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교회 이문장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2014년 12월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가 최종 결론 내렸습니다. 이문장 목사는 이대위의 결론에 해명했습니다. 이대위의 <이문장 목사 이단성에 대한 연구 보고서(연구 보고서)>와 이문장 목사의 답변서 전문을 각각 싣습니다.

건전한 신앙을 위협하는 이단 사상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번 이단으로 판명되면 그 파장이 엄청나기 때문에, 이단 규정은 신중하고 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분량이 길지만, 독자 여러분이 직접 보고 판단해 보시라고 전문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두레교회 이문장 목사의 이단성에 대한 연구 보고서>(<연구 보고서>)에 대한 본인의 답변입니다. <연구 보고서>의 결론들을 따라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죽음, 원죄, 속죄에 대하여

1) <연구 보고서>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뱀의 죽음으로 말하는 것은 교리를 떠나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힘들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본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뱀의 죽음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고, 그 죽음과 더불어 사탄(뱀)이 멸망하게 된 것을 부연하여 설명해 주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놋뱀이, 놋뱀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왜 하필 놋뱀인가? 사실상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것은 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에요."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설교에서)

본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것을 부인할 목회자나 신학자는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3:14에서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셔서, 구약의 다른 상징들도 많은데 왜 하필 '뱀'을 언급하셨는지, 그 배경에 어떤 뜻이 들어 있는 것인지 성도들에게 풀어 준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승리는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죽음을 가져온 것임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또한 "사실상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것은 뱀"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사실상 창세기 3:15에 기록된 내용, 즉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된 것으로 설명해 준 것입니다.

2) <연구 보고서>에서

"'육신 속에 들어 있는 본래의 예수님'이라는 표현 속에는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사상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구별이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칼케돈 신조(451)에 위배되는 것으로 기독론적인 오류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육신 속에 들어 있는 본래의 예수님'은 '인자'를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즉, 설교 본문인 요한복음 3:14에서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인자'(Son of Man)를 달리 표현해 준 것이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여 설명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같은 설교에서 본인은 '인자' 예수님을 '육신으로 이 땅에 사셨던 그 예수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본인은 2014.4.13. 종려주일 설교에서 마태복음 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을 본문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본래 하늘에 계셨던 분인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설교의 요지와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로 말씀하셨다. 그 '인자'(사람의 아들)는 다니엘서 7:14 환상 가운데 등장하는 '인자 같은 이'이다.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고 가르치셨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격이신 분임을 말해 준다. 그 '인자'가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런 높으신 분이 우리를 섬기러 이 땅에 오셨다. 아담이 타락한 결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속량해 주셨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다. 이제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 이러한 내용으로 종려주일 설교를 들은 두레교회 성도들은 '인자'에 대한 전이해(pre-understanding)을 가지고 있어서, 본인이 '육신 속에 들어 있는 본래의 예수님' 또는 '육신으로 이 땅을 사셨던 그 예수님'을 말하면 그것이 '인자'를 언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으나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격으로 계셨던 그 '인자'이며, '권세와 나라와 영광'을 갖고 계시는 그 '인자'라는 사실을 반복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소위 '오심 어법(elthon-sayings)'이 있는데, 예수님은 종종 "내가 온 것은(I came…)", "인자가 온 것은(The Son of Man came…)" 등의 어법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요 3:14 본문도 이러한 '오심 어법'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선재하셨던 분이시라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려 주려는 차원에서 사용한 표현이었습니다.

<연구 보고서>의 어법을 빌리자면, 본인은 그리스도의 신성(인자 예수님)과 인성(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구별하여 언급한 것이지, 분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본인은 2014.4.13. 종려주일에 마태복음 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충분하게 강조하고 성도들에게 그 의미를 강조하고 도전하기도 하였습니다.

3) <연구 보고서>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뱀의 죽음, 사탄의 죽음이라고 함과 동시에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은 속죄론에 완전히 위배되는 이단 사상이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① 본인은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연구 보고서>가 사용한 설교 본문에서조차 본인은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과 대속적 죽음을 뚜렷하게 강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달려 돌아가셨지만' '육신으로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뱀이 물어서 독이 온 인류에게 퍼진 그것을 다 예수님이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는데'라고 하여 본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명명백백하게 언급하였습니다.

본인은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는 새벽 설교에서 예수님의 육체적 죽으심과 그 대속적 의미를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② <연구 보고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달려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잖아요"라는 설교 내용을 근거로 본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부정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설교의 맥락이나 그 표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 문장의 앞부분에서 본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달려 돌아가셨지만"이라고 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이 문장의 뒷부분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잖아요"라고 한 것은 이미 두레교회 안에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회중(성도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 부분입니다. 즉, 본인은 2013년 고난주간 설교에서도 그런 부분을 강조하였고,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행할 때 항상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으나 부활하셔서 지금은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예수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잖아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형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이라고 찬양하는 그런 차원의 내용입니다.

본인은 에딘버러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8년 4월호 <목회와 신학>에 '한국인들이 지니는 고난주간의 고정관념들'이라는 제하의 논문을 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본인은 파니 크로즈비(Fanny Crosby)가 작시한 <예수 나를 위하여>를 영어 원문과 비교하고, 한국교회가 고난주간을 지나치게 신파조로 기념하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본인은 예수님이 지금 현재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살아 계신 분 앞에서 너무 슬퍼하고 신파조로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는 것을 예수님이 싫어하시지 않겠느냐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글의 말미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심을 고백하고 있음을 새삼 환기받을 필요가 있다. 살아 계신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이 자신의 고난을 기억하는 풍경을 보시고 '그래, 한국교회 성도들아. 참 기특하다' 이렇게 말씀하실지, 아니면 '내가 죽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그리고 너희와 이렇게 동행하고 있는데, 좀 즐겁고 희망적으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 이러실지, 우리의 입장에서 차분한 신학적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③ "육신 속에 들어 있던 본래의 예수님은 죽음이 건들 수 없는 그런 분이었고"라는 표현은, 육신이 되어 나타나신 '인자' 예수님은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하나님께 받으신 존재이시며 만왕의 왕 되시는 그런 대단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언급이었습니다. '죽음이 건들 수 없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죽음조차도 시비를 걸거나 무너뜨린다거나 멸망시킬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4) <연구 보고서>에서

"원죄를 뱀에게 물린 것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원죄와 속죄에 대한 이 목사의 이단적 사상의 출발점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죽음을 해독 사건으로 표현한 것과 일관되기 때문이다. 원죄는 아담의 불순종이지 뱀(사탄)에게 물림으로서 그 독이 몸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런 잘못된 교리는 통일교의 이단적 원죄설과 연관된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① 본인은 원죄를 뱀에게 물린 것으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본인은 아담이 뱀의 유혹(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실을 뱀에게 물린 것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즉, 아담이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을 '뱀에게 물렸다'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즘에도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된 현상을 '꽃뱀에게 물렸다'라고 표현하듯이, 성도들이 아담의 불순종과 그 결과를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한 것입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 영원히 죽게 된 우리 자신의 현실을 뱀에게 물려 죽게 된 것으로 설명하여 성도들이 알아 듣기 쉽도록 일종의 예화적 차원에서 설명해 준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뱀에 물린 것을 별개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물에 빠졌다'는 그림 언어로 언급하시고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과 같은 차원의 그림 언어에 해당합니다. 즉, '물에 빠져 죽어 간다'와 '뱀에 물려 죽어 간다'는 것은 인류의 상태를 설명하는 같은 그림 언어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 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들어 올린 뱀을 보고 살아났던 것처럼, 죄악에 물들어 살던 인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아나게 된다는 사실을 그림 언어로 설명한 것입니다.

② <연구 보고서>가 인용한 설교에서도 본인은 아담의 불순종이 죄의 기원(원죄)임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시고 인간을 두신 그 자리는 광야가 아니라 에덴에 두셨는데 뱀의 꼬임에 넘어감으로써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에덴을 잃어버리고 광야로 내몰리는 이 삶을 살게 된 것을 그것을 기억하도록 하나님께서 뱀을 보내 주신 것이에요."

본인은 고난주간 두 번째 새벽 예배 설교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에서도 아담의 불순종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원래는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인류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으로 떨어져서 죽은 존재가 된 그것을 여기서 언급을 합니다. 그 이유는 먹지 말았어야 될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땅에 떨어진 것이에요. 여기서 과실을 맺는 것은 살리는 과실을 말씀하는 것이고 땅에 떨어져서 죽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먹지 말아야 되는 그 과실을, 선악과의 열매를 잘못 먹는 바람에 떨어졌어요. 떨어진 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타락'했다. '락'이 떨어진 것 아니에요? 타락했다.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이에요."

"선악을 알게 하는, 먹지 말라고 하는, 그 과실을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그래서 타락을 하게 돼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거에요."

또한 본인은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 설교 안에서 아담의 불순종과 함께 예수님의 대속적 십자가 죽음도 뚜렷하게 강조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서 죽어 가던 사람들 장대 위에 들린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던 것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들도 살아나고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런 선포를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죄의 근원이죠. 죄의 씨앗이죠. 그 뱀의 독 원래 근원인 그 독을 다 해독시키는 그런 죽음으로 죽으신 것에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 때 말하는 그 죄는 뱀이 아담을 물어서 그것이 온 인류에 다 퍼진 그래서 그것 때문에 죄를 짓게 만든 그 원인이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다 씻음을 받는 그래서 내 안에서 나를 주관하고 나를 장악하고 좌지우지했던 근원, 그 뱀의 독이 다 해독이 되는 그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일어났다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 가고 신음하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었구나 그것을 우리가 고백한다면…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다 살아난 것처럼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내가 살아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속량의 나를 사시기 위해서 뱀에 물려 살던 나를 건져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고 피를 흘리신 것이다는 사실을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그 마음이 있으면… 뱀의 독이 스르르 다 해독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불뱀에 물려서 그 독으로 씨름하는 이 죄악의 상태를 씻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십자가 죽음을 죽으신 것이구나 이것을 깨닫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만 본다면 그것을 인정을 하고 그것을 내 마음에 확신을 하기만 한다면 우리를 붙들고 있던 모든 죄의 사슬들 뱀의 독의 그런 영향들로부터 우리가 다 해독을 받고 우리가 풀려나는 그런 기적적 인 일이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불순종(타락)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 죄와 죽음과 사탄에 종노릇하며 살던 인류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사실을 구구이 풀이한 것입니다.

2. 이교적 사상과 행태

1) <연구 보고서>에서

"실제로 이 목사는 통일교의 문선명을 구원파의 박옥수 등과 함께 동양적인 것으로 세계에 통하게 한 인물로 묘사하였으므로 그의 원죄와 죄 그리고 속죄 사상에 통일교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① 본인은 '성도의 확신' 시리즈 '성경 연구'를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통일교 문선명과 구원파 박옥수를 동양적인 것으로 세계에 통하게 한 인물로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연구 보고서>는 본인이 강의에서 문선명과 박옥수를 언급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인은 한국교회가 성경을 연구하고 깨달은 것을 가지고 세계 교회를 섬겨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고, 서구 교회도 한국교회의 그런 역할을 기대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이제는 우리가 분발할 때가 되었다는 취지로 강의한 것입니다. 서구 신학을 충분히 배운 한국교회가 이제는 한국적(아시아적) 시각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정리하여 서구와 세계 기독교인들을 섬겨야 한다는 도전을 한 것입니다. 엉터리 같은 이단들은 한국적(동양적)인 것을 가지고 전 세계로 나가서 설치고 다니는데, 정통 교회요 정통 신학을 가진 우리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라고 도전하는 맥락에서 통일교와 구원파 박옥수를 예로 들었을 뿐입니다. 일종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은 싱가폴 트리니티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2002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김중은 총장)에 초청을 받아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신학하기'라는 주제로 다섯 차례 공개 특강을 하였고, 그때에도 동일한 도전을 던졌습니다. 또한 미국 고든콘웰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2008년에는 대전 침례교 신학교에서 개최된 '한국기독교학회'에 해외 신학자 초청 강의에 초청을 받아 (노영상 박사 초청) 전국에서 모인 500여 명의 신학자 교수님들에게 '한국적 신학(교육)의 방향성'이라는 주제 강연을 통해 동일한 도전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본인은 고든콘웰신학교에서 신약신학을(Th.M.), 예일대 신학부에서 신약학을(S.T.M.), 그리고 에딘버러대학에서 성서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Ph.D.) 받았으며, '아시아적 성서해석학'이 주 연구 분야인데, '아시아적 성서해석학'의 맥락도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서구로부터 기독교를 전래받은 이래 서구로부터 성경과 신학을 배웠다. 각 문화권마다 사각지대가(cultural blind spot) 있어서, 한 문화권이 성경의 진리를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다. 서구의 정신세계는 계몽주의 이후 성경적 세계관과 결별할 정도로 세속화되어 왔다. 서구의 계몽주의적 세계관(합리주의, 이성주의, 실증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서구의 성서학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데 한계를 느끼고 또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성서해석에 문제가 있고, 복음주의자인 영국의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의 성서해석도 합리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적 세계에 대한 감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이제는 한국(아시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성경을 연구하여 깨달은 내용을 가지고 서구 기독교를 돕고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서구인의 시각에는 보이지 않는 성경의 진리를 한국인(아시아인)의 시각에서 깨달을 수 있는 해석학적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③ 본인이 '성도의 확신'에서 강의한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을 육성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가 기독교를 서양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렇죠? 지난 100년 조금 더 지난 그 세월 동안에. 성경도 서양 사람들이 가져다 줬고 성경 번역도 서양 사람들이 해 줬고 성경을 읽는 방법도 서양 사람들한테 배웠고 신학도 배웠고… 우리 한국에서 배출한 학자들이 쓰는 책도 많이 있지마는 대부분 서양 사람들의 틀 속에서 그 사람들이 가르쳐 준 방법론에서 쓴 글이라 오십보 백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한국의 또는 동양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서양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런 글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그 단초를 제가 발견을 합니다. 어디서 발견하냐? 통일교에서 발견합니다. 그게 뭐냐? 내용이 좋다는 거냐. 이단이죠. 어떻게 그게 이단인데 성경을 가지고 풀었는데 완전 이단인데 이건 동양적인 거에요. 그거 가지고 세상에 전 세계 다니면서 이게 통하더라. 또 하나 그거보다 좀 가까운 이단이 있습니다. 구원파, 박옥수 목사, 잠실 올림픽공원에서도 큰 집회하고 뉴욕에서도요, 센트럴파크에서 대형 집회를 해요. 그래서 미국 동부 신문이나 방송에 미국 사람들한테 광고를 내기도 하고, 구원파, 아주 이단이지마는 서양 사람들한테 배운 거 중심이 아니라 자기들 나름대로 동양적인 관점에서 해석이 들어가서, 다 그 계보가 있죠. 예전에 문선명 통일교 이전에 김백문 그 계열에 변찬린 이런 토종의 성경을 유교적인 불교적인 선도적인 관점에서 서양 신학의 물을 먹지 않고 아주 독자적으로 도학의 전통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깨달은 걸 가지고 나가니까 어 이게 먹힌다. 이단적인 관점에서 동양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나가면 먹히는데 정통의 관점에서 동양적으로 해석해서 이게 왜 안 먹히냐…

서양의 정신세계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깨닫는 데 한계가 왔다. 이제 동양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를 규명을 하고 서양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 세계를 우리가 이제는 말을 해 줘야겠다. 그런 얘기가 됩니다…

서양 사람들이 못 보는 걸 우리가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눈에도 안 보이는게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서양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여러 영역에서 퓨전을 얘기한다구요. 말씀을 깨닫는 거에도 동양과 서양이 이제는 조우하고 합류를 하고 서로 도와줘야 되는 이런 시대가 왔다. 서양은 우리가 열심히 잘 배웠잖아요. 이 동양에서 서양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 우리만이 볼 수 있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개발을 해서 기독교 전체에 유익을 끼치고 서양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나, 이제 그 부분이 이제는 점점 커진다 우리의 역할이 커진다."

2) <연구 보고서>에서

"이 목사에게는 통일교, 구원파 등 이단들에 대한 비판 의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게 이단이든 뭐든 세계적으로 통하느냐, 먹히느냐 하는 것이 그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하였는데(요일4:1), 이 목사는 모든 영적 현상을 동질적인 것으로 보는 작지 않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① 본인은 '성도의 확신' 강의에서 통일교나 구원파가 엉터리 완전 이단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

본인은 타 종교와 더불어 아시아 기독교 안에서 발견되는 '이단들'이 아시아 신학의 건전한 담론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사실도 누누이 강조해 왔습니다. 선교학 분야에서 말하는 '혼합주의(syncretism)'가 기독교 복음과 토속 신앙이 섞여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단'이 그런 혼합주의의 한 형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신학의 담론(discourse)을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데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복음적이며 어떻게 아시아적인 신학을 세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이단들'이 아시아 기독교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현상에 대하여 항상 경계하며 연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15년 세월 동안 서구 신학계에서 아시아 신학과 선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학문 활동을 하면서도 적지 않은 논문과 강의(강연) 및 서적 등을 한국어로 발표하였는데 <연구 보고서>가 그러한 자료들을 살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② 본인은 모든 영적 현상을 동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연구 보고서>의 '영적 세계에 대하여' 항목에서도 "이 목사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취득하게 되는 영적 세계가 우리나라의 무속 세계를 포함한 다른 종교들에서 경험된다는 신비한 세계와 같은 차원의 것으로 생각한다. 동양 특히 한국 무속인들의 귀신의 세계와 성경의 영적 세계를 동질적으로 보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본인은 영국, 싱가포르, 미국에서 아시아 신학과 선교학 및 아시아적 성서해석학 등을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종교다원주의 내지 다원적 종교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 방법론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본인은 일찍부터 '위조지폐론'이란 관점을 고안하여 종교다원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의 관점이 어떠해야 할지 가르쳐 왔습니다.

'위조지폐론'이란,

타 종교는 위조지폐이며 기독교가 진짜요 원본으로, 타 종교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사람들을 미혹하는 잘못된 가르침이고 결국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위조지폐가 아무리 진짜와 흡사하여 사람들을 속인다 할지라도 아무런 실물 가치가 없는 휴지 조각이듯이, 결국 타 종교를 통하여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이러한 신학적 및 선교적 관점을 지난 20년 동안 일관되게 저술을 통해 밝혔고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본인이 한국과 아시아 종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종교적 체험과 현상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선교 대상지가 어떤 곳인지 파악하고 기독교가 영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국(아시아)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종교다원주의 및 모호한 정체성

1) <연구 보고서>에서

"이 목사는 2014년1월5일 주일 예배 시에 설교 시간에 <마음 깨침>이라는 책의 표지를 화면에 띄워 회중들에게 보여 주면서 소개하였다… 불교 서적인 <마음 깨침> 속에는 위와 같이 성경을 인간이 인간을 세뇌시키고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결과물이라거나 우리 육신은 절대 부활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반기독교적 주장이 강하게 들어 있다. 설령 그 책 속에 교양에 도움이 될 만한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과 기독교의 핵심 사상(성경의 권위, 부활 등)을 부정하는 주장이 들어 있다면 목회자가 회중들에게, 그것도 대예배 시간에 그 책의 표지를 들고 나와 보여 주며 추천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성경적 신앙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는 극단적 반기독교적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을 양 떼들에게 권했다는 것은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이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① 본인은 <마음 깨침>이라는 책을 설교 중에 성도들에게 추천한 사실이 없습니다.

본인은 2014년 신년 첫 주일 설교에서 한 해 주제인 '말씀으로 흥왕하는 교회'를 설교하면서, 네 가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기(수도원 전통). 둘째, 우리 안에 있는 육신과 세상 버리기(청교도 전통 self-mortification). 셋째, 세상을 사는 하늘 지혜, 실천적 지혜 얻기(성서학 전통). 넷째,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 받기(카리스마 전통)'입니다.

본인은 두 번째 설교 요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불교의 <마음 깨침>과 힌두교의 <Freedom through Inner Renunciation(내면의 버리기를 통한 자유함)>이라는 두 권의 책 겉표지만 화면에 띄워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 두 권의 책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도 마음 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고,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마음 공부의 원조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자기 부인'과 '육에 대하여 날마다 죽은 삶'이 있어야 하고, 이런 부분에서 타 종교 사람들보다 한 수 우위에 있어야 하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야 종교성이 강한 한국인(아시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결국 그렇게 되어야 전도가 가능하고 한국(아시아)를 복음화할 수 있게 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육신에 대해 죽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자고 도전을 던진 것입니다.

관련된 부분의 설교 내용을 육성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흥왕해지는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는) 두 번째 관문은요 육신과 육신의 삶,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는 두 번째 관문이 됩니다. 같이 한 번 따라서 하실까요? 육신과 세상을 버리자.

제가 두 권의 책 표지를 소개해 드리려고 가지고 왔어요. 한 번 보시죠. 하나는 <마음 깨침>이라는 책이에요… 오른쪽에 있는 것은 힌두교 쪽에서 나온 책인데요. 책 제목이 freedom, 자유죠. '자유함'인데 inner renunciation, 무엇을 통해서? inner, '내면의' renunciation, '부인, 자기 부인', <자기 버림을 통한 자유함>. 제목이 되는 것이에요. 마음을 깨치는 것도 탐, 진, 치, 욕심과 무지를 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세상을 버리는 것이고 또 힌두교에서도 자기 부인을 통해서 자기 극복을 통해서 자유함을 누리는 이런 목표를 각 종교에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거예요.

그러나 사실 저런 내용들은 원본이 어디 있어요? 원본이 말씀 안에 있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한테 가르치신 것이 뭐예요? 우리가 마태복음16장24절 말씀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어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이 'self-denial'이고 'self-renunciation'이에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저 모습이에요. 사도 바울도 그 본을 받아서 이런 얘기를 우리에게 남겨 주셨잖아요. 로마서 8장 12-14절 말씀.

동양의 백성들이 저 세계를 살았어요. 마음 깨침을 얘기해요. 자기 부인.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유함을 얻자. 많은 분들이 그러고 있어요. 이런 한민족에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육신을 버리고 세상을 버리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저들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불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잖아요?

② <연구 보고서>는 <마음 깨침>이라는 책에서 '무신론, 창조 부인, 계시 부인, 성경 비하, 기독교 비하, 부활 부정' 등의 내용을 찾아 마치 본인도 그러한 내용에 동의 내지 동조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 깨침>이라는 책을 샅샅이 뒤져서 본인에게 해가 될 만한 내용, 본인의 이단성을 주장하는 데 쓸 만한 내용을 찾아 내려 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듭니다. 마치 어느 목회자가 설교에서 "몰몬교라는 이단은 몰몬 태버내클 합창단의 높은 수준의 음악성을 앞세워 성도들을 미혹한다"라고 한 것을, "목사가 몰몬교에 다녔다. 그래서 이단이다"라는 식으로 모함하여 이단으로 모는 사례와 흡사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연구위원들 조차 사실 관계를 확인한다거나 진상을 규명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이런 의도적인 조작을 행한다면 선량한 목회자들은 이런 억울한 모함과 누명을 쓰게 되었을 때 어디에 호소를 하고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4. 기독교에 대한 비하

<연구 보고서>에서

"현재의 기독교와 신학교가 문제가 많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사람이 깔고 앉은 돌과 대화를 못한다고 해서 기독교를 맹탕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신학교에서 그런 것을 안 가르쳐 주니까 맹탕 기독교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는 이상한 기독교를 추구하는 듯하다. 이상한 세계, 곧 입산수도하여 도를 닦음으로서 여러 가지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이교도의 소위 도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며, 기독교까지도 그런 범주에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① 본인이 한국과 아시아의 종교적 배경에서 회람되는 이야기들을 종종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또한 아시아 선교학자로서 한국인(아시아인)이 어떤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그들의 삶의 정황(life-situation)과 종교적 인식을 형성한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익숙해 있는 종교적 현상들을 지적하고, 한국과 아시아인의 종교적 심성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기독교가 한국인(아시아인)의 마음을 얻고, 우리의 삶과 토양에 복음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타 종교 세계에서의 종교 체험과 수련 수행 방법을 간혹 언급하는 것도 한국(아시아)의 기독교인과 신학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영성이나 도덕적 실천이 타 종교의 영성이나 종교적 감화력을 능가해야 한다는 전도적 및 선교적 관심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아시아) 백성에게 비난을 받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비판을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세계, 곧 입산수도하여 도를 닦음으로서 여러 가지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추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이교도의 소위 도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며, 기독교까지도 그런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더군다나 아닙니다.

본인이 교회와 신학교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가 타 종교보다 더 나은 모습, 더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국과 아시아에서 복음 전파와 선교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결국 기독교가 한국인(아시아인)의 "현장 신앙"(actual belief)이 될 수 있는데, 교회와 특히 신학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반성하자고 요청하려는 것입니다. 한국인(아시아인)이 기독교를 "한국인(아시아인)의 종교"로 인식하게 되고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그 일에 중추 역할을 해야 할 신학교가 한계를 드러내고 신학 교육의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기독교가 복음성, 사상성, 운동성에 있어 한국인(아시아인)의 종교적 인식과 경험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입니다.

② 초대 기독교는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을 실전 상황에서 실천하는 일(logos·사역)과 표적과 기사가 따른 일(charisma·사역) 두 가지 측면이 통전되어 유럽 사회를 복음화했듯이, 21세기에 초대 기독교의 모습을 회복해야 세계 복음화가 가능할 터인데, 본인은 그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종교적 및 영적인 환경을 모판과 토양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아시아)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주어야 할 역할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본인은 신학교 교육에 대하여 여러 차례 강의와 강연도 하였고, 논문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특히 본인의 은사이신 월즈(Andrew F. Walls) 박사를 기념하는 논총에서 '21세기 신학 교육'에 대한 주제 청탁을 받고 'Theological Education as Embodiment of Jesus(신학 교육과 예수님 체득)'이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신학 교육을 비판하는 맥락은 주로 서구 신학 교육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이고, 서구 신학교의 '학제(academic schooling)' 시스템을 도입한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교가 이제는 서구가 잃어 가고 있는 영적 감수성을 토대로 새로운 신학 교육을 조타해 내어 세계 기독교에 기여를 해 주어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대하여, seminary(신학교)가 cemetery(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말은 서구 신학교 안에서조차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가 불이 붙어 입학하는 신입생들의 불을 끄는 소방서 역할을 한다는 말도 합니다. 신학교 교육을 받으면 입학할 때보다 덜 종교적(less religious/ less spiritual)인 사람들로 만들어 졸업시킨다는 말도 합니다.

한국(아시아)의 목회 현장은 깊은 영성과 말씀 훈련을 받은 영적 지도자들을 요구하고 있는데 신학교가 그런 현장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많은 사람이 많은 방식으로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학 교육을 받아서는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뿌리 깊은 종교적 토양에 태어나고 살아온 한국(아시아)의 백성들을 감화감동을 시키기 어렵고, 따라서 이제는 말씀(logos)과 능력(charisma)를 제대로 갖춘 영적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지 않으면 기독교의 미래가 어둡다는 사실을 그동안 강의와 강연들을 통해 누누이 역설해 왔습니다.

5. 영적 급수 등 용어에 대하여

<연구 보고서>에서

"이 목사는 영의 세계의 급수를 운운하면서, 신자들을 영적 고수와 하수로 나눈다. 이런 언행은 영적 히에라르키(하이어라키)를 구축하고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지배하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써 위험한 사상이다.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해 급수를 매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날 뿐더러 영적 교만을 조장할 것이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도, 도인, 실력자, 고수, 급수 등의 용어들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은혜의 진리와 거리가 먼 자기 수행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들이다. 이런 용어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의 진리가 아니라 수행의 도, 즉 일종의 율법주의로 향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의 해명입니다.

본인은 성도들의 영적 급수를 매겨 본 일도, 고수와 하수로 나눈 적도 없습니다.

본인이 도, 도인, 고수, 실력자 등의 용어들을 사용한 것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독려하고 예수님 닮기에 분발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지, "아무개 장로님은 몇 급입니다"는 식으로 성도들에게 적용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영적인 고수와 하수를 언급한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적 성장과 관련한 가르침을 한국 성도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이미 문화적으로 친숙한 개념들을 동원하여 설명한 것이고, 이것은 선교학에서, 복음의 타 문화권 전달(cross-cultural communication)에 있어 현지 용어와 개념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달하는 한 유형에 해당할 뿐입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독교 신학과 복음 이해의 지평은 '상징 빼앗기(symbol stealing)'를 통해 확장되었고, 현지 문화권에서 사용하던 용어들을 기독교화(christiainize)한 일은 항상 있어 온 일입니다.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보다는 "주(kyrios)"로 소개한 일이나, 헬라 철학의 "로고스(logos)" 개념을 기독교 신학에 도입한 것이나, 중국 개신교에서 하나님을 "상제(Shang-ti)"로 번역하고 부르는 일과 같습니다.

한국인들은 태권도나 바둑 등 '급수 문화'에 익숙해 있어 영적 성장이나 말씀 체득, 예수님 닮기 등을 급수 개념으로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분발하도록 도전을 던지기 위하여 사용한 것뿐입니다.  

해명 결론

1. 설교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일부 표현상 공연히 오해할 여지도 있을 수 있다고 사료되지만, 2014년 고난주간 새벽 예배에서 행한 본인의 설교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2. 본인이 간혹 아시아 제종교의 다양한 종교 현상들이나 체험들 그리고 개념들을 사용하여 성경을 풀이하는 데 이용하고 강의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아시아의 다원 종교적 상황, 특히 전통 종교가 새로이 부흥하는 시점에 복음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아시아 복음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선교적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지독하게 전통적인 종교적 감성이 살아 있고 전통 종교의 다양한 종교 현상, 체험 및 기적적 이야기들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가 초대 기독교와 같이 말씀과 은사 능력의 통전을 이루어야 아시아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아시아 복음화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러한 도전을 던지는 과정에서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를 좀 더 실감나고 현장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이 이미 익숙한 전통적인 개념들과 종교적 현상들을 예화로 사용하여 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3. <연구 보고서>는 고소인들이 제출한 한정된 자료를 근거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는 바, 본인의 설교나 강의 혹은 저술 등 좀 더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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