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이 개봉 12일 만에 천만 관객 돌파를 이뤄 냈다. 영화로서의 구조적 짜임새나 해상 전투 장면의 고증적 완성도에 있어선 전문 평론가나 일반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상황이지만, 대중의 보편적 공감대를 자극했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감하는 분위기이다. 영화 '변호인'이 개봉 32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을 때도 관객 몰이의 동력을 영화적 구성미나 스토리의 깊이에서 찾지 않았다. 그보다는 영화 자체가 선사하는 정서적 건드림이 대중을 움직였다는 평이 주류였다.

'명량'과 '변호인'의 무엇이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걸까. 대중 정서의 어떤 측면을 건드렸기에, 천만 영화 성립에 있어 필수 조건이라 일컬어지는 50~60대의 관람과, 이미 관람을 마친 이들이 재차 삼차 관람한다는 재관람의 성과를 이끌어 냈을까. '명량'의 이순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 낸 '충(忠)'이 조정이나 임금을 향한 것이 아니라 무지렁이 민초, 백성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 오백 년을 흘러 조선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렇게도 가슴 저미는 감동을 주는 것인가. '변호인'의 노무현이 "국가가 곧 국민이다"라고 포효할 때 눈물 그렁그렁한 그 동공에 묻어나던 진심이 어느 정도 진일보했다는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리도 특별한 울림이 되는가. 이만하면 그래도 살 만하다고 자위할 수도 있는 때에, 우리는 우리도 깨닫지 못한 그 어떤 결핍에 가슴 두드리고 한숨 쉬며 살고 있었나 보다.

▲ 영화 '명량'과 '변호인'의 무엇이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걸까. 대중 정서의 어떤 측면을 건드렸기에 대중은 열광하는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어떤 '결핍'을 죽은 이순신과 노무현을 소환하여 채우려 하는 것은 아니었나. 이제는 살아 있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만족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사진 출처 Daum 영화)

대중이 갖고 있는 어떤 결핍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목전에 도래했다. 많은 이들의 기대와 많은 이들의 우려가 공존하는 가운데 그의 방한은 심상치 않은 논란들 또한 양산해 내고 있다. 그 논란들의 주요 생산 지점은 한국 개신교다. 교황의 방한에 대한 한국 개신교 측의 초기 입장은 전 세계적으로 높아만 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명망에 상대적으로 위축될지도 모를 개신교 교세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개신교의 분위기는 단순히 교세 위축에 대한 염려를 넘어 반가톨릭 정서를 기반으로 한 가톨릭 저항 운동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가톨릭 이단 논리 확산에 힘입어 세대주의 신학적 종말론에서 비롯된 교황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연관설, 교황 적그리스도설, 가톨릭 세계 정부 수립 등 우스꽝스러운 음모론들마저 활성화되어 가고 있다.

로마교황방한저지행동연대는 8월 5일부터 시복식이 열리는 광화문에서 진리 수호 구국 기도회를 열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황정체알리기운동연대는 8월 12일 '한국교회를 지키자'는 주제 아래 일산 킨텍스에서 대형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가톨릭과 교황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비밀스런 실체가 있다며, 가톨릭과 화합하고자 하고 교황을 환대하는 일부 개신교 연합체의 시도에 적그리스도와 일치를 꾀한다는 배교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둔 시점에서 교회 수호의 기치 아래 중세 이래 현재까지 개신교 존립 위기의 원인 제공자로 교황을 지목해 정죄의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잠깐 논외로 이 시점에서 가톨릭과 교황을 향해 전의를 불태우는 분들에게 제안 하나 드리자면 이런 거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비하되고 이 나라의 대표 목회자들이 추잡스런 성 추문과 웬만한 경제사범 뺨칠 부도덕한 비리들로 각종 신문, 방송, 포털에 오르내리고, 한국 개신교 종교 신뢰도는 급락하며,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의 개종 비율이 상승하는 등등의 현상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적그리스도적 실체를 숨기고 한국교회에 악의적으로 접근함으로 나타나는 암운의 전조 증상이라는 코믹 종교 스릴러류의 음모론 생산. 어떤가. 효과 좀 있지 않겠나. 이를 통해 성장과 확장에 고취되어 복음의 가치를 망각한 채 일그러져 가는 한국 개신교 추락에 대한 부끄러운 피의(被疑) 사실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살포시 떠넘길 수도 있을 텐데…. 솔깃하면 한번 시도들 해 보시든가.

교황을 적대시하는 이들에게 민심이란 우매함을 뜻하는 듯하다. 자신들만이 알고 있던 깊이 감춰진 진실이라는 것을 야심차게 내놓으며 무지몽매한 민의를 교도(敎導)할 때 대다수 백성들이 고개 끄떡이며 열렬한 환호로 단숨에 동조할 줄 알았나 보다. 온 백성이 알지 못했던 사실에 공감 공분하며 거국적으로 교황 방한 반대 법안 발의 촉구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그것은 오며 가며 뒤적이던 '알베르토 리베라'의 가톨릭에 대한 무시무시한(?) 폭로를 엮은 만화책에 현혹되거나, 근본주의적 세대주의 종말론에 물들어 혼자만의 은밀한 지식 습득에 자부심을 키워 가던 일부 경망스러운 선동자들이 퍼다 나르는 급조된 논리의 지라시급 적대적 가톨릭 유인물들에 세뇌된 순진무구한 한 뭉텅이의 개신교 성도들에게 국한된 얘기일 뿐이다.

어떤 결핍이라도 채울 것 같은 '프란치스코 효과'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평범한 사제로 있을 때 이름이다. 그는 베르고글리오 신부로 살면서 전철로 이동해 가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겨했고 비좁은 원룸에서 직접 숙식을 해결하며 살았다. 1976년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해지고 수만 명의 시민이 실종되거나 국가보안군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됐던 소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리던 비델라 군사정권 시절 베르고글리오 신부는 군부에 쫓기다 목숨을 잃을 뻔한 많은 사람들을 숨겨 주고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운동에 도취된 들끓는 투쟁심이 아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목숨들에 대한 애정으로 그들과 함께한 것이다.

사제 베르고글리오는 콘클라베를 거쳐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즉위명은 "허물어지는 교회를 지켜라"는 음성에 교회 혁신의 초석을 마련했던 성인 프란치스코의 삶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취임 이후의 감동적인 행보에 대해선 이미 많은 언론의 취재와 출간된 수십 권의 서적을 통해 귀에 진물이 나도록 보고 들었다. 한마디로 그의 말과 행동이 지향하는 바는 '벽이 없는 소통'과 '낮은 곳을 향하는 행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길이 닿는 곳에선 어김없이 그의 언행으로 감동에 젖어 든 크고 작은 증언들이 속출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 발휘되는 '프란치스코 효과'에 미리부터 감화 감복되어 버린 이 땅의 대중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결핍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한 줌 흙이 되어 버리고 없어 그저 영화의 한 장면으로나 추억해야 하는 '이순신'과 '노무현'에게 체념적 감정이입을 하며 위로받다 마주하게 되는 결핍과 동일한 것인가. 최고 권력자에게 열과 성을 다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충(忠)'을 바치며 '국가는 각하다'라고 신념에 찬 독백을 읊어 대면서도, 백성을 발가락에 꼬여 든 무좀균처럼 여기는 이 나라의 국가 위정자들. 이들을 겪어 내느라 지치고 상해 버린 민심이 마음 둘 곳 없어 헤매다가 죽은 '이순신'과 '노무현'에게, 살아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피곤한 어깨를 기대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 백성들 내면의 공허한 결핍의 실루엣을 들춰내 주고 있다.

가톨릭, 개신교를 초월해 다수의 대중이 '프란치스코 효과'의 발현을 기대하고 있다. 말로도 글로도 통하지 않으니 산 몸뚱이에 불을 붙인다. 살아야 할 몸뚱이에 곡기를 끊는다. 일인 시위로도, 대규모 투쟁으로도, 목숨을 건 단식으로도 절박한 민의가 전달되지 않는 이 불통의 땅에서 어느 누구로 인해서든 통하여 전달되고 받아들여져서 변화를 일으키는 소통의 희열을 소망하고 있다.

▲ '프란치스코 효과'가 애써 닮은 필사본이라면 원본은 '예수그리스도 효과'다. 지금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실상의 조각이라도 드러낼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쫓으려는 최소한의 진심 어린 노력이라도 보인다면 시대의 결핍에 주저앉은 기진한 백성이 흘릴 눈물 한두 방울 정도는 닦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교종 프란치스코. (사진 제공 위키미디어 공용)

'프란치스코 효과'라면 어떤 실마리라도 풀어낼 것 같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서기만 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도, 남북의 대립 문제도 해결의 물꼬를 틀 것만 같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관해 좁혀지지 않는 의견들도 모두 해결되고 원만해질 것 같다. 시간만 되면 제주도 강정마을도 갔으면 좋겠고, 밀양 송전탑의 할머니들 손이라도 좀 잡아 주고 왔으면 좋겠다. 이것이 지금 이 나라의 백성이 품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한, 어찌 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기대와 신뢰의 단면이며, 이것이 백성으로 답답함에 눈물짓게 하는 결핍의 실체이다.

제국 로마의 억압적 착취와 경직된 율법주의에 결박된 바리새인들의 도덕적 완고함에 시달리느라 상대적으로 많이 위축돼 있었던 유대 백성이 만난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술로 배를 채우며 구별되어 지켜야 할 안식일에 곡식을 훑어 따먹고 창기와 세리와 어울리면서도 여차하면 고결한 율법 준수로 곱게 치장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라고 사자후를 토하는 골 때리는 분이었다. 그러한 예수님을 뵈었을 때 유대 백성이 경험했을 전승을 통해 정립된 그리스도의 전형이 파괴되는 지점의 격렬한 감정적 정화는, 실존적 그리스도와의 벅찬 조우를 통해 맛본 참된 성결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효과'는 이천 년 전 유대 백성이 경험했던, 그리고 이 시대의 백성이 경험하고픈 예수 그리스도의 투영을 통해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가톨릭이 이단이니 아니니, 구원이 있니 없니 설왕설래해도, 역대 어느 교황보다도 낮은 자세와 겸허한 태도로, 인자한 말과 소박한 행동으로, 때로 과감하고 단호한 변혁의 몸짓으로 그만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에서 대중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도 목격하길 소원한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 낮은 이들과 함께하시며 때로 높으신 이들을 단호함으로 훈계하시고 하늘과 땅 사이에, 땅과 땅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무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파편적 형상이라도 훔쳐보길 열망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효과'가 필사본이라면 원본은 '예수그리스도 효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이 땅의 교회에 기대하던 것들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던 것들이다. '프란치스코 효과'가 애써 닮은 필사본이라면 원본은 '예수그리스도 효과'다. 지금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실상의 조각이라도 드러낼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쫓으려는 최소한의 진심 어린 노력이라도 보인다면 시대의 결핍에 주저앉은 기진한 백성이 흘릴 눈물 한두 방울 정도는 닦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했나?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했나? 진짜 이단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가치를 자신의 삐뚤어진 완고한 신념과 동일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자취를 흐리는 이들이다. 진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로서의 실존성과 생명의 영향력을 부인하게 만드는 이들이다. 이단을 향해, 적그리스도를 향해 팽팽히 공격의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있나? 과녁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적절할 수도 있을 고집스런 자기 의로 그득한 당신의 심장에 걸어 두길 바란다.

누군가가 열렬히 흔들어 대는 현수막에 휘갈겨 쓰인 대로 프란시스코 교황이 위선적 예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해도 좋다. 현생에서 걸리지만 마라. 천국 가면 다 뽀록난다. 구원이 어디 있는지 함부로 단언하지 말자. 아무리 신구약 성경 66권을 줄줄 외우고 그 의미와 가치를 깊이 풀어낼 수 있다 해도, 아니 아예 하늘에 가서 예수님 머리털을 붙들고 있다가 돌아왔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누구에게 향하실는지 솔직히 우린 잘 모르지 않나. 우리의 주제를 넘어선 다른 이의 구원에 관한 왈가왈부(曰可曰否)를 고이 접어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게 미쳐 구원이 내 삶에 해당되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자. 그것만으로도 잘살고 있는 남의 엉덩이를 향한 미련한 헛발질만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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