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은 개신교 출판사상 가장 얄궂은 위치에 놓여 있는 작가다. 그는 가톨릭 사제다. 그것도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내세웠던 이냐시오 예수회 출신이다. 개신교 출판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지분이 크다는 건 무척이나 모순적 상황이다. 가톨릭이라면 이단 취급하며 체머리를 흔드는 사람들이 여전한 마당에 개신교 출판계의 그의 자리는 얄궂다.

▲ <데이크레이크로 가는 길> / 헨리 나우웬 지음 /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356면 / 1만 4000원

개신교 출판사들은 그의 책 중에서 개신교의 신앙 정서에 반하지 않는 것들만 골라 펴냈다. 나우웬은 전통적인 가톨릭 영성을 현대적인 문체로 풀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다. 가톨릭에서는 성사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인할 수 없이 유진 피터슨이나 리처드 포스터와 더불어 개신교 출판계는 물론 개신교계에 '영성'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작가가 나우웬이다. 엄밀하게 그의 영성은 '공교회적(Catholic)'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공통분모가 적지 않으나 개신교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우웬의 위치가 얄궂은 이유 중 하나다.

한편, 그는 개신교적 맥락에서 소비되었다. 항상 '내려놓음'에 더 주목하는 개신교 독자들에게 그는 매우 매력적인 저자임에 분명하다. 예일과 하버드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로 떠났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개신교인들이 손꼽는 '간증의 모양새'의 삶을 살았다.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그의 삶의 모양새가 압도했다.

주목해 볼 만한 사실 하나가 있다. 그는 예일대를 내려 놓고 남미로, 남미에서 하버드로, 하버드에서 종국에 라르쉬로 향했다. 항상 간과되는 사실은 라르쉬로 가기 전 그가 예일을 내려놓고 떠난 곳이 남미였다는 점이다. 그는 남미의 빈민들을 위해 떠났다. 그가 남미에서 만나 사목하고 했던 이들은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난의 핵심에는 남미의 정치사회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의 관심은 일반적인 의미의 빈민 돌봄과 구령에 있지 않고 해방신학적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로메오 주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 속의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예일과 하버드를 떠날 때, 그가 내린 결정은 다른 양상이었다. 개신교 출판계나 독자 모두 두 가지 중 정치적으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장애인 사역만을 은혜롭게 받아들였다. 반면 그가 해방신학적 열정을 지니고 남미에서 사역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점은 전혀 부각되지 않았다. 그의 책이 많은 부분 사목적 관점에서 개인의 영성 생활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평화 운동가이자 나우웬의 책을 편집한 존 디어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신구교 독자들을 막론하고 대부분이, 나우웬이 지닌 평화와 정의의 영성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다고 말이다-물론 개신교 출판계에서 가려 출판하는 이유도 크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얄궂은 이유는 그가 트렌디한 작가로 유행을 타 버렸다는 점이다. 90년대에서 2000년도 초반까지 그는 필립 얀시와 맥스 루케이도와 더불어 개신교 번역서 시장을 이끈 트로이카였다. 일단 출간하면 '중박'은 기대해 볼 만한 흥행 보증수표였다. 문자 그대로 쏟아지듯 책이 나왔다. 그의 인기는 수십 년간 써 온 책을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번역 출간하게 만들었다. 본의 아니게 그는 한물간 영성 작가로 포지셔닝되고 말았다. 앞서 소개한 얄궂은 이유들에 비추어 봤을 때, 표면적으로 문서 선교의 소명적 자세로 헨리 나우웬의 저서를 냈다고 하더라도, 출판사들의 상업적 동기가 내재하고 있었다는 혐의를 벗을 도리는 없어 보인다.

아주 오래간만에 나우웬의 책을 들고 읽었다.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포이에마)이란 제목의 책이다. 나우웬이 바로 그 유명한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의 캐나다 지부인 데이브레이크로 떠나기 직전 일 년 동안 쓴 일기를 엮은 책이다. 가톨릭 계열의 출판사에서 이미 출판된 적이 있는 책을 포이에마에서 – 아마도 정식 계약을 거쳐 좀 더 면밀한 번역으로 다시 내어 놓은 듯하다.

앞서 나우웬에 얽힌 맥락에 대해 장황설을 늘어놓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책 역시 그런 맥락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접하면 피상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어서다. 이 책이 가톨릭 출판사에서 먼저 출간되었다는 건 이 책의 어떤 부분이 개신교 정서와 맞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바로 그것이 감추인 맥락이다.

이 책에서 나우웬은 가톨릭 전통과 영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자신이 가톨릭 사제임을 숨기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 '이콘'에 대해 "단순히 예배당과 집을 장식하는 성화가 아니다. 거룩한 존재와 만나게 이끄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형상이며 초월적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말한다. 성상에 대해 우상숭배라는 거부감을 가진 개신교 신자라면 이런 그의 언급이 삼킬 수 없는 가시와 같을 것이다. 책에는 이런 부분들이 때때로 나타난다.

또한 나우웬이 느꼈을, 하버드를 '내려놓음' 하기 직전의 흥분과 기쁨, 기적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 등을 기대했다면 기대 자체를 내려놓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성자의 글을 기대했다면 책에 대해 실망감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첫 일기에서 "금년을 '분별의 해'로 삼을 작정이라면, 예전에도 그랬듯, 솔직한 일기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책은 정말이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다. '영적' 뉘앙스로 살짝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책을 지배하는 정서는 라르쉬 합류에 앞선 '두려움'이다. 하버드로 표상되는 안정과 명성, 사회적 성공과 야심 앞에서 그 역시 부자 청년이나 부평초 신세다.

라르쉬 문제뿐 아니라 드러나는 개인적인 면모에서도 그는 흔들린다. 단단하고 든든한,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일 것만 같은 그가 한낱 친구와의 우정에 목말라한다. "툭하면 거절당했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며 올라가는 고양된 영적 삶을 살 것만 같은 그도 관계와 일에 치이며 지독한 피로감을 느낀다. 그 역시 우리와 같이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이 책은 인간 나우웬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만델라가 말했던가, "성인이란 노력하는 죄인"이라고. 그런 의미에서만 그는 성인에 가까운 유형의 인물이다. 우리–많은 개신교 독자들이 기대하는 확신에 가득해서 소명을 밀어붙이는 '개신교 성인'의 유형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일기를 통해 그저 확신과 회의, 기도와 딴 생각, 드러남과 감추임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우웬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단언컨대, 이 책을 읽으면서 '그저' 은혜로웠다고 고백한다며 명백한 오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흔들리는 나우웬과 함께 공명하게 된다. 다름 아니라 바로 그 특유의 솔직함 덕분이다. 그가 일기에 자신의 신앙적이며 인간적 약함을 쏟아 내고 있을 때, 한편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심 어린 연민, 말씀에 대한 진솔한 성찰, 복음에 대한 진지한 따름이 있다. 약하고 여린 그를 이끌며 말씀 묵상이 살아 움직인다. 이른 봄 여린 순과 같은 나우웬의 심령을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진다. 이는 그가 자신의 약함을 고해성사하듯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에 보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더 이상 어둠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어둠이라고 불러야 비로소 그걸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하려는 유혹이 차츰 가라앉는다." 소위 '확신범'들이 가득한 개신교 출판계에서 오히려 그의 '찌질한' 구석이 반갑다. 역설적으로 그의 '찌질함'이 깊은 은혜가 된다.

일기 한편에서 소개되는 라르쉬의 장 바니에는 설교를 통해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을 따름입니다. 주님은 가난해지는 길로 부르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쪽보다 한결, 아니 훨씬 험한 길입니다"라고 말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가난해지는 걸 두 팔 벌려 반기는 이는 없을 것이다.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은 바로 '가난으로 가는 길'이다. 가난에 이르는 도상에서 두려움에 떠는 나우웬의 모습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길이란 어쩌면 '출발과 도착'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다. 길에 나섰다는 건 바로 아슬아슬한 긴장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버드와 데이브레이크, 부유함과 가난, 나우웬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지르는 긴장 사이, 은혜가 가로놓여 있다.

얼핏 드러나는 문명과 문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도 기존의 나우웬 독자들이라면 낯선 부분일 것이다. 동성애 커뮤니티에 대한 강한 연민도 그렇다. 아껴 두었던 마지막 얄궂음을 풀어 놓을 때가 되었다. 나우웬 사후, 지인들과 전기 작가들은 한결같이 그가 동성애 성향을 지녔다고 풀어 놓았다. 나우웬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그가 가난한 이웃으로서 동성애자들을 상정하고 온정적인 스탠스를 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실존적인 이유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목적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그가 동성애자들에게 보내는 애정과 연민을 살펴보자. 오히려 책의 내용을 더욱 진실하고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책 출간 이후 개신교 바탕의 매체들에서 이 책을 소개했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이 무척 흥미로웠다. 한 편의 제목에는 '하버드대 교수'라는 표현이, 다른 한 편에는 '위로, 힐링 전도사'라는 표현으로 그를 소개했다. 여전히 개신교에서는 헨리 나우웬을 이전 맥락에서 소화하고 있었다. 나우웬에 대한 맥락을 조금 알고 읽어 보자. 우리가 나우웬에 대해 품었던 어떤 인상이나 이미지를 부수는 우상 파괴적 책이 된다. 새로운 맥락을 통해 동시대에 나우웬을 제대로 소개하고, 제대로 소화하는 일, 그의 영성을 재평가하는 일은 개신교 출판계는 물론 개신교 현실에 대한 큰 도전일 수밖에 없다. 용감하게 나우웬의 감추인 맥락을 담은 책을 제대로 번역해 준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다시 나우웬을 읽는다는 건 신앙이란 가죽옷으로 자신을 가리지 말고 알몸을 내보이라는 요구다. 생각 이상으로 에큐메니컬한 요구다. 또한 정의와 평화 도상에 오르고 참여하라는 요구다. 동성애에 대해 전향적이 되라는 요구다. 모두 개신교 상황에서 첨예하고 만만치 않은 요구들이다. 나우웬이 걸어 간 '데이브레이브로 가는 길' 자체도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요구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낭만적 섬김이 아니라, 비할 바 없는 '하나님의 가난'에 이르라는 '한결 험한' 실존적인 요구이기 때문이다. 나우웬은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얄궂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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