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눈매에 반듯한 앉음새. 누구를 속이거나 비겁해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짧은 머리가 어울리는 자그마한 체구에서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광화문 농성장에서 처음 만난 한국염 목사(65)에 대한 인상은 그랬다. 남편 최정의팔 목사(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와 함께 날을 정하지 않고 들르곤 하다가, 김홍술·방인성 목사가 장기 단식을 시작해서는 매 주일 이곳을 교회 삼아 나왔다. 한국염 목사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이여인터) 대표이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공동대표다.

▲ 광화문 농성장에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한국염 목사를 처음 만났다. 남편 최정의팔 목사와 함께 주일마다 이곳을 교회 삼아 찾았다. 농성장 근처 카페에서 한국염 목사가 민중, 그리고 이주 여성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한 목사를 광화문으로 끌어 낸 질문이 있다. '오늘날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냐'이다. 사실 그는 이 질문에 답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90년대 말에도 그랬다. 남편 최정의팔 목사와 한 목사는 지금 가장 고통받는 이웃이 누구인가 물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외국인 노동자 인권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염 목사는 그중에서도 이주 여성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여성 목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신학교에 입학했던 한 목사에게 '여성'은 각별한 삶의 주제였다. 2011년 받은 유관순상이 그의 활동을 단순하게 설명한다. 이주 여성 인권 향상과 위안부 문제 해결, 교회 내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써 온 공로를 인정한다는 것이 시상 이유다. 유관순상은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여성이나 단체에게 주는 것으로, 충청남도와 <동아일보>, 이화여고가 2001년 공동 제정한 여성상이다.

누군가 정체성을 묻는다면, 종교 여성 운동가라고 답하겠다는 한국염 목사를 만났다. 남편 최정의팔 목사와 유학길에 올랐다가 박사 학위를 물리치고 돌아와 민중 교회를 하게 된 이야기부터 이주 여성을 비롯한 여성 인권 운동에 천착하게 된 과정까지, 그동안 많이 소개된 활동 내용보다 좀 더 한국염 목사, 한 사람에게 집중해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나는 박사 과정 포기한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1988년, 한신대학원에서 공부하던 한국염 목사는 독일 교회의 장학금을 받아 남편 최정의팔 목사와 함께 유학을 떠났다. 독일 유학 중 남편에게 당시 청암교회 전도사였던 정지성 목사에게 편지가 왔다. 목회가 너무 힘들어 못 하겠으니, 돌아와 교회를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노동자들이 많아, 월세도 못 내는 등 교회 상황이 열악했다.

3년 장학금을 약속받고 떠난 유학길이라 돌아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염 목사에게는 한 가지 부담이 있었다. 한신대 이우정 교수의 뒤를 잇는 여성 신학자에 대한 기대가 한 목사에게 있었다. 박사 학위 논문 주제도 지도 교수에게 낙점을 받아 2년만 더 공부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한 목사가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건, 평소 생각해 온 '민중 신학자'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그동안 민중 신학자들의 삶을 보면서 나름대로 회의를 많이 했어요. 주변에 교수님들이 다 민중 신학을 했는데 일반 대학의 교수처럼 호화롭지는 않아도, 제가 보기에는 이분들의 삶이 민중적이진 않았어요. 다 존경하는 교수님들이지만, 어쨌든 교수이고 박사라는 한계 때문에, 자기 삶의 자리 때문에 민중의 삶의 자리까지는 못 오더라구요. 그 부분을 스스로 비판하고 있었거든요.

한국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저도 박사 학위를 받으면 그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 교수가 되길 바라는 선후배들의 기대를 저버렸지만 저는 지금도 박사 학위를 포기한 건 잘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민중 목회는 민중을 '위한' 게 아니라 '함께하는' 것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 최정의팔 목사는 1992년, 청암교회 목회를 시작했다. 교회는 창신동 빈민촌에 공장 터를 빌려 있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로, 유사 민주주의가 실행되면서 검열을 피해 교회 안으로 그나마 오고 가던 노동 운동하던 소위 인텔리 계층은 모두 떠나가고, 가난한 무학 출신 교인들만 교회에 남았다. 한 목사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 연구원(현 기독교여성살림문화원)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엄마들을 만나 상담했다. 처음부터 엄마들이 한국염 목사에게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다. 한 목사는 이 사건을 통해 큰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퇴근하고 엄마들을 만나 뭘 하려고 해도 마음을 안 여는 거예요. 왜 그런지 생각하다가, 우리 삶이 떨어져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공장 터에 있는 교회 안으로 집을 옮겨 왔어요. 방 하나에 장롱으로 벽을 삼아, 두 칸에 네 식구가 살았어요. 그리고 3개월, 우리 삶의 여건이 지역 주민들과 같아지는 걸 보고 마음을 열더라고요. 민중 목회라는 건,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하는 거란 걸 그때 배웠어요. 저한테는 큰 경험이었어요."

양말 공장에서 도망친 이주민 8명을 만나다

한 목사 부부가 민중 교회 목회에서 이주민 인권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남편 최정의팔 목사는 당시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 회장이었는데, 거기서 김해성 목사를 만났다. 성남주민교회에서 성남외국인센터를 운영하던 김 목사와의 인연으로 이주민들을 만나게 됐다. 양말 공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고 도망쳐 나온 8명의 한족 출신 사람들이었다. 그중 7명이 여성이었다.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상습적인 성추행을 당한 상황이었다. 갈 곳 없는 이들에게 교회를 내주고, 한 목사 부부는 생각했다.

"그때 남편하고 저하고 질문하던 것이 있었는데, 뭐냐면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냐'하는 것이었어요. 도망쳐 나온 외국인 노동자를 보면서 그 질문을 다시 하게 됐어요. 지금 가장 고통받는 이웃은 외국인 노동자라는 대답이 들렸고,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외국인 노동자 센터를 만들게 됐어요. 그게 1997년이죠."

외국인 노동자 센터에서 한 목사는 이주 여성이 보호받을 수 있는 쉼터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목사는, 노동자 문제도 크지만 이주 여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정 폭력을 당하면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엔터테인먼트 비자를 받고 들어와 성매매 시장으로 팔리는 여성들이 많았다. 한 목사는 이주 여성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2001년 노동자 센터에서 독립해 나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설립했다. 이제는 이주 여성 인권 운동에 관한 한 가장 대표적인 단체다. (관련 기사 : 옆집 사는 베트남 여성의 인권은 누가 지킬까)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이주 여성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운동을 펼치는 가장 대표적인 단체다. 실제에 맞게 법을 바꾸고, 이주 여성 개인을 지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사진은 이주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고 인종 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국제 결혼 광고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을 때 모습이다. (사진 제공 이여인터)

하나님은 어머니와 같은 분여성 운동에 천착하다 

한 목사가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던' 그의 과거가 있다. 한국전쟁 때, 이남하던 한국염 목사의 아버지는 어린 한 목사를 데리고 강을 건널 수 없다며 버리고 가자고 했다. 그 기억 때문에 한 목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무런 은혜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예수의 제자가 모두 남성이어서, 하나님은 아버지고 남자니까, 바울이 여자는 잠잠하라고 했으니까 하는 등의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이유도 하나님에게 경외감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목사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반전된 사건이 있었다.

"한신대에 입학하고 1학년 2학기 때인가, 한 수업에서 감명 깊게 읽은 성경 구절에 2절씩 밑줄을 쳐서 내는 과제를 내 줬어요. 과제를 하다 이사야서 46장을 보게 됐어요.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이 장을 읽는 순간, 임진강 찬물에 나를 업고 건너던 어머니의 모습이 딱 떠올랐어요. 엄마 모습하고 하나님의 모습이 겹쳤어요. 아, 하나님은 남자만이 아니라, 엄마 같은 분이라는 각인이 됐어요. 그러면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죽 찾게 됐고, 하나님과 화해를 했어요. 새롭게 성경이 해석되면서 소위 여성 해방, 여성 운동에 뛰어들게 된 거죠. 여성 문제에 사명감을 느끼고 일하기 시작했어요"

차별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분노의 힘…"나는 십자가 억지로 진 구레네 시몬"

한국염 목사는 억압에 대한 분노, 불의에 대한 분노가 변화를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 성차별 설교를 하는 교회는 가지 말라고 말하고, 그런 종교는 지탱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한다. 자타가 공인하듯 그는 반골 기질이 틀림없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억압과 불의에 대한 분노는 청춘 같았다. 한 목사의 삶을 이끄는 동력이 무엇이냐 물으니, "하나님이 약자의 편에 계시다는 믿음"이라고 답하면서, 쉽게 단정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이주 여성 문제를 돕는 일도 예수가 약자 편에 서 계시다는 믿음으로 한 거죠. 그런데 끝에는 딜레마가 있어요. 당위적으로는 약한 자의 편에 서는 게 맞다고 배웠지만 제가 정말 힘없는 사람과 함께하는 걸 좋아하느냐, 그건요. 저를 엄밀하게 돌아보니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아요. 제 딜레마에요. 때때로 내가 위선자는 아닐까 질문해요.

▲ 한국염 목사는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을 해 온 자신의 삶에 대해 진솔하게 얘기했다. 예수와 같은 사랑으로 했느냐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이야기였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싸움박질은 잘하는데. (웃음) 사람과의 관계는 따듯하게 잘 못해요. 제가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나, 위해서는 하는데 정말 사람들과 함께하나,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질문을 더 많이 하게 돼요. 성경은 예수의 연민을 자궁이 떨릴 정도였다고 설명하는데, 이주 여성들을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냐 저에게 묻는다면 자신 있게 '예스'라는 대답을 못 하겠어요.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구레네 시몬인가 보다, 시몬이 예수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진 게 아니잖아요. 억지로 진 거죠. 제가 이제까지 한 이주 여성 운동은, 그 사람이 저에게 와서 한 거죠. 그러니까 신앙적인 용어를 빌리면 하나님이 저에게 보낸 거죠. 제가 그 사람들을 찾아간 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을 보냈을 때 응답을 한다고는 했죠. 하지만 응답할 때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한 걸까, 기독교인으로 목회자로서 의무감으로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가끔 해요. 제가 결코 따듯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말을 맺는 한국염 목사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런 고민을 할 정도로 누군가를 위해 살아 본 적 없는 기자가 그렇게 본 걸지도 모른다.

"내가 시작했다고 끝까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여인터에서 쓰는 독특한 표현이 있다. '선주민'이다. 이주민의 상대 개념으로, 여기서는 '한국 사람'을 가리킨다. 이 땅에 먼저 터를 잡고 살았을 뿐, 이주민에 대한 어떤 차별도 정당할 수 없다는 뜻이 읽힌다. 한국염 목사가 바라보는 이여인터의 지향점이 그렇다. 현재는 자신이 맡고 있지만, 마침내는 이주 여성이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저는 주춧돌을 놓는다는 마음에서 일을 해 왔어요. 그 다음에는 후배들한테 넘겨주면서 지원하는 세력이 되는 거죠. 더 바라는 건, 지원하는 세력에서도 떠나는 겁니다. 자체적으로 안에서 해결하도록. 저는 이런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한 목사는 새로운 후임만 찾아지면 언제라도 훌훌 자리를 내어 놓을 것 같았다. 3년 임기제의 이여인터 대표 자리는 2년이 더 남았다. 한 목사는 후임에게 빚만 남기지 않길 바랐다.

다른 것보다도 재정 부분에서 한국염 목사가 느끼는 부담이 크다. 이여인터는 비영리 민간단체로 재정 자립도가 41%에 지나지 않는다. 후원자 130여 명의 손에 운영 전반의 비용이 달렸다. 이여인터 재정 담당자는 센터 통장 잔고가 자기 통장 잔고보다 적다며 기자에게 웃어 보였다. 한 목사가 유관순상으로 받은 상금 2000만 원과, 그때그때 강의 등 외부 활동을 통해 받은 돈을 고스란히 내놔도 여의찮은 형편이다.

어느 날엔가 센터의 대표가 될 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하고, 활동가·인권 교육 등의 과정을 진행해 가고 있지만, 돈 없이 뜻만 가지고는 버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10월 16일 후원 행사를 한다. 이화여대 ECC B4 이상봉홀에서 저녁 6~8시다.

한 목사는 "매달 활동가들 월급 주기에 절절매고 있다"면서도 자신의 앞날은 걱정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다. 있다면 그동안의 삶에서 일정한 수입이 없어도 굶게 내버려 두지 않았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뿐이다.

"일정한 수입이 없었지만 굶지 않고 살았어요. 하나님의 일이라면 길을 열어 주시는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요. 하지만 후배들에게까지 그런 걸 요구할 순 없어요. 기반은 마련해 주고 떠나고 싶어요. 은퇴하면 시대가 나를 부르는 자리, 맨 앞에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런 일 할 것 같아요. 인생 많이 살았는데, 젊은 사람들 방패막이 하는 것도 의미가 있잖아요.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자리에 나서서 맨 앞에 앉아 있는 게 나이 먹은 사람들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 광화문 농성장 한편, 흰 셔츠를 입은 이가 한국염 목사의 남편 최정의팔 목사다. 한국염 목사는 그 곁에 앉았다. 부부는, 이 시대에 가장 고통받는 약자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사진은 9월 28일 찍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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