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흑인이었다. 게다가 예수님은 걸쭉한 욕지거리의 대가였으며 지독한 두주불사(斗酒不辭) 술태배기였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무위도식하는 길거리 부랑자, 루저들을 끌어모아 열두 명의 사도로 삼았다. 누군가가 이리 주장한다면 아마도 대한민국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긴 매우 어려울 것이라 여겨진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이러한 주장이 제기된다면 어떨까?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그래도 좀 보장된 나라 미국이라고 해도 그리 환영받을 내용은 아닌 것 같다.

▲8월 7일 방영을 앞두고 있는 미국 드라마 '흑인 예수(Black Jesus).' 주인공 예수는 욕도 하고, 술도 마신다. 무위도식하는 이들을 사도로 삼고, 아무 데서나 잠을 잔다. 미국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짓"이라며 방영을 반대했다. (흑인 예수 예고 동영상 갈무리)

터너방송(Turner broadcasting system)의 계열사인 어덜트 스윔(adult swim)에서 내놓은 회심의 문제작 '흑인 예수(Black Jesus)' 때문이다. 흑인 양아치가 예수님으로 설정된 코믹 드라마인데 8월 7일에 첫 방영을 앞두고 미국 사회에 한차례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드라마 속 흑인 예수님은 흑인 빈민가를 건들건들 돌아다니며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인생을 포기한 노숙자들과 거리낌 없이 술과 대마초를 나눈단다.

빈민들 틈에서 사랑을 전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다운(?) 행동도 한다지만 갱단의 총알에 줄행랑을 치고 동네 아줌마의 폭력에 실신하는 등 기존의 예수님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난 설정에 미국 보수 기독교 단체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예수를 동네 건달로 묘사하는 것도 모자라 주의 입술로 욕을 하는 것은 역겨운 짓"이라며 크게 분노하고 있다 한다.

어덜트 스윔이 심야 성인 채널임을 감안할 때 예수님을 다른 각도의 설정으로 새롭게 조명해보자는 기특한 의도라 하기보다는 논란을 통해 시청률을 담보하고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기획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방영을 시작해서 종영까지 단순히 자극적이고 희화적인 예수 비틀기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혹시라도 2000년 전 예수님의 본질이 21세기 미국의 흑인 빈민가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재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기대를 놓지 않아 본다.

미국 보수 기독교 단체에서 이리 분노 대폭발이니 한국 땅에서야 말할 것도 없이 끔찍스런 난리가 날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무조건 그렇게 열부터 받고 볼 일이 아니다 과연 '흑인 예수'의 드라마상 설정이 단순이 신빙성 제로의 황당무계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먼저 예수님이 흑인이라는 설정을 짚어 보자. 예수님이 흑인이라 가정할 때 평범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의 느낄 낯섬 또는 부정적 반감은 극히 자연스러운 정서이겠지만 예수님이 백인이라는 설정 또한 그리 당연시할 만큼 고증적으로 정확한 설정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봐 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온, 예를 들어 빌 게이츠, 찰리 채플린 ,스티븐 스필버그,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인슈타인, 마크 주커버그, 세르게이 브린, 토마스 에디슨, 존 뉴튼, 칼 마르크스, 록펠러 등등 백인에 가까운 유대인들의 모습이 사실은 정통 유대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8세기 무렵 유럽과 이슬람 지역의 중간쯤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로 복잡한 크림반도 오른쪽인 흑해와 카스피해의 가운데 지점에 카자르란 왕국이 있었다. 이들은 터키계로 7세기에 돌궐족(突厥族)이란 이름으로 한국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카자르 왕국은 왼쪽의 기독교 세력과 오른쪽의 이슬람 세력의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대적인 국가 개종을 단행하는데 이를 통해 카자르 왕국이 유대교 국가임을 선포한다.

세월이 흘러 몽고의 서진으로 인해 서서히 유럽으로 몰리고 몰려 독일과 폴란드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2차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의 주인공으로 전 세계 유대인의 80%를 차지하며 세계 경제와 금융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이끌고 이스라엘 내 20~30%의 인구로 지배층을 형성하고 지금의 팔레스타인 분쟁의 주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아쉬케나짐(Ashkenazim) 유대인이다.

아쉬케나짐 유대인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닌 종교적 유대인으로서 셈족이 아닌 터키 백인계 혈통을 이어받아 백인과 구분 짓기 어려운 외양을 갖추고 있다. 지금껏 우리가 성화나 영화에서 보았던 백인 신화를 덧입은 예수님의 이미지는 이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 등의 혈통적 유대인은 스파라딤(Sepharadim) 유대인이라 불리는데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나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이베리아 반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말한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대학살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들의 외양은 전통적 셈족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피부색이나 이목구비가 백인보단 오히려 중동계나 흑인에 가깝다. 사실이 이러하니 예수님의 피부색이 적어도 흰색은 아니란 말이 된다. 거무스름하든지 아니면 조금 더 어둡든지 하지 않겠는가. 흑인 예수? 그리 비현실적 설정만은 아닌 것 같다.

다음으로 욕쟁이 예수님에 대해 한번 헤집어 볼까. 백성들을 향해 찰지게 욕지거리를 해대는 예수님이라. 나는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예수님께서 욕쟁이였을 것이라며 침을 튀겨 가며 주위 사람들을 세뇌시켜 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장 배경과 직업적 환경을 고려해서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다(마 13:55). 예수님도 자연스럽게 가업을 이어 목수로서 사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고 기억했다(막 6:3). 그러나 당시 목수 일을 가업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 목수의 헬라어 단어인 'tekton'의 뜻이 나무를 깎고 다듬어 끼워 맞추는 일을 넘어 보다 광범위한 의미의 건설 노무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생 시절 소위 노가다 판이라 하는 곳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었다. 그곳에는 목수도 있고 미쟁이도 있고, 각종 중장비 기사, 공구리공, 철근쟁이, 벽돌공, 그냥 잡부 등등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일상의 고됨을 욕으로 푼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 건너 각종 휘황찬란한 욕지거리들이 삽질과 공이질을 비트 삼아 랩처럼 흘러나왔다. 이들의 소통 속에 필수불가결하게 들러붙는 욕을 단순히 적대적이고 격한 감정의 천박한 표출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욕지거리는 피곤한 몸뚱이로 인해 목젖까지 차오른 신음이 해학적으로 정화되는 배설 장치였으며 함께 고생하고 위험을 분담하는 동료들과 나누는 끈적한 친밀함의 교감이었다.

거주 인구 400명에서 1000명 남짓했을 작은 시골 마을 나사렛의 건설 노무자의 삶은 2000년 전이나 21세기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고되고 고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장남으로, 줄줄이 들어선 동생들의 맏형으로, 고향 나사렛의 평범한 청년으로, 하루를 살기 위해 하루 종일을 빡세게 몸뚱이를 굴려야 하는 노동자로, 로마 압제하의 이스라엘에서도 하층의 억압받던 힘없는 서민으로 그렇게 예수님은 공생애 전 30년을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순응하며 사셨다. 예수님의 행색, 행동, 말투는 하위 계급의 거친 노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예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하실 때 보이셨던 서민들의 정서를 꿰뚫으며 그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시던 소통 방식의 탁월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탁월한 소통에 있어 욕쟁이 예수로서의 정체성이 한 몫을 단단히 한 것은 아닐까. 성경 기록상으로야 생략됐지만 예수님의 친근한 수다와 욕지거리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해야 할 바를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며 소통하실 때 복음을 향한 백성들의 접근성을 효과적으로 높여 줄 해학적 전달의 순기능적 요소로써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 본다.

고로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감히 욕쟁이 예수라 칭한다 해서 이를 신성모독적 발언이라 흥분한다면 이는 오히려 30년 하층민 노동자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 내신 예수님의 인간다운, 인간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술꾼이신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한국교회에서 술과 담배 문제는 거의 교리적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는 실정인데 이는 초기 한국교회를 세웠던 서구 선교사들의 판단과 결정이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말 벽안의 선교사들이 보기에 조선인들은 술로 인해 망해 가고 있었다. 술로 인한 조선인들의 삶의 폐해가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술, 담배 문제를 교리적 차원으로 거론하며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술 취함에 대한 경계는 있지만 명백히 따져 볼 때 술 마심이 죄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성경은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성도의 음주 여부의 가불가(可不可)에 관함이 이웃의 마음을 돌보고 이웃에게 애꿎은 판단을 받지 않고 덕을 세우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음주에 관한 문제가 교회 문화적 차원에서 자제되어야 할 일이지 교리적 차원에서 정죄될 문제는 결코 아니란 것이다.

한국교회의 정서상 술에 관한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술꾼 예수는 욕쟁이 예수보다 더 용납할 수 없는 설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학교를 조금이라도 제정신으로 다니신 분들은 당연히 아실 것인데 성경에서 예수님은 비록 예수님을 적대시한 바리새인들의 발언으로 기술되긴 하지만 노골적으로 술꾼과 먹보로 표현되고 있다(눅 7:34).

한글 성경인 표준새번역 개정판과 새번역에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로 순화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이나 NIV, KJV에선 아예 대놓고 '식충이' '대식가' '술고래' '대주가' 등의 가감 없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다.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세례요한의 한계점을 오가는 금욕 생활에 기가 질려 귀신 들렸다고 뒤집어씌우던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꽤 많이도 잡수시고 많이도 들이키셨던 것 같다. 술냄새 풀풀 풍기며 생명에 대해 선한 삶에 대해 강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신앙적 정서에 익숙한 우리에겐 참으로 시험들만 한 사안이긴 하지만 '우리 예수님이 그럴리가 없어' 라고 무작정 고개 젖기엔 예수님의 음주 습관이 기록상으로 너무 명백한 것 같다.

신앙생활의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불분명했던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인식이 실체의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선명해지고 보다 더 확고하게 구축된다. 그러나 만약 내가 몰랐던 예수님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고 경험한다는 열린 의미의 구축이 아닌 내가 가진 인식의 한계선 안에서 예수님의 상(像)을 규정짓고 가둬 버리는 식의 폐쇄적 구축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오해 또한 더불어 깊어질 여지가 커진다. 한정된 인식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자칫 생명 없는 화석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만을 간직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정 나와 실제적으로 소통하며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실존적 존재라면 그분에 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조명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겸손히 받아들일 때 적어도 예수님의 실체를 비껴 가 안일하게 고착될 수도 있을 완고한 오해들은 피해 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기술들은 무오(無誤)했다. 그러나 그 기술들을 읽고 해석한 바리새인들의 인식에 오류가 있었다.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했지만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인식선상에서 자의적으로 허락된 비뚤어진 그리스도 상(像)을 제멋대로 정립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낳았다. 그들의 어긋난 그리스도 상에 비추어 볼 때 마구간을 요람 삼아 태어난 나사렛의 촌뜨기 건설 노무자 예수는 그리스도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다. 우리는 무오한 성경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알아 가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분별하는 우리는 결코 무오하지 않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받아들일 수 없거나 용납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무수히 많은 인식의 오류에 힘입어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수님의 이미지로 바꾸어 덧대 붙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 가면서 어느 순간 저지를 수도 있는 분별의 오류를 간과해선 안 된다. 이 분별의 오류에서 야기되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로 인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된 예수님의 실체를 다시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는 바리새인들의 전철(前轍)을 따라 밟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도 흑인 예수, 욕쟁이 예수, 술고래 예수에 대한 거부감에 몸서리치며 고개를 휘젓고 있는가. 그저 이 모든 논리 전개가 글쓴이의 무지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개념 적용의 오류이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가. 나 또한 매순간 너무나도 잦은 빈도로 드러나는 내 인식의 오류에 매일같이 절망하지만 애써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예수님에 대한, 그분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미련한 오류를 인정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겸허히 나아갈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될 예수님의 진실 앞에서 바리새인적 현실 왜곡이나 부정이 아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예수님 대한 깊은 경외와 감사로 엎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히 3:1). 예수님에 관한 얕은 생각이 온갖 억측과 오해와 쓸데없이 혈압 올릴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어덜트 스윔에서 제작하는 '흑인 예수'에 대한 기대가 은근히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제발 제대로 좀 만들어 봐라. 욕쟁이 흑인 예수님한테 은혜 좀 받아 보자.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전형적 예수님의 이미지에서 매우 많이 삐딱하게 엇나가는 흑인 예수님이 정형성에 갇힌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옆구리를 쿡 찌르시면서 해맑은 미소로 알싸한 욕지거리를 섞어 이리 말씀하실 것 같다.

"이런 제기럴 나… 이런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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