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생명 평화 교회론 심포지엄'이 생명평화마당 주최로 9월 24일 열렸습니다. 10월 19일 열리는 '2013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작은교회 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해 작은 교회들이 모였습니다. 홍인규·양현혜·이정배 교수의 발제문 전문을 하나씩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한국적 교회론이 가능할까. 하나의, 사도적, 보편적 그리스도 교회론을 말해 온 역사적 맥락을 생각할 때 한국적이란 수식어가 생뚱스럽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찍이 어느 신학자는 한국교회에게 복음적·생명적 그리고 한국적일 것을 주문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국적이란 것과 복음적 혹은 생명적이란 것이 상호 낯선 개념이 아닐 듯하다. 오늘 우리는 '작은교회가 희망이다'란 주제하에 그간 신학적 입장을 달리해 온 목회자, 신학자들이 모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며 대안을 모색 중이다. 이를 위해 탈(脫)성장, 탈(脫)성직, 탈(脫)성별 등 3개의 '탈(脫)'을 목적하고 있다. 이는 곧 다가올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2017년을 옳게 대면코자 함이다. 아마도 이런 과제를 이루는 것이 복음(생명)적인 동시에 한국적이라는 한정사가 품은 뜻일 것이다. 한국적 영성(문화)과의 제대로 된 만남을 통해 미완의 과제로 남은 종교개혁을 완성시킬 뿐 아니라 축(軸)의 시대에 걸맞은 두 번째 종교개혁 역시 염두에 두고 있다.

1.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전과 이후 : 역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일반적으로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등가는 아니나 상응하는 가치와 권위를 지닌 세속 기관이라 불린다. 지나치게 '거룩'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탈이지만 오늘처럼 그 존재 양태가 자본주의를 닮아 있는 것도 우려가 아닐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될 필요는 있겠으나 방주와 같은 고립된 이미지를 벗겨내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그래서 혹자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일컬어 세상 안에 있되 세상 밖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땅에서 불가능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들 고유한 언어로 말하되 어느 때보다 그 속에 담긴 나눔, 공감(사랑)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가 선포되기를 열망한다. 인간 욕망을 자극하는 자본의 시대에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럴수록 신앙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과 다를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들만의 문법(언어)에 갇혀 혹은 믿음을 율법(신조)화하면서 정작 세상(속)적 가치를 선호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이다. 일찍이 본회퍼는 이런 삶을 살지 못하는 제자 없는 현실교회를 일컬어 기독교를 이념 혹은 신화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성이란 말이 회자되나 실상 그것 역시도 이런 체제 유지적인 담론을 보완 내지 강화시킬 목적에서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를 닮아 있는(유비적) 교회가 우리 주변에 없는 셈이다. 역설적으로 맘몬을 지향하는 교회들이 '거룩'을 빌미 삼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향후 10년 안에 개신교 인구가 지금의 절반 수준인 400만으로 줄 것이란 경고도 몇몇 대형 교회에겐 낯설게 들리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교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되 믿음과 은총의 '오직'(Sola)의 논리가 오히려 중세기의 면죄부보다 더 타락했다고 보는 까닭이다. 소위 목사의 크기를 교회의 크기에 견주는 것이야말로 교회 공동체를 모독하는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만으로 교회 공동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신앙의 눈(전승)이 있을 때 비로소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성립되는 까닭이다. 또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 삶의 구체적 형태를 발견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그렇기에 새 교회론을 위해 역사적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콘스탄티노플 이전 시대까지의 역사적 공동체로서 초대교회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초대교회에 대한 오해부터 종식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초대교회가 단일한 형태였다는 생각과 그것이 오늘 우리와 같은 믿음과 신조의 공동체라는 확신이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오늘 우리가 그렇듯 다양한 신학과 삶을 지닌 공동체였고 당시 가치관으로선 체제 전복적인 시도가 그들의 입장이었다. 당시 교회들도 무수히 달랐으나 전혀 다른 삶을 기획하였고 그에 헌신함에 있어 공통되었다. 오늘 우리도 서로 상이하나 이들처럼 뿌리정신(삶)에서 하나로 만날 생각이다. 앞서 말한 3개의 '탈(脫)'이 바로 이들과의 공시적 교감의 산물로서 복음적, 생명적 교회가 되는 관건일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적 가치란 실상 뿌리정신과 닮아 있다는 말이다.

2. 역사적 공동체(교회)의 실상과 복음의 정치학

한 신학자는 이런 공시적 현상을 언더그라운드 교회라 통칭한다. 오늘까지 지속되는 콘스탄티노플 이후의 기독교 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가 더 이상 예언자적 삶을 담지하지 못했듯 오늘 대다수 교회들 역시 세례받는 것이 노예를 거부하며 평화주의자가 되고 가난한 자들을 환대하는 삶을 사는 것과 무관하다. 그때처럼 현실의 교회에선 무수한 교리, 신조들만이 넘쳐날 뿐이다. 교회에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상상력) 때문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안정과 안전을 위해서인 까닭이다. 영육의 차원을 분리시켰고 정치를 교회로부터 추방시켜 버렸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 교회에서는 이와 달랐고 달라야 했다. 그곳에는 소위 복음의 정치학이란 것이 있었다. 부활 이후의 예수 공동체는 예수를 따름(행동)으로서만 그를 알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다. 성서 곳곳이 함께 떡을 나눌 때 눈이 밝아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전언하다. 바울 역시도 다메섹 체험 이후 종래의 이분법 구도를 버리고 모두를 가로지르는 보편성을 복음의 본질로 여기지 않았던가? 여하튼 초기 예수 공동체에선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말뿐이었고 그 기록이 바로 우리 앞의 복음서이다. 4세기 니케아 신조 이후의 기독교와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었다.

보았듯이 복음의 정치학은 당시 체제를 불편하게 했고 그들의 존재를 위협했다. 되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하루 살 품삯을 주었으며 성전을 무너지라 했고 안식일 법을 무력화시킨 예수는 분명 체제가 요구하는(Status quo) 존재는 아니었다. 당시 종교 체제에 있어 예수는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을 뿐이다. 하지만 복음의 정치학은 주기도문이 말하듯 하늘의 정의를 이 땅에 심고자 했기에 때론 과격했다. 기독교 체제를 유지, 지탱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가 된 현실 교회의 예수상과 크게 달랐다.

이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공동체로부터 다음 세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우선 앞서 말했듯 AD. 4세기 이전까지 로마 곳곳에 자리한 교회들은 하나로 획일한 표준 신조(성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예수의 삶을 근거로 다양하게 발전되었을 뿐이다. 역사적 형태는 다양(분열)하나 예수 삶에 중심을 둔 까닭에 언제든 지향점이 같았고 풍요로웠다. 다음으로 참된 신앙의 시대(H. 콕스)로 불리는 초대교회 시기 오늘날 통용되는 사도직이란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주어진 은사(카리스마)들만이 존재할 뿐 수직적 성직 제도는 아주 후대의 산물이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교회는 예수 운동으로 존재했기에 반제국주의적 색채가 짙었다는 사실이다.

예수 추종자들은 로마가 멸망할 것을 굳게 믿고 그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폭압에 대해 버티고 견디며 참는 것만이 자신들이 감내할 부분이었다. 이들을 지탱한 것은 일치된 신조가 아니라 예수를 추종하는 진정한 제자도였다. 그들에게 예수가 주님이란 것은 단순 신조(교리)적 차원의 지적 승인이 아니었고 제국(세상)의 주인 됨의 거부이자 의식적으로 그들 죽임의 방식에 맞서는 대안적 삶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3. 세 '脫'에 대한 역사적 공동체의 신학적 메시지

바로 이런 역사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작은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이름하에 작은 교회 박람회가 근간으로 삼은 세 종류의 '脫'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교회의 실상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세 '脫'과 의미론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점에서 '脫'성장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과 유관하며 '믿기'가 아니라 '살기'의 차원을 중시한다. 또한 '脫'성장은 성숙을 이르는 바, 오늘과 같은 소수의 대형 교회가 아닌 다수의 다양한 카리스마 공동체를 지향한다. 초대 공동체 안에서부터 시작된 해석(공동체)의 다양성은 결코 부정될 것이 아니라 더욱 긍정되어야 할 사안이다. 언제든'하나'의 획일적 가치를 추동한 것은 제국주의적 기독교였다. 문제는 저마다 다른 해석 공동체 안에서 보편적 가치, 곧 예수 삶의 에토스를 실현시키는 일, 곧 '제자 되기'이다.

따라서 카리스마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脫'성직으로 귀결된다. 종교개혁의 원리 중, 지나쳐서 문제가 된 것도 있지만 아직 시작도 해 보지 못한 '만인제사직론' 같은 것도 있다. 일찍이 함석헌은 이 땅에 들어온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종교로 변질된 것을 깊이 우려하였다. 오늘 우리 사회 속에 종교의 이름을 걸고 생활하는 성직자의 수가 실상 너무 많다. 야간에 대리 운전하며 생활을 연명하는 목회자들 숫자도 늘고 있다. 아픈 현실이나 그래도 이는 수용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저마다 경쟁이 되다 보니 스스로를 거룩타 하며 신비화하고 권위적으로 변질되는 양상이다. 그렇게 되어야 신도들을 권위에 종속시킬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하지만 정작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선포하였다. 심지어 종교(율법)가 인간에게 종의 멍에를 씌울 때도 그를 벗으라고 하신 것이다.

세 번째의 '脫'성별 역시 기독교 성숙의 잣대이자 민주 사회의 역량을 반영한다. 우리는 지금 중세가 아닌 기독교 이후 시대를 살고 있다. 특정 종교인이기도 하나 뭇 타자를 존중하며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함을 배우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독교는 종종 여성을 자신들이 보유한 최후 식민지처럼 관계한다.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여성 비율이 현저하게 낮으며 여성 목회자(전도사)들에 대한 인식이 일천하며 교회 내 잡일은 여신도들의 몫인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에 의한 성폭력의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향후 교회가 양성평등의 가치에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여성들의 급격한 일탈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동역자들 중에서 과반수에 가까운 이들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깊이 숙고할 주제이다.

결국 세 형태의 '脫'은 체제 변화를 위한 예수 제자들이 걸머져야 할 과제가 되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들 작은교회의 존재 이유가 된 것이다. 대형 교회는 脫지역화된 세몰이 '조직'으로 기능하나 작은교회는 지역 안에서 가치 지향적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당시 교회가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었듯이 오늘 우리 작은교회들도 스스로 대역전의 삶을 선포하고 준비해야 마땅하다. 평등적 질서로 세상을 위협했던 예수 운동이 어느덧 위계질서를 지닌 폐쇄적 조직, 신조를 강조하는 율법화된 공동체로 변질되어 세상(제국)에 길들여져 있는 것에 먼저 소스라치게 놀라야 가능한 일이다. 교회가 세상을 불편하게 하기는커녕 이 세상 저 세상을 두루 잘 살 수 있다는 종교적 탐욕을 전하고 있음을 깊이 반성할 일이다.

4. 역사적 공동체의 한국적 실현 : 한국적 교회론?

오늘의 교회상이 이렇듯 변질된 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잘못된 방식으로 정착된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이 땅의 종교 문화와 제대로 만났더라면 한국교회가 서구적 형태와 변별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리되지 못한 것이다. 어느 종교든 긍·부정적 측면이 있는 것인데 불행히도 제도화된 교회의 부정적 측면과 이 땅의 부정적 종교 현상이 접목되고 말았다. 주지하듯 한국교회 안에는 성서적 그리스도인 상보다는 제각기 무속적, 유교적 그리고 불교적 기독교인들이 많은 듯 보인다. 저마다 명시적 기독교들이긴 하지만 그들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부정적인 이 땅의 종교성들인 것이다.

예컨대 무속적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기복적(현세 지향적) 특성을 지녔고 유교적 기독교들이 경우 기독교의 가부장적 가치를 강화시켰으며 그리고 불교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현실을 초연하고 부정하는 탈정치적 신앙 양식을 표출하고 있는 듯하다. 혹자는 이것을 한국적 기독교의 모습이라 폄하하고 제 종교들과의 단절 내지 투쟁을 기독교 본연의 과제라 인식하나 이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이런 부정성은 기독교에 앞서 이 땅의 주인이었던 종교들의 일면일 뿐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이들 종교들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가치를 강화시킬 수 있고 새 시대에 필요한 누룩과 같은 요소를 찾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가치 지향적 만남을 위해 그간 토착화 신학자들이 노력해 왔고 그 바탕에서 교회론의 '한국적' 의미를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익히 아는 대로 최근 한류 열풍이 도처에서 확인된다. 문화 근친성을 지닌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아랍권, 남미권을 비롯하여 영미권에서도 그 실상이 감지되며 심지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평화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전언이다. 한류가 단순히 서구 모방의 산물이라거나 자본주의 결과물이라는 지나친 폄하는 삼갈 때가 되었다. 한류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샤머니즘을 비롯한 유교, 불교의 통섭을 읽는 것이 옳다. 즉 한류란 서구와의 공간적 혼종성만이 아니라 우리이 과거와 현재 간의 시간적 혼종성의 실상이란 것이다. 이 땅의 미(철)학자들은 한류가 품은 가치를 興, 情 그리고 限(아우름, 혹은 넘어서기)이라 본다. 드라마, 춤과 노래(K-pop), 소설 속에서 한국 종교 문화의 원류가 흥(무속).정(유교) 한(불교)으로 녹아 있다는 것이다.

▲ 이정배 교수는 흥, 정, 한으로 재구성된 기독교, 즉 새로운 한국적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향후 기독교는 이런 한류의 바람을 받아 흥과 정 그리고 한의 가치를 복음과 접목시켜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과거 종교개혁이 독일 신비주의 풍토에서 비롯했듯 한류가 두 번째 종교개혁의 토양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한류와 기독교와의 접목은 險한류, 反한류의 기류를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문화 전략이라 봐도 좋을 듯싶다.

그렇다면 흥. 정 그리고 한으로 재구성된 기독교 곧 새로운 공동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 것인가? 지면상 간략히 정리하면 興이란 '참 좋다'라는 하느님 환호의 표현이자 기쁜 소식(복음)의 실상이다. 이는 창조된 세상이 조화와 균형 속에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興의 공동체란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 대신 모두가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강조한다. 일(노동)이 있어야 안식이 유의미한 까닭이다. 情이란 어느 누구도 홀로 슬프거나 기쁘지 않음은 물론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감하는 공감의 상태이다. 따라서 情의 공동체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예수의 식탁 공동체와 유관할 수밖에 없다. 한이란 일체 갈등을 아우르며 경계를 넓힐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을 넘는 삶이 가능한 것도 한의 종교성이 주는 선물일 것이다.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한의 종교성은 성령의 역할과 닮아 있다.

결국 하느님, 예수, 성령이 각기 흥·정 그리고 한과 만나 자신의 본뜻을 이룰 수 있는 한국적 교회 공동체로 재구성될(거듭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기독교(교회)는 자기 틀을 넘어 생명, 정의 그리고 평화라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배 / 감신대 교수·생명평화마당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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