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슈퍼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덮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나름대로 필리핀 구호 활동을 벌여 왔다. 교단들은 소속 교회를 상대로 모금을 진행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구호금이 답지했다. 구호금이 재해 현장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취재하기 위해, 12월 13일 가장 피해가 심각하다는 레이테주 타클로반으로 갔다.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어린 아이들이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는 동안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다가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맑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며 손을 벌렸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뛰어다니며 놀다가 공항을 빠져나오는 승객들에게 다가갔다. 참담한 마음을 추스르고 택시에 탔다.

▲ 타클로반 공항(위). 비행기가 자주 뜨기는 하지만 여전히 곳곳이 부서진 채로 있다. 여기저기서 복구 공사가 한창이다. 공항 내부(아래). 수하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북적댄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지 않아 짐을 일일이 손으로 꺼낸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한 달이 지나서인지 길은 웬만큼 정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태풍으로 부서진 집과 쓰나미에 잠긴 모든 물건이 쓰레기가 됐다. 사람들은 넘쳐나는 쓰레기들을 어찌할 줄 몰라 곳곳에 쌓아 뒀다. 30도가 넘는 푹푹 찌는 날씨 속에서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직 태우지 못한 쓰레기가 썩으면서 벌레들이 들끓었다. 전봇대와 나무들은 허리가 꺾여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날씨는 덥지만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저녁 6시면 깜깜해졌는데 아직 타클로반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촛불과 랜턴으로 겨우 앞만 밝혔다. 긴 어둠 속에서 모기와 개미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동행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숙소를 잡았다. 한국으로 치면 작은 빌라 같은 곳인데, 살던 사람들이 태풍 때문에 살림을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났다. 마당에는 차 몇 대도 세워져 있었다. 바닷물에 잠겨 다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얼마 전부터 숙소에 물이 공급됐다. 짐을 풀고 물이 나오는 걸 확인하니 감사했다.

▲ 공항을 나서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승객들에게 다가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며 손을 벌렸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저녁에는 휴대폰과 전자 기기를 충전하러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매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발전기를 돌려 무료로 충전해 준다고 했다. 충전이 되기를 기다리는 한두 시간 동안 발전기가 내는 소음을 듣고 있자니 귀가 아파 왔다. 주민들은 전기가 없어 고생하는데, 성당 십자가와 성탄 장식에 계속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기이했다.

숙소에 돌아와 빌려 온 모기장 안에 몸을 누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발전기 소리를 너무 오래 들은 탓일까, 아니면 앞으로 2주 동안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일까.

▲ 집 앞에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와 쓰레기가 썩는 냄새가 뒤엉켰다. 마스크를 써도 계속 기침이 났다. 나무와 전봇대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박노헌 선교사, 태풍 속에 살아남아 교인들 먹여 살려

하룻밤을 넘기기도 고단한데, 이런 곳에서 한 달 넘게 생활하고 있는 선교사가 있다. 타클로반하비스트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노헌 선교사다. 박 선교사는 태풍 하이옌이 타클로반을 덮친 후 잠깐 타클로반을 떠났다가 바로 들어와 지금까지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에서 취재를 준비하며 타클로반에 가면 박 선교사를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냉소가 느껴졌다. 피곤이 누적돼서일까. 우선 약속을 잡고 12월 14일 오전 타클로반하비스트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 박노헌 선교사가 담임하는 타클로반하비스트교회(위). 박 선교사는 태풍이 들이닥칠 때 가족들과 예배당 다락에 올라가 지붕을 붙잡고 버텼다(아래). 예배당 뒤 숙소의 지붕이 완전히 날아가고 건물 곳곳이 붕괴됐다. 박 선교사와 가족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얘기를 나눠 보니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박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은 태풍이 몰려올 때 예배당 뒤 조그마한 다락에 올라가 지붕을 잡고 버텼다. 예배당에 물이 차오르고 거센 비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예배당 뒤에 있던 집 지붕마저 모두 날아가고 건물 곳곳이 붕괴됐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그와 그의 가족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막연함이 찾아왔다. 예배당이 박살난 것도 문제였지만 100명 남짓한 교인들이 대부분 집과 가족을 잃었다. 모른 척할 수 없어 지낼 곳이 사라진 교인들을 교회에서 생활하게 했다. 매번 수십 명의 끼니를 챙겼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가늠도 힘든 상황이다.

다행히도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필리핀 마닐라에 소재한 임마누엘한인교회(조현묵 목사)가 쌀과 담요 등 구호물자와 함께 지금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사람을 보냈다. 지원은 계속되고 있다. 임마누엘교회는 타클로반시와 협의해 집 1000채를 지을 수 있는 땅을 기증받기로 했다. 또 성경책 1000권을 주문해 놓은 상태다.

밀알복지재단도 큰 힘이 됐다고 박 선교사는 전했다. 밀알복지재단은 지금까지 쌀, 천막, 라면, 통조림, 담요 등 1000개 가구분의 구호물자를 전달했다. 박 선교사는 이들의 발 빠른 대처에 감사하며, 이들의 도움으로 자신과 현지 교인들이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해 초기에 도움을 주겠다며 상황 설명을 요구한 모 교단과 모 구호단체는 지금까지 별 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모 구호단체는 기별이 없고 모 교단에서는 기다리라는 언지만 반복했다.

태풍이 타클로반을 강타한 지 한 달이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박 선교사의 소속 교단 선교 단체는 그를 돕기로 가결했다. 해당 선교 단체는 재해 후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마닐라-세부-타클로반을 거점으로 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또 바로 380만 원을 현지 구호 자금으로 집행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선교사는 지금까지 그곳으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선교지에서 죽어라? 선교사도 트라우마 치유해야

▲ 박노헌 선교사는 지금 집과 교회를 잃은 교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생사의 기로에 선 현지 상황을 모르고, 한국교회가 무심코 던진 말에 박 선교사는 큰 상처를 받았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타클로반하비스트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인들은 교회 건물 지붕을 보수하고 예배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임마누엘교회에서 파송한 임정섭 전도사는 노방전도에 쓸 전도지를 만들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 교인들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바쁜 와중에 기자의 방문이 반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대화가 좀 더 깊어지자, 박노헌 선교사는 재해 현장에 와서도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힘이 빠진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누군가 교회를 방문한다고 하면, 공항에서 데려오는 것부터 먹는 것과 잠잘 곳까지 책임져야 했다. 당장 생존이 어려운 교인들이 즐비한데 방문객까지 챙기기가 벅찼다.

또 한 가지 박 선교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한국 목사들이 무심코 하는 말이었다. 박 선교사는 일부 목사들이 '재난을 통한 부흥'을 너무 쉽게 얘기한다고 말했다.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서 있는데, 이때를 성장의 기회로 삼으라는 주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족과 함께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선교사에게 '죽어도 선교지에서 죽으라'는 말은 폭력에 가까웠다.

마치 거룩하게 보이는 말들이 박 선교사에게 비수로 꽂혔다. 그는 이런 말들로 가족들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박 선교사는 "나는 이번 일에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받아 여기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이들은 버려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가 선교지를 떠나라고 해도 나는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큰 재해를 경험한 사람들은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직접 본 이들에겐 자신도 모르게 트라우마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은 유독 선교사들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다. 마닐라 안티폴로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현중 선교사는 재해 후에는 일단 그 지역 선교사를 안으로 불러들여 쉬게 하고, 구호 전문가들을 투입해 어느 정도 복구를 한 뒤에 다시 그를 파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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