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지사충성은 많이 강조해 왔지만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기뻐하며 살라는 것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내가 지는 십자가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지고 구원의 기쁨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인생사를 써 내려간 내용이라 쉽고 흥미롭게 읽히지만 곱씹어 볼 부분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작게는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게 되며, 크게는 조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글쓴이가 박윤선 목사의 딸이었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에 대한 그의 비판이 호소력 있게 들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썼기 때문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온 자기 인생길을 좀 더 담담하게 반추해 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가정에서 보았던 아버지를 가지고 그의 신학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이 부분은 더욱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목회자라면 누구나 일독을 해야 할 책이고, 목회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한성훈 / 살림교회 목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