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발달장애인 공동체 '라르슈'(L'Arche)를 설립한 가톨릭 철학자 장 바니에(Jean Vanier, 1928~2019)가 생전 여성 6명에게 성폭력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 세계 라르슈 공동체 연합 '라르슈인터내셔널'은 2월 2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바니에와 그의 영적 스승 토마 필리프(Thomas Philippe, 1905~1993) 신부가 어떻게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렀고 이를 무마해 왔는지 자세히 밝혔다.

장 바니에에게 처음 성폭력 의혹이 제기된 시점은 2016년이었다. 라르슈인터내셔널은 2016년 5월 장 바니에를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하는 제보를 받았다. 당시 단체 리더들과 이사회는 자체 조사를 벌였다. 장 바니에는 제보한 여성과의 관계는 인정하면서도, '상호적인'(reciprocal) 관계인 줄 알았다며 여성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2019년 3월 라르슈인터내셔널에 또 다른 피해자가 증언해 왔다. 장 바니에는 2019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라르슈인터내셔널은 6월, 이 사안을 내부에서 해결하기보다는 학대를 조사하고 예방책을 세우는 전문 기관 'GCPS'에 의뢰하기로 했다.

GCPS는 장 바니에가 남긴 문서 277개와 그의 영적 스승 토마 필리프 신부가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재판 기록 등을 확보해 분석했다. 라르슈인터내셔널은 역사학자를 고용해 이 사건과 관련한 모든 날짜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GCPS 작업을 도왔다. GCPS는 총 여섯 사례를 수집했고, 피해자 5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라르슈를 거쳐 간 리더, 스태프 등 30명도 인터뷰했다.

GCPS가 7개월간 주력해서 조사한 부분은 △장 바니에의 성적 학대 △장 바니에와 토마 필리프 신부와의 관계 △장 바니에가 (자신 및 토마 필리프 신부의) 학대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반응이다. GCPS는 올해 2월 보고서를 내놓으며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알아낸 내용을 이해하고 보고하는 게 이번 일의 최종 목표"라고 밝혔다.

'영적 동행' 상황서 발생한 성폭력
신뢰, 권력 불균형 악용해 학대

GCPS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이번 조사가 진행되기 전까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다. 이들 모두는 과거 폭력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지만 모두 겸손했고 증오나 복수심은 없었다고 했다. 이들 모두는 라르슈가 과거를 반추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피해자는 총 6명이며, 성적 학대를 당한 기간은 1970년부터 2005년까지다. 다 다른 시기에 발생했으며, 어떤 사람의 경우 3~4년 지속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성인·비장애인으로 출신 지역, 나이, 결혼 여부 등이 다양했다. 처한 상황과 기간은 달랐지만 모두 비슷한 상황을 묘사했고, 상당한 증거가 나왔다. GCPS는 조사 결과 피해자 6명이 나왔을 뿐, 추가 피해가 없다고 확정 짓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장 바니에는 '영적 동행'(spiritual accompaniment)의 일환으로 피해자들을 모처로 불렀다고 했다. 몇몇 여성은 자신들이 정서적으로 연약한 상황에 있었는데, 장 바니에가 그런 심리 상태를 다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비혼, 기혼, 자발적 독신자 등 처한 상황은 다양했다. 가정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아버지상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감정적으로 학대받고 심각한 권력 불균형으로 자유의지가 박탈된 상황에서, 때로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성적 접촉이 발생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여성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영적 동행이 성적 접촉이 된 건 19XX년 무렵이다. (바니에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니에는 성적 행동을 아가서에 비유하며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을 분별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관계는 3~4년 지속됐다. 나는 매번 얼어붙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들었다. 바니에는 이것 또한 영적 동행의 일환이라고 했다."

"바니에는 '(성적 행동을 하는 건) 우리가 아니다. 마리아와 예수다. 당신은 선택받았고 특별하다. 이건 우리 둘의 비밀'이라고 말했다."

"19XX년 트롤리에 있을 때 나는 개인적인 일로 항상 우울하고 감정적으로 매우 연약했다. 장 바니에가 영적 지도를 해 준다고 밤늦은 시간 오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사적인 장소에 초대를 받았다. 굉장히 친밀한 관계에서 그는 성기 삽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다 했다."

피해자들 증언을 종합해 보면, 장 바니에 역시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듯 자신의 영적 권위를 이용해 성폭력을 가했다. 보고서는 "피해자 몇몇은 바니에를 영적 지도자로 신뢰했다. 하지만 바니에는 그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힘을 이용했고, 성적 행동을 하는 데 악용했다"고 밝혔다.

장 바니에는 생전 여성 6명을 성적 학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 출처 플리커
장 바니에는 생전 여성 6명을 성적 학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 출처 플리커

라르슈인터내셔널은 이번 보고서에서 장 바니에의 영적 스승 토마 필리프 신부의 성폭력도 명시했다. 보고서에는 토마 필리프 신부가 1952년 여성 두 명에게 성폭력으로 고소당했고, 1956년 교회법으로 치리받은 것도 나와 있다. 토마 필리프 신부는 고소당한 1952년부터 치리받은 1956년 사이, 그가 세운 단체를 장 바니에에게 맡겼다.

토마 필리프 신부는 4년간 단체 사람들을 만나거나 연락하지 말라는 가톨릭교회 방침을 어기고 장 바니에와 편지를 주고받거나 은밀하게 만나는 방법으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사람은 1964년 도시를 옮겨 라르슈를 설립했고, 필리프 신부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장 바니에와 함께 라르슈에 머물렀다.

장 바니에는 2015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사진 출처 플리커
장 바니에는 2015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사진 출처 플리커

라르슈인터내셔널은 보고서와 함께 발표한 입장문에서 "장 바니에가 그동안 주장해 온, 사람에 대한 진정성과 존중 의식에 정반대되는 조사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다. (중략) 장 바니에가 이 여성들과 추구한 관계가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그들 중 몇몇은 바니에의 행동에 깊게 상처받았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게 아닌, 각 사람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주목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피해자들 혹은 여전히 침묵 중인 이들의 용기와 고통을 이해한다. 수년 전 토마 필리프 신부의 성폭력을 공개한 여성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고도 했다.

라르슈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전 세계 지부 내에서 각종 폭력 및 학대 예방을 위한 대책을 세우고, 매뉴얼을 수립하는 등 정책을 바꿔 나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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